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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E BRESIL FINAL WORLD CUP 1998

김영훈 |2008.01.02 13:04
조회 327 |추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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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2일 밤 9시, 생드니 스타드 드 프랑스. 전 챔피언과 개최국이 결승에서 만나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브라질과 프랑스가 벌이는 제16회 프랑스월드컵축구대회 결승전이 75,000명의 관중과 수십 억 명으로 추산되는 세계 시청자들의 시선을 모았다. 예상키로는 주로 브라질의 공격에 프랑스의 방어와 역습이 될 것이라는 거였다.

결승전을 앞두고 프랑스의 엠므 자케 감독은 "브라질이 세계 최고의 팀인지는 몰라도 우리들의 축제가 될 것이다. 그들은 세계 최강국들을 마음대로 다루어 온 팀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그들이 유리하게 출발할 것이다. 그러나 홈 그라운드인 우리가 낙관적이다."고 말했다.

양 팀이 경기장에 입장했다. 그런데 브라질의 출전선수 명단이 전 세계의 중계방송 캐스터들을 잠시 혼란시켰다. 경기시작 한 시간 전에 공개된 명단에는 없던 호나우두가 출전한 것이었다. 호나우두가 빠진 것에 각각의 해석을 붙여 설명했던 중계방송자들은 호나우두의 등장에 잠시 허둥대는 모습이었다. 브라질이 경기 1시간 전에 배포했던 명단을 30분전에 미스프린트라고 회수해 에드문도를 빼고 호나우두를 다시 넣은 사실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호나우두는 결승을 앞두고 이틀 동안 연습을 못할 정도로 무릎부상을 입었다고 알려졌지만, 의료진에 의해 경기를 해도 좋다는 진단이 나와 경기 45분전에 경기장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호나우두의 출전여부에 관한 논의를 하느라고 브라질은 워밍업도 못했다. 이것은 브라질에게 심상치 않은 조짐이었다.

프랑스의 킥오프로 경기가 시작됐다. 브라질은 4-2-2-2, 프랑스는 4-3-3과 4-4-2를 혼용했다. 이 대회 최소인 2실점의 막강함을 자랑하는 프랑스의 이 시스템은 측면공간을 잘 이용하는 브라질의 장기를 봉쇄하자는 수비 강화 수단이었다. 즉, 호베르토 카를로스와 카푸의 측면공격을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전원수비에 그치는 게 아니라 기회 있을 때 윙백들의 위력적인 공격, 걸출한 지단의 미드필드 장악과 적극적인 공격가담, 여기에 투 톱의 공세까지 합쳐, 예상과는 달리 빠르고 유연한 이동으로 25초만에 기바르쉬가 슛을 날리는 등 초반부터 프랑스가 주도권을 잡았다. 공격이라면 수비수까지도 나서기 좋아하는 브라질이 조금씩 깨어나는 듯했지만, 맥을 짚어 대비한 프랑스의 수비에는 먹히지 않았다. 공격지역에 공간을 발견하지 못한 브라질은 미드필드에서 반대편으로 넘기는 크로스패스를 자주 보냈으나 그것도 별로 효과가 없었다. 간혹 보게 되는 브라질의 공격은 오프사이드에 걸리기 일쑤였다. 프랑스의 빈틈없는 조직은 브라질의 천재들과 백전노장 자갈로 감독을 속수 무책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휘젓고 다니는 지단을 집단으로나 밀착마크로도 저지하지 못하는 것이 브라질의 약점이었다. 특히 프랑스의 프리킥과 코너킥 세트플레이에 혼란스러워지는 브라질이었다. 드디어 전 챔피언이 쓰러지기 시작하는 첫 골이 터졌다. 전반 27분, 지단이 프티의 오른쪽 코너킥을 가까운 포스트 부근에서 헤딩으로 첫 골을 터뜨린 것이다. 이후 두 세 차례씩의 빈약한 슛이 오간 다음, 46분에 조르카에프의 왼쪽 코너킥을 지단이 첫 골과 똑 같은 헤딩으로 성공시켰다. 지단의 1인 쇼였다. 전반은 2-0이었다.

