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회창...
한 때는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그리고 제1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금은 무소속이라는 이름으로 세번째 대선을 묵묵하게 걸어가고 있는 사람.
우리는 이 사람이 궁금하다.
늘 미안한, 언제나 고마운, 그리고 여전히 사랑하는...
경기고, 서울대 졸업 후 8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공군 법무관을 마치고 서울지법 판사로 임용되었으며, 이때 한인옥 여사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양성평등을 실천한 우리나라 최초의 법관
1988년 12월 27일 대법원 대법관이던 이회창 후보는, 당시 한국전기통신공사(한국통신의 전신)의 여성교환원 김영희씨가 제기한 소송의 원심판결을 파기·고등법원으로 환송하였다.
이로써 전화교환원(대부분 여성)의 정년을 43세로 한 한국전기통신공사의 단체협약이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무효화되었다.
대법원은 대부분의 직원이 남성인 일반직원의 정년은 55세로 정하고, 대부분의 직원이 여성인 교환원의 정년은 43세로 정한 단체협약이 남녀평등 원칙에 위배된다고 판시한 것이다.
대법원의 이 판결은 우리나라에서 남녀평등을 실현한 최초의 판결로 기록되고 있다.
소수는 소중하기도 하거니와 때로는 위대하기까지 하다.
그는 시국 사건 재판에서 진보적 소수의견을 냈다. 특히 과외행위로 기소된 대학생의 사건에서 “일시적으로 행하는 교습행위는 과외금지 조치에 해당하지 않는다”라고 해석해, 5공(共)의 업적으로 꼽던 ‘과외금지조치’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이로 인해 ‘대쪽’이라는 명성을 얻었으나, 재임명에 탈락돼 변호사를 개업했다.
이회창 후보는 대법관 재임 5년동안 대법원 전원합의체로 넘겨진 46건 가운데 무려 13건의 소수의견을 냈다.
법원에서 일하는 동안 이회창은 틈나는 대로 후배 법관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항상 약자를 눈여겨보아라. 그래서 약자가 부당하게 억울함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소신과 용기로 법을 실천하다.
70~80년대 선관위는 투개표 관리기능만을 수행하는 곳이였다. 그러나 1988년 그가 중앙선관위원장이 된 후 1989년 동해 보궐선거, 서울 영등포을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부정과혼탁선거가 자행되자 당시 노태우 대통령,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야3당 총재에게 경고성 문서를 발송하고, 선관위는 창설 이후 처음으로 단속반을 편성, 투입하였다. 두 번의 재선거에서 후보와 선거사무장 등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으나 검찰이 무혐의 결정을 내리자 이 위원장은 그해 10월 ”공명선거 풍토 확립의 임무를 달성하지 못하고 국민으로부터 타락선거라는 비난을 받은 데 대해 선거관리를 총괄하는 책임자로 도덕적 책임을 진다”며 사퇴했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의 심정...
1991년 6월 당시 노태우대통령이 업체대표등이 참석한 가운데 제조업 강화대책을 주재하며 TV방영 하려하자 이는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결국 TV방영을 막았다.
당시 선관위였던 관계자는 당랑거철(사마귀가 수레를 막는다는 말로, 상대가 되지 않는 사람이나 사물과 대적한다는 뜻)의 심정이였다고 한다.
원칙과 소신...
1993년 김영삼 정부시절 감사원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취임사에서 "감사원은 직무상 대통령으로도 독립한 지위에 있으므로 어느 누구의 부당한 간섭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고 율곡사업,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서면 조사등 성역없고 원칙주의적 감사를 시행했다.
법치를 퇴장시킨 통치...
1993년 같은 해, 26대 국무총리로 임명된다. 대통령 중심제에서 총리의 위상이 유명무실하던 시절 법적권한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강한 총리직을 수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통일 안보정책조정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이 총리 자신에게 먼저 보고되지 않는다는 등 총리 권한을 둘러싼 갈등으로 그가 총무처 장관을 통해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했고 곧바로 수리됐다. 그는 소신에 의해 사표를 냈다고 밝혔다. 반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대통령으로서 헌법에 따라 해임조치 하겠다고 호통을 쳐 사표를 받아냈다”고 주장했다.
정치인으로의 첫걸음...
1996년 드디어 그는 15대 총선을 앞두고 정치에 입문한다.1997년 한보비리와 김현철씨 구속 등 혼란한 시기에 신학국당 대표로 선임된다. 결국 당시 이인제 경기도지사를 앞지르고 정치입문 1년만에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임된다.
