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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정조 열풍

이형근 |2007.11.07 20:50
조회 133 |추천 0


 

정조가 드라마가 되더니, 영화로 나오고, 나아가 연극과 뮤지컬까지 나오고 있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난 정조를 우대하지도 않지만 하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조선은 정조를 필두로 하여 급속도로 사회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다시말하자면 정조는 조선의 마지막 문예 부흥을 일으킨 임금이 아니라 조선이 무너지는 그 기초가 된다고 하겠다.

 

중국으로 치자면 당대 현종은 개원의 치를 이루었지만 훗날 양귀비와 안사의 난으로 당의 몰락을 가져온 황제로 여긴다. 정조도 그런 임금이 되어야 하는데 어째 그의 ‘영웅적인 면모’만 다루고 있는지 참 웃기는 일이다. 그는 무너지는 조선을 굳건히 세운 임금이 아니라 조선의 무너짐의 시작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치적을 무시하면 안되지만 지금 정조에 대한 관심이 ‘조선의 마지막 르네쌍스 문예 부흥 군주’로 칭송되고 있으니 이건 아니다 싶은 것이다.

 

정조 이산이라는 드라마에서 알듯이 정조의 이름은 산이요, 조선 기네스 기록을 2가지나 가지고 있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사도세자는 조선 역대로 가장 어린나이에 세자 책봉이 되엇으며, 또한 가장 어린 나이에 결혼한 세자 되시겠다.

 

정조의 임금 되기는 참으로 고됨은 지금 드라마 정조 이산을 보며 알듯이 3일에 한번 잠자리를 옮겨갈 정도로 고난다사했다. 홍인한, 화완옹주, 정후겸등의 패악질은 정조가 더욱 굳건하게 살아남아야 한다는 어떠한 이유를 주기에 충분했고 그렇기에 홍국영, 정인시 등의 정조 측근 세력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1776년 3월 세손 이산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한 일은 어머니 헤빈홍씨를 혜경궁 홍씨로 승격시킨 일,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승격시킨 일, 홍인한, 정후겸 등 자신의 앞길을 방해한 무리 70여명의 죄를 하나하나 기록하여 그 죄상을 밝혀서는 모두 처벌하였다. 세손 시절의 원한을 먼저 갚아버린 임금이다. 물론 인지상정이라고 그런 무리는 바로바로 처리해야하는 바이지만 ‘문예임금’ 뭐 그런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지 않은가.

 

그리고 나서는 자신을 세손시절부터 왕이 되는데 큰 도움을 준 홍국영을 도승지, 숙위소 대장을 겸하게 하여 홍국영으로 하여금 권세를 누리게 하여 ‘정후겸이 소후겸이면, 홍국영은 대후겸이다’라는 원성을 들을 정도였다. 더구나 홍국영이 궁으로 보낸 누이 원빈이 갑자기 죽자 자신의 권력이 약화될까 두려워 종통까지 바꾸는 등의 훗날 세도정치의 원조를 보여준다.

 

정조는 몰랐을까? 아니 알았다고 봄이 옳다. 하지만 자신을 도와준 세력임에 그의 행태를 눈을 감고 지켜본 것이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종통’을 바꾸려고 하는 행위에 정조는 홍국영을 바로 내치고서는 스스로 정사를 시작한다. 즉, 홍국영 이전에 정조는 정사를 직접 본 적이 없다. 언제나 홍국영으로부터 듣고 파악한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세도정치’의 시작임을 알리는 행위요, 홍국영의 행태는 훗날 안동김씨, 풍양조씨 등의 세도정치가문의 본보기가 된 것이다.