하프타임. 프랑스의 자케 감독은 "우리의 목표는 아직도 반밖에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선수들을 독려했다. 자갈로 감독은 레오나르도 대신 데니우손을 출전시키는 방법 외에는 적절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후반시작 직후, 브라질의 호나우두는 프랑스 GK 바르테즈와 1대1로 맞서는 기회에서조차도 공을 골키퍼에 안기고 말았다. 후반 23분에는 프랑스의 데사이가 카푸의 발을 건 다음 순간, 주머니에 들어가는 벨콜라 주심의 손을 보고는 스스로 걸어 나가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그는 이미 두 번째의 경고임을 알아차리고 주심의 명령에 앞서 퇴장하는 것이었다. 데사이는 역대 월드컵결승에서 퇴장 당한 세 번째 선수가 됐다(90년 이탈리아대회 서독과의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의 페드로 몬존과 구스타보 데조티가 퇴장 당하고 1-0패했다). 그래서 역시 브라질의 우승이 가까웠는가 했었다. 그러나 브라질 선수들은 각개 전술을 폈고, 호나우두에게는 좀처럼 공이 공급되지 않았다. 오히려 후반 47분에는 뒤가리의 스루 패스로 프티가 한 골을 보태 3-0, 프랑스의 완승이었다. 프랑스의 우승은 침착성, 훌륭한 전술과 조직, 팀워크, 개인들의 임무수행능력 등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프랑스의 잘 조직되고 조련된 공격축구가 개별적이고 정적인 브라질축구에 본보기를 보여준 경기였다. 브라질의 가장 큰 패인은 개막경기에서부터 나타난 중앙수비의 부조화와 무릎부상으로 프랑스의 르뵈프에 묶인 호나우두의 활약부진, 그리고 프랑스의 지단을 견제하지 못한 것이었다. 카푸와 호베르토 카를로스의 측면공격도 프랑스 수비의 측면공간 선점과 기민한 오프사이드 작전에 걸려 김이 빠지곤 했다. 세트플레이도 정확하지 못했다. 부진한 베베토를 계속 뛰게 한 것도 자갈로 감독의 실수로 지적됐다.

세계 정상에 선 순간 두 팔을 번쩍 들었던 프랑스의 엠므 자케 감독은 "자랑스럽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열심히 뛰었고 지난 2년 간 강훈련을 해왔다. 그 모든 것을 우리는 경기장에서 입증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능력을 믿었다. 우리는 경기가 계속될수록 점점 좋아졌다. 우리는 이번 월드컵을 통해서 지단과 블랑의 퇴장 등 모든 것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들이 빠지고도 장애물들을 잘 뛰어 넘었다. 오늘도 데사이가 퇴장 당했다. 그러나 우리 팀은 특별한 열정을 가졌다"고 우승한 지휘자의 자랑스런 모습을 마음껏 뽐내면서 "우승컵은 엘리트들이 따냈지만, 작은 클럽들에서 일요일마다 경기에 애쓰는 많은 감독들을 포함한 위대한 프랑스축구에 대한 상이다"고 세심한 축구인 사랑을 잊지 않았다. 지네딘 지단은 "내 머리로 두 골을 넣은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내 머리는 별로 부드럽지 못했다. 그런데 두 번 다 공이 정확하게 왔고 정확히 처리했다. 후에 이 득점장면을 녹화테이프로 보는 사람들이 우리가 쉽게 이겼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는 어느 것도 소홀히 하지 않고 열심히 했다"고 노력 없는 결과는 없음을 강조했다. 자케의 뺨에 축하의 입맞춤을 한 브라질의 자갈로 감독은 "우승컵을 안고 축하연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나를 위한 자리가 아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을 다하지 못했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우승은 프랑스의 것이다. 호나우두의 부상은 팀의 사기를 떨어뜨릴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실은 경기 내내 호나우두의 교체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 훌륭한 팀에게 패했다. 전반에 1-0이 됐을 때 우리는 이미 패했다. 후반에 우리는 모두가 공격하러 나가 한 동안은 경기를 주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확실한 차이를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나는 이번에 다섯 번째의 우승을 원했지만 다른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됐다. 최선을 다 했으나 우리의 때가 아니었다. 프랑스가 더 훌륭한 팀이었다"는 말로 패장의 착잡한 심정을 엿보였다. 호나우두가 부상으로 뛸 수 없다는 판단을 했던 자갈로 감독은 결승전을 몇 시간 앞두고 "브라질은 1962년 월드컵결승에서 펠레 없이도 우승했다."고 선수들을 일깨웠다고 한다. 브라질의 주장 둥가는 "우리는 평상시의 리듬을 찾을 수가 없었다. 충분히 월드컵을 획득하리라 여겼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7경기에서 10골을 잃고도 우승을 바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고 패인을 분석했다. 기록으로는 골 안의 슛 6-5, 코너킥 6-3, 경기 점유시간 33분32초-23분37초, 공격지역 점유시간 17분21초-11분21초로 브라질이 앞섰고, 프랑스가 우세했던 것은 슈팅 14-12뿐이었다. 이번 대회 팀 최다득점 15골, 최소실점 2골과 함께 프랑스를 우승으로 이끈 주역은 단연 지네딘 지단(10)이었고 다음으로 GK 바르테스(16) 데사이(8) 데샹(7) 튀랑(12)을 꼽을 수 있다. 쓰러지는 전 챔피언을 끝까지 일으켜 세워보려고 발버둥친 브라질 선수는 카푸(2) 둥가(8) 히바우두(10)였다.

