
“잘 생기면 원나잇…” 한 달에 한 번, 춤추고 노래하며‘짧은 하루’를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 밤이 되면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6번 출구는 젊음의 해방구로 변한다. 5000명이 넘는 남녀가 펼치는 춤과 음악의 향연 ‘클럽데이’. 이 날은 홍익대학교 앞의 뮤직클럽이 모여 한 달에 한 번씩 벌이는 축제다. 2001년 3월에 처음 열려 오는 3월 25일이면 47번째를 맞는다. 한 클럽의 입장료가 1만원 안팎인데 이날은 1만5000원짜리 ‘티켓 팔찌’ 하나만 사면 14개 클럽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클러버’(클럽을 자주 찾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조어)가 많게는 1만명까지 모인다.
“요즘 20대가 어떤 식으로 젊음을 누리고 사는지 알려면 클럽데이에 가서 보세요. 청담동 카페나 대학로의 놀이문화에 비해 훨씬 다양한 자기표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제멋대로라거나, 아니면 자유롭게 보인다거나 하는 것은 순전히 당신 사정이지만 그들은 남의 시선에 개의치 않습니다.
기성세대에 반항하지도 않고, 그럴 듯한 의미를 굳이 담고 싶어 하지도 않는, 그들만의 거리낌 없는 ‘놀자판’인 거죠.” 클럽매니아로 클럽데이 산파역 중 한 명이기도 한 추계예술대학 박은식(여·40) 교수의 말이다.
‘팔찌’ 하나 사면 14개 클럽 마음대로
2월 25일 밤 12시 홍대 앞 힙합클럽 ‘NB’. 100평 남짓한 플로어를 발 디딜 틈조차 없이 가득 메운 300여명. 질척한 힙합 리듬과 천장에서 뿜어대는 인공안개 속에서 남녀가 밀착한 채 흐느적거리고 있다. 뜻밖에도 무려 70%가 여자다. 그것도 모두 TV에서 막 뛰쳐나온 듯한 쭉쭉빵빵 미녀들. ‘강남의 미녀가 요즘 홍대 앞으로 몰린다’는 말이 실감난다. 기어를 한 단계 낮춘 듯한 템포, 휴대폰 광고음악으로 귀에 익은 메리 J 블리지의 ‘패밀리 어페어’가 리믹스되어 스피커를 울린다.
인파 속에 떠밀려 여자들 틈으로 들어갔다. 야자수처럼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가슴에 닿았다. 한 가닥 끈으로 가린 흰 등줄기 아래 반원을 그리는 엉덩이의 웨이브가 유압을 받은 브레이크 드럼처럼 내 몸에 밀착해왔다. ‘맙소사!’ 얼굴이 달아올랐다. 스타일리시한 미니스커트에 붉은 탱크톱. 미녀가 암만 많아도 최고는 한눈에 띈다. 땀에 젖은 그녀가 턴할 때마다 배꼽과 허리에 매달린 은색 피어싱과 스트링이 찰랑거렸다. 흥분한 사내들이 그녀를 번쩍 들어올려 양손으로 떠받치고 환호성처럼 후렴을 래핑한다. “Put your hands up! Put your hands up!…” 오늘밤 그녀는 춤의 여신이다.
하우스뮤직클럽 ‘M2’. 이곳도 줄을 서야 입장할 만큼 붐비긴 마찬가지다. 폭발하는 사운드에 귀가 뜨겁다. 빡빡머리 남자가 즐비하고 여자는 거의 오프숄더 차림이다. 비키니 수영복 수준도 있다. “거기! 우두커니 섰지 말고 비켜요!” 누군가 내 귀에 대고 외쳤다. 돌아보니 두 명의 롱부츠 아가씨. 깊게 팬 가슴 위로 나도 모르게 시선이 꽂힌다. 동행한 김승욱 기자가 맥주를 내밀었다. 인천교육대학에 다닌다고 했다. “클럽은 나이트보다 싸잖아요. 나이트 가면 비싸고 귀찮게 부킹해야 되고….” 미래의 교사들은 맥주 한 병씩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클럽데이를 제대로 즐기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한단다. “그렇게 입고 안 추워요?” 뒤따라 나가며 괜히 한마디 던졌더니 한심하다는 듯 돌아본다. “여자 맘을 모르시네. 오늘 같은 날은 무조건 예쁘게 입어야죠. 청바지에 패딩 입고 춤 추면 누가 봐주기나 하나요?”