 

왕과나나 이산에서 보듯이 경연이란 신하와 임금, 세자가 공부를 하는 자리다. 즉, 고대 경전을 가지고 이를 신하가 임금에게 가르치는 일종의 학문소지만 경연이 끝나면 정책회의를 집행하는 등의 정책집행기구 역할도 겸하였다. 이러한 경연은 정조 이전에는 신하가 임금에 가르치는 형국이었으나 정조대에 이르러 이것이 거꾸로 뒤바뀌어 정조가 신하들에게 경전을 가르치는 형태로 바뀌어 버린다. 이는 정조가 많이 알고 배움이 많은 탓도 있지만 신하들을 믿지 못하고 그네들을 쥐락펴락 하고자 하는 왕권 중심의 생각에서 나온 방편이다. 이러한 경연의 바뀜은 정책회의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버린다. 신권 중심의 조선에서 느닷없는 정조의 왕권 중심으로의 개편 노력은 신하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정조는 문예임금으로서 그 명망이 드높고, 그 자신 책이라면 환장하는 독서광이었다. 그래서 그는 책을 편찬하기 위한 활자를 많이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정조는 ‘독서광’이었지만 다수의 사람이 책 읽는 것을 싫어한 군주였다. 그는 출판에는 영 관심이 없었던 터라 활자는 80만자 이상을 만들어냈으나 고작 새로 저술된 책은 1/3 밖에 되지 않고 오직 출간된 것은 이미 있었던 책의 재판뿐이었던 것도 정조 그 자신만의 ‘인테리틱’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했는지 아님 ‘왕권 강화’라는 자신의 원대 목표였는지 모르는 이러한 각종 개혁과제들은 조선을 세운 것이 아니라 되려 조선을 나락에 집어넣은 격이 되어버렸으니 49세의 병사지만, ‘정조 암살설’이 나오는 이유도 이러한 왕과 신하의 대결구도에서 정조가 패한 것이리다.

 

현종은 안사의 난으로 당의 몰락을 가져왔으나 그 후에도 당의 멸망까지는 300년이 걸렸다. 정조는 조선 부흥을 꿈꿨으나 그의 사후 97년만에 조선이 멸망하였다. 시대가 조선의 몰락을 가져왔고 그 몰락을 정조가 조금이라도 지연시켰다는 평도 있지만 고작 100년도 안되게 지속시킨 것 가지고 그의 노력이라 할 수 없다.

 

조선의 멸망을 세도정치 때문이라고 한다면 세도정치의 원조가 되는 ‘홍국영’때인 정조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태조 이성계보다는 태종 이방원이 조선의 기반을 잡았고

성종 이혈보다는 세종 이도가 조선의 문물을 확고히 다잡았다.

순조 이공이 나라를 말아먹었지만

고종 이철이 실질적으로 나라를 말아먹은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당대로써 인물을 평가해서는 안된다. 시대사는 당대가 아닌 그 이후의 일로써 평가해야 한다. 선장이 함선을 가지고 바다를 항해하다가 빙하에 부딪혀 큰 사고가 나고, 선장이 그 쇼크사로 죽고 부선장이 선장이 되었지만 어쩌지 못해 함선이 바다에 가라앉아 모두 죽었다면 배와 함께 가라앉은 선장의 이름은 남겠지만 실질적으로 배를 가라앉힌 선장의 죄가 더 큰 것은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정조 이산은 문예를 좋아한 임금이었을뿐 조선에 세도정치의 씨앗을 뿌린 임금이다.

김홍도, 신윤복 같은 이들이 정조 시대에 그 이름을 날린 것도 우연은 아니다.

 

지금 각 연예계에 불고 있는 ‘정조 바람’ 한때의 바람으로 치부하기에는 ‘정조 광풍’이다.

아니면, 드라마 정조 이산이 인기가 있으니까 너도 나도 따라하는건가? 라고 하기에 정조 이산이 왕과나의 시청률을 이긴 것은 이제 겨우 11월 5일 월요일이었다.

 

문화재청장 유홍준이 노무현 대통령을 이르러 ‘정조같다’라고 한 것에서부터 ‘정조 바람’이 문화계에 불어닥친 것은 아닌가 심사숙고 해 볼 문제는 아니겠는가.

 

Written by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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