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背信)이 남기는 교훈
화제의 영화, ‘색, 계(色戒)’의 줄거리는 의외로 단순하더군요. 일제 치하의 중국에서, 순진한 여대생 왕치아즈는 일본의 앞잡이인 첩보대장 이 장군을 유혹, 암살하려 합니다. 하지만 첩보대장과의 육체적인 사랑에 빠져 혼란을 느끼고, 결과적으로 조국을 배신하고 만다는 비극적인 내용입니다. 남녀 간의 애정과 조국애라는, 인간사에서 어느 하나 양보하기 어려운 두 개의 가치가 충돌한 상황에서, 그녀는 목숨까지 버리고 사랑을 택합니다.
요즘 시중에는 또 다른 ‘배신(背信)’이 술안줏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삼성그룹에서 법무팀장으로 일했던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의 비리의혹을 폭로한 사건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 사건을 두고 한 택시기사는 “요즘 손님들 사이에서 대통령 선거보다 더 화제”라고 말하더군요.
지난 5일 기자회견에서 밝혔듯이, 김 변호사는 검찰을 떠난 후 ‘망하지 않고 월급 꼬박꼬박 나올 것이란 막연한 생각 때문에’ 삼성에 입사합니다.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스스로 삼성을 택한 것이죠. 그리고 1998년부터 2004년까지 100억원이란 거액의 연봉을 받으며 사내변호사로서 회사의 기밀업무들을 처리해 왔습니다. 당시로선 현직검사 출신을 민간기업으로 영입하기 어려운 풍토였기 때문에 대접도 파격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랬던 김 변호사가 재직 당시의 업무내용을 폭로하면서 공격하고 나선 것은 삼성으로선 분명 ‘배신’입니다. 그 스스로도 “조직을 배신한 사람이라고 욕을 해도 좋다”고까지 말했으니, 삼성의 분노와 배신감은 헤아리고도 남습니다. 삼성뿐이 아닙니다. “대기업들이 로비하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냐” “애당초 사람을 잘못 뽑았다” “퇴직임원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그런 사단이 났느냐”는 등 다른 대기업 임원들도 자기 회사 일처럼 흥분했습니다.
김 변호사의 폭로내용이 사실인지 여부는 검찰이나 특별검사의 수사를 통해 반드시 밝혀져야 합니다. 물론 삼성 측은 “대부분은 거짓”이라며, 부인하고 있습니다. ‘대쪽검사’라는 별명을 가진 삼성의 이종왕 법무실장이 사표를 던지면서까지 김 변호사를 비난한 점으로 미루어, 삼성도 분명 억울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역설적으로 우리 기업들에 큰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기업들은 내부임원들의 배신을 전제로, 다시 말해 “누구든 언젠가는 배신할지 모른다”는 살벌한 가정하에, 경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믿는 것보다, 깨끗하고 투명한 경영을 담보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게 더 중요하다는 교훈입니다.
청렴도가 높은 선진국 기업들은 이런 시스템이 잘 발달되어 있습니다. 미국계 기업의 한국지사에서 중간간부로 근무하는 K씨는 가끔 미국 본사로부터 ‘핫 라인(Hot Line)’이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받습니다. 한국지사가 법규와 규칙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혹시 상사가 비위를 저지른 사실은 없는지를 묻는 내용입니다. 고발이 있으면 본사는 내부고발자를 철저히 보호하는 가운데 신속히 문제를 시정합니다.
한 일본계 회사는 내부고발자들이 두려워할까봐 아예 회사 밖에 변호사를 지정해 둡니다. 회사의 비리를 접한 직원들이 이 외부 변호사에게 사실을 알리면, 이 변호사는 비밀리에 고발내용을 처리합니다. 투명성이 높기로 이름난 GE는 임직원들에게 “당신의 행동이 언론에 노출된다고 가정했을 때도 떳떳할 수 있도록 처신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윤리경영에 대한 기업 오너의 확고한 철학입니다. GE의 이멜트 회장은 “윤리경영보다 더 가치 있는 사업은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우리 기업 오너들도 차제에‘사람의 마음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교훈을 깨닫기 바랍니다. 배신을 당해 회사가 망한 뒤에는 땅을 쳐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강효상 사회부장 hskang@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