이 경기의 주심 모로코의 벨콜라 사이드(BELQOLA Said)는 월드컵 결승전을 관장한 최초의 아프리카 사람이다.

브라질은 54년 스위스월드컵 8강전에서 헝가리에 4-2로 패한 후 최대의 참패를 당했다. 한 마디로 브라질은 이 대회에서 가장 저조한 경기를 결승전에서 했다. 이 승부는 감독의 전략 전술, 그리고 선수들의 자세와 체력에서 갈라진 좋은 예였다. 종료휘슬이 울리자 양 팀 선수들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프랑스 선수들은 감격의 눈물이었고, 브라질 선수들은 다섯 번째 우승을 놓친 좌절의 눈물이었다. 우는 모습도 달랐다. 프랑스 선수들은 서로 달려가 껴안거나 펄쩍펄쩍 뛰면서 흘리는 눈물이었고, 브라질 선수들은 따로따로 주저앉거나 머리를 숙인 채 우두커니 서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이런 모습은 월드컵 결승전이 끝나면 으레 보게 되지만 그 때마다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로써 프랑스는 월드컵을 우승한 일곱 번째 나라들의 대열에 섰고, 월드컵과 유럽축구선수권대회를 우승한 이탈리아, 독일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또 프랑스는 연장전 없이 우승을 차지한 두 번째 나라가 됐다. 연장전에 가지 않고 우승한 첫 번째 나라는 74년 월드컵 개최국이었던 서독이었다. 그리고 개최국으로서 우승한 여섯 번째 나라다. 브라질은 여섯 번 결승에 진출해 네 번은 우승했고 두 번은 준우승에 그쳤다. 50년 개최국으로서 우루과이에 2-1패한 이후 결승에서 두 번째 패배를 프랑스에 당한 것이다.

프랑스에 월드컵을 처음으로 안겨준 주역 지네딘 지단(25세.오른쪽 사진)은 185cm, 78kg의 육중한 체격에서 나오는 폭발적인 힘과 흔들림 없는 돌파력, 정확한 패스, 넓은 시야, 뛰어난 헤딩, 볼 키핑 기술 등 완벽에 가까운 능력을 가진 선수로 각인됐다. 알제리 계 이민 2세인 지단은 경기 전체를 조절하는 능력과 위기대처능력이 뛰어난 당대 최고의 미드필더이지만, 사우디 전에서의 퇴장이 최우수선수로 선발되는 데 악영향을 준 유일한 단점이었다.

지단은 월드컵 결승에서 두 골을 넣은 일곱 번째 선수로 기록됐다. 결승전 2득점자들을 순서대로 보면 콜라우시, 피올라(이상 이탈리아. 38년 대 헝가리), 란(서독. 54년 대 헝가리), 바바, 펠레(이상 브라질. 58년 대 스웨덴), 켐페스(아르헨티나. 78년 대 네덜란드)였다. 97년 FIFA 최우수선수 3위였으며 세계 최고의 MF인 지단은 A매치 39경기 11골을 기록했고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의 유벤투스 클럽 소속이었다. 80년대 프랑스 '예술축구'의 주역이었던 플라티니 이후 최고의 스타 지단은 프랑스 축구가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는 데 절반 이상을 기여한 영웅이었다.