자정이 넘어가자 거리는 오히려 더 붐볐다. 동성끼리 움직이던 남녀가 쌍쌍으로 짝을 이루기 시작했다. 2:2 또는 3:3이다. 옷 잘 입고 훤칠한, 춤꾼처럼 보이는 남자에게 ‘진짜 커플은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보니 “진짜 커플이 어딨어요! 열에 하나 정도? 거의 다 처음 본 애고 맘에 들면 원나잇 가는 거죠”라고 했다. 대부분 춤 추면서 파트너를 정한다. 여초현상 덕에 커플 형성이 더 원활하다. 파란 눈의 외국인도 제법 보였다. 대부분 한국 여자들을 다정하게 끼고 있다.
2명의 여자가 다가와 ‘후퍼 클럽’ 가는 길을 물었다. 한 명은 파티복이고 한 명은 평상복이다. “지방에서 왔어요. 나는 두어 번 와봤지만 내 친구는 첨이에요.” 아닌 게 아니라 의상이 중요했다. 평상복은 얼굴이 더 예쁜데도 공주를 모신 시녀 같지 않은가. 그녀들은 후퍼까지 가기 전에 3명의 남자에게 둘러싸였다.
문턱 낮아지면서 색깔도 옅어져
클럽은 나이트와 다르다. 나이트는 부킹과 술이 우선이지만 클럽은 음악과 춤이 우선이다. 또 클럽에는 늙었다고 문전박대하는 속칭 ‘물관리’가 없다. 클러버의 개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나이가 좀 많아도, 청바지에 남방을 입거나 정장에 구두를 신고 들어가도 상관없다. 춤을 못 춘다고 걱정할 필요도 없다. 사실 반 이상이 그냥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드는 사람이다. 소수의 매니아들이 향유하던 클럽문화가 대중화를 이루게 된 계기가 바로 클럽데이다.
1990년대 말까지 클럽은 ‘마약의 온상’이란 이미지가 강했고 그로 인해 수시로 영업제재를 받아야하는 ‘불량업소’였다. 2001년 3월 4명의 클럽 주인과 800명의 클럽매니아가 ‘홍대 클럽 하나 되기’라는 슬로건으로 제1회 클럽데이를 열었다. 기대 이상의 대성공을 거뒀다. 클럽은 물론 홍대앞 상가 전체를 마케팅하는 효과를 거둬 지역 상인의 호응까지 얻어냈다. 급기야 단속이나 일삼던 서울시에서 홍대앞을 야간 관광명소로 지정했다.
그러나 문턱이 낮아진 만큼 클럽문화 특유의 색깔은 옅어졌다. 음악보다 부킹과 일회성 섹스에 관심을 두고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클럽데이는 변질된 클럽문화의 현주소’란 자조도 들린다.
1990년대 후반까지 홍대앞은 라이브 클럽이 전성기를 누렸다. 언더그라운드 밴드와 인디 밴드가 공연을 했고 그 중에는 메이저로 올라선 뮤지션도 상당수다. ‘델리 스파이스’ ‘크라잉넛’ ‘자우림’ 등이 홍대앞 라이브 클럽에서 싹을 틔웠다. 그러나 클럽데이를 계기로 큰 자본이 투입된 댄스클럽이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반면 원조격인 라이브 클럽은 재정난에 허덕이며 인디뮤직의 실험무대라는 의미마저 퇴색하고 있다.