첫번째... 여당의 대통령 후보
김영삼을 탈당시키고 이회창은 당시 조순을 대선 후보로 추대한 민주당과 합당을 하면서 자신은 대권을 맡게 되고 조순은 당권을 맡게 하는 등의 협약을 통하여 한나라당이라고 하는 정당을 탄생시킨다. 그러나 두아들의 병역문제와 이인제의 경선불복으로 인해 김대중에게 39만표 차이로 패배했다. 당시 이인제의 표는 500만표였다.
한나라당의 개혁
1998년 55%의 득표로 한나라당 총재로 선출되었다.2000년 4월 총선에서 조순, 이기택, 김윤환등을 공천에서 탈락시키고 젊은피 수혈(오세훈)로 새천년민주당에 근소한 차이로 승리한다.
두번째... 제1야당의 대통령 후보
2002년 노사모의 노무현, 월트컵의 정몽준과 3파전이 시작된다.이때 병풍, 김대업 사건이 터졌다.
병풍... 그 추악한 거짓말에 놀아나다.
「김대업 사건」은 2002년 5월21일 「주간 오마이뉴스」의 보도로 시작됐다. 주간 오마이뉴스는 이날 「이회창씨 아들 병역비리 은폐대책회의 열었다 - 병무청 고위간부 K씨 올 1월 검찰 조사 때 폭탄진술 뒤 부인」이란 제목으로 『1997년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씨 측근들이 병무청 고위간부 K씨와 함께 이후보 아들 정현씨 병역비리를 은폐하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대책회의를 가졌다는 의혹이 있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같은 날 오마이뉴스는 김대업씨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이 인터뷰에서 오마이뉴스는 김대업씨를 「병무비리 전문 민간 수사관」, 「쪽집게 수사반원」이라고 표현하며, 서울지검 특수1부 盧明善 부부장의 요청으로 매일 오전 6시 서울구치소에서 서울지검 특수부에 「출근」해 1000여 명의 병무비리 혐의자들을 「쪽집게」처럼 잡아 낸 김대업씨가 『병역비리를 덮으려는 자들과 전쟁을 선포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2002년 대선이 끝난 후 검찰은 「병풍」수사를 마무리하면서 『김대업씨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는 결론을 내렸다. 김대업씨는 2003년 1월25일 무고 및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긴급체포 구속된 후, 공무원 사칭 혐의가 추가되었다.
김씨는 2003년 7월에 열린 1심 재판에서 징역 1년 2개월을 선고받았고, 4개월 후 열린 항소심에서는 1심보다 형량이 8개월 늘어난 징역 1년 10개월을 선고받았다.
두번째 패배…
결국 병풍과 노무현-정몽준의 단일화로 인해 50여만표차이로 패배하게 된다.
리더는 책임을 지는 자...
2004년 5월 대검 중수부는 대선자금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2002년 대선 때 한나라당(이회창 후보)과 당시 민주당(노무현 후보)이 삼성 등 주요 대기업 등에서 불법 모금한 자금은 각각 823억원과 113억원인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고 밝혔다.
그는 2003년 10월 차떼기 불법 대선자금 수수가 드러나자 “법적인 책임을 포함한 모든 책임을 지겠다”면서 대국민 사과를 발표하는 등 세 차례나 국민에게 사과했다. 이 가운데는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감옥에 가더라도 내가 가야 마땅하다",는 말도 있었다. 그는 지난 30년간 곪아왔던 모든 비리와 부정, 부패를 자신이 리더라는 이유하나만으로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국민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눈물을 흘리며 정계은퇴를 한다.
그는 왜 다시 나와야만 했는가?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한나라당의 비난과 질타...
대통령 병이라 비아냥 거리는 사람들...
법과 원칙이라는 단 하나의 소신을 지키고자 했던 삶에 반하는 출마...
무소속으로 돈도, 사람도, 명예도 얻지 못할 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나왔다.
그가 선택한 길은 지금껏 썪은 정치인의 장난으로 단 한번도 국민을 위해 살지 못했다는 속죄의 길이다. 그는 책임을 지는 사람. 그래서 그는 나왔다.
그는 이미 스스로를 버렸다. 대한민국이라는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래서 나라다운 나라에서 살고싶은 한 사람의 국민의 이름으로...
이회창... 우리는 그를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