94년 1월에 팀을 맡은 엠므 자케(57세) 감독은 대표팀의 순수혈통을 지키라는 프랑스 민족주의자들의 압력을 무시하고 북아프리카와 서인도제도 출신의 2세들을 발탁해 개인기를 바탕으로 하는 팀 플레이를 구축했고, 폭과 깊이, 정신과 체력에서 새로운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월드컵축구의 역사를 다시 쓰게 했다. 자케 감독이 선수들의 다양한 특성을 용해시킨 위력은 94년부터 96년 12월까지 20승 10무의 30경기 연속무패로 나타났고, 이번 월드컵 우승과 15골 팀 최다득점, 2골의 최소실점으로 이어졌다. 2실점은 역대 월드컵우승팀의 최소실점이기도 하다. 자케의 용병술은 조 리그 3경기에 22명의 엔트리 중 20명을 뛰게 한 점으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전문가들이 지적한 프랑스의 장점은 탁월한 공격형 미드필더 지단과 수비형 미드필더 데샹을 앞뒤로 배치해 최상의 허리를 구축한 것이었고, 약점은 튼튼한 허리가 받쳐주는 기회를 살릴 스트라이커의 부재였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자케 감독은 지단을 공격에까지 가담하도록 끌어올렸고 지단은 이 요구에 모자람이 없는 활약을 훌륭히 해냈다. 자케 감독은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프랑스 1부 리그 리옹과 생 테티엔의 MF로 활약했고 대표선수로는 두 경기만 출전했다. 선수은퇴 후 리옹, 보르도, 몽펠리에 등에서 지도자 경력을 쌓았다. 위업을 달성한 엠므 자케 감독은 대회가 끝나자 감독 직을 사임해 자신의 영예를 길이 빛나게 하는 지혜도 보였다. 프랑스 언론들은 자케 감독을 '팡테옹에 들어갈 수 있는 인물'로 격찬했다. 팡테옹은 파리 중심부에 있는 프랑스 위인들의 묘지다.

프랑스 사람인 '쥴 리메'가 1930년 1회 대회를 출범시킨 뒤 68년, 16회 째의 축구대제전에서 프랑스 사람들이 처음으로 우승하면서 아름다운 막을 내렸다. 1938년 대회 개최국으로 6위에 머물렀고 82년 4위, 58년과 86년에 3위에 올랐던 프랑스축구가 드디어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프랑스의 우승이 더욱 감격스러운 것은, 90년과 94년 두 월드컵본선에 나가지 못하고 12년만의 본선에서 올린 ‘예술축구'의 성과라는 것이었다. 94년 미국월드컵 유럽 6조 예선 막바지에 이스라엘에 3-2패, 불가리아에 2-1패로 덜미를 잡혀 탈락했었다.

프랑스의 우승에 어린아이처럼 환호했던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프랑스의 주장 디디에르 데샹에게 월드컵을 수여하는 것으로 98프랑스월드컵축구대회의 감동은 절정을 이루었다.