“아 진짜 짜증나게 하네”
새벽 2시 클럽 ‘후퍼’. 술에 젖은 사내들이 더욱 대담해졌다. 벽 쪽에 붙은 남녀는 몸을 밀착시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남자가 맘에 드는 여자 뒤로 돌아가 몸을 비비는 이 구애의 몸동작을 ‘부비부비춤’ 혹은 ‘매미춤’이라고 한다. 여자의 반응은 즉각적이다. 흘낏 돌아보고 ‘물’이 좋으면 잠자코 응하지만 맘에 안들면 바로 털어버린다. 한쪽에서 “아 진짜 짜증나게 하네”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싫다는데도 남자가 끈질기게 달라붙자 여자가 소리를 지르고 나가버렸다.
“아우, 애들이 진짜 더럽게 놀아요.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새는 클럽이 나이트보다 더 심해요!” NB클럽에서 나온 4명의 여자가 인상을 쓰고 있다. 얼굴은 빠지는 편이나 복장은 화려했다. 21살부터 23살까지라고 했다.
“여자애들도 부비부비 열라 좋아하는 애 많아요. 우린 아녜요. 여자들은 남자보다 옷에 목숨 거는 편이죠.” 그들의 드레스는 오늘을 위해 의상실에서 특별히 맞춘 것이다.
서울과 일산에 사는 24살 남성 5명에게 말을 걸었다. “왜 오냐고요? 춤이 좋고 음악이 좋아서 와요. 우리 춤 잘 추거든요.” “2차는 옵션이지 의도하지 않아요. 부비부비 목적으로 오는 애는 한눈에 딱 알 수 있어요. 얼굴 잘 생겨야 원나잇 가능해요.”
새벽 3시 반. 짝을 지어 택시를 타고 떠나는 커플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한 백인이 한국 여자를 차에 태우고 사라졌다. “저 새끼, 남의 나라 와서 X지랄 떨고 있네. XX들!” 어려보이는 남자 셋이 가운데 손가락을 펴보이며 침을 뱉었다. “우린 지방에서 올라왔어요. 술 한잔 하고 홍대클럽 한번 가보자 해서 왔는데 뭔 양놈이 이렇게 많아요? 재수 없게.” 욕설을 하면서도 지나가는 여자들을 훔쳐보느라 눈동자가 바쁘다.
“모텔 갈 양이면 신촌으로 가든가”
새벽 5시, 파장 분위기다. 술집 전단지가 어지럽게 흩어진 길바닥에 밤새 노느라 지친 남녀가 여기저기 주저앉아 있다. 한쪽에서는 젊은 남자 둘이 시비가 붙었다. 길에 서 있는 여자에게 작업을 걸었는데 이미 파트너가 있었던 모양이다. 남자들은 이중부킹된 여자를 두고 욕설을 주고 받더니 결국 피를 보고야 말았다. 경호업체 요원들이 뛰어와 나뒹구는 둘을 겨우 떼어놓았다. 여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폭력사건이 빈발하다보니 각 클럽에서는 경호업체에 의뢰해 안전요원을 배치하고 있다. 경찰이 오기 전에 현장을 수습할 수 있어서 좋다. 오늘은 날씨가 추워서인지 싸움이 없는 편이란다.
새벽 6시, 여관을 찾았으나 빈 방이 없다. “오늘 같은 날 방이 있나. 이 주변은 다 마찬가지야.” 여관 주인과 이야기 하는 도중 마침 한 커플이 방에서 나왔다. 그러나 주인 아주머니는 “다 예약돼 있고 다음 손님이 곧 올 것”이라며 우리 등을 떠밀었다. 예약은 방마다 1시간 단위로 두 탕 세 탕씩 짜여 있었다. 여자를 방에 재워두고 나간 남자가 새 파트너를 데리고 와 딴 방을 찾기도 한단다. “모텔 갈 양이면 신촌으로 나가보든가.”
인근 사우나에는 젊은 남자들로 넘쳐났다. 수면실이 모자라 탈의실 바닥에 널브러져 자고 있다. 거의 클럽데이에 온 사람이었다. 잠자리를 찾노라니 낯익은 친구들이 눈에 띄었다.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고 외국인을 욕하던 지방 학생들이었다. 그들의 ‘클럽데이 도전’은 시시하게 끝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