최우수 선수로는 브라질의 호나우두가 뽑혔다. 우승국 선수가 차지하던 관례를 깨고 준우승국 선수가 선출됐다. 각 국의 월드컵 취재기자들이 투표로 선정해 아디다스가 시상하는 골든 볼 수상자는 결승전이 끝난 후 바로 발표하는 게 통례였으나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 투표한지 17일이 지나서야 호나우두를 비롯한 10위까지 열 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96년과 97년 연속 FIFA 최우수선수의 명성을 얻은 호나우두는 94년 미국월드컵(17세)에서 대기선수로 그쳤지만 이번 월드컵에서는 최우수선수, 최다득점자, 우승의 3관왕을 노렸었다. 호나우두가 펠레와 마라도나를 잇는 최고의 스타임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그는 대회를 마친 후 별도의 인터뷰에서 내가 선택한다면, 돈, 명예, 인기, 개인상...중에서 단연 월드컵이다. 지난 94년 미국월드컵에는 후보로 대기했는데, 내 생애에 그렇게 참기 어려운 적은 없었다. 그 뒤 4년을 기다려 왔다...우리는 목표를 위해 뭉쳤다. 그러나 모두가 대단한 개성들을 가졌다...스코틀랜드와의 개막경기에서 그렇게 많은 시선을 느껴본 적이 없다. 내가 공을 잡기만 하면 관중들은 조용해졌다. 기분이 좋았고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모로코와의 경기에서 나의 월드컵 1호 골을 넣었을 때, 나는 죄수가 석방된 것처럼 기뻐서 미칠 것 같았다...고 말했다. 사상 처음으로 96년과 97년 2년 연속 ‘FIFA 올해의 선수’에 선정됐던 호나우두는 94년 브라질 크루제이로에서 네덜란드 PSV 아인트호벤으로 이적해 데뷔시즌에 30골로 득점왕을 차지했다. 96년에는 스페인 FC 바르셀로나로 옮겨 역시 34골로 득점왕에 올랐고, 97년 유럽컵위너스컵 우승도 차지했다. 97∼98시즌에 이탈리아 인터밀란으로 옮긴 호나우두는 98년 UEFA컵 우승, 97년 유럽 최우수선수(아르헨티나의 디 스테파노에 이어 비 유럽선수로는 두 번째)가 됐다. 99년에는 이탈리아 세리에A 최우수선수와 최우수 용병 상을 받았다. 99코파아메리카대회에서는 5골로 득점선두에 오르면서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98프랑스월드컵 최다득점자 수케르(30세. 왼쪽 사진)는 이번 대회 7경기에서 6골을 득점했고 세 차례의 결승골을 낚았다. 78년 아르헨티나 대회부터 이번까지 6개 대회의 득점왕들이 넘지 못한 마의 6골의 벽을 수케르도 못 넘었다. '왼발의 마술사'수케르는 87년 유고연방 대표로(19세 이하)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주역이었고, 같은 해 프로 FC 오시예크에 입문한 뒤 91년에 스페인 세비야 클럽을 거쳐 96년부터 이탈리아의 레알 마드리드의 골게터로 활약하고 있다. 89년 유고연방 대표에 발탁된 그는 90년 이탈리아 월드컵대회에 출전했으나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수케르는 92년 크로아티아 대표로 뽑혀 96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 8강에 오르는 주역으로 활약했다. 97년 FIFA 최우수선수 7위에 오른 그는 98프랑스월드컵 유럽지역예선에서는 9경기에서 5골을 득점했다. 수케르는 이 대회를 마치면서 유고대표 2경기를 포함해 A매치 41경기에서 36골을 기록했다. 수케르는 대표팀의 경기들을 계약하고 정부 지원이나 후원자를 끌어오는 등 수완도 가진 선수로 알려졌다.

역대 월드컵 득점왕들 중 6명이 3위결정전에서 마지막 골들을 넣었다. 독일의 코넨(체코의 네예들리, 이탈리아의 스키아비오와 공동)은 1934년 오스트리아와의 3위결정전에서 그의 4호 골(3-2승)을 넣었다. 38년에 브라질의 레오니다스가 스웨덴에 2골(4-2승)을 넣어 8골, 58년에는 아직까지 깨지지 않는 1대회 13골의 대 기록을 갖고 있는 프랑스의 퐁텐느가 서독에 4골(6-3승)을 먹였고, 포르투갈의 유세비오는 1966년 3위결정전에서 소련에 1골(2-1승), 폴란드의 라토도 1974년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1골(1-0승), 1990년 이탈리아의 스킬라치는 잉글랜드와의 3위결정전에서 페널티킥으로 역전승(2-1승)을 거두는 등 모두 16차례의 월드컵에서 6명의 득점왕이 3위결정전에서 마지막 골을 넣는 우연을 낳았다.

월드컵축구대회는 언제나 뜨는 별들과 지는 별들이 엇갈린다. 이미 빛나고 있던 호나우두 외에도 18세의 약관 오웬(잉글랜드), 지단(프랑스), 클루이베르트(네덜란드), 오르테가(아르헨티나), 비에리(이탈리아), 에르난데스(멕시코), 비어호프(독일), 살라스(칠레), 나카타(일본), 그리고 나이가 좀 많지만 수케르(크로아티아), 칠라베르트(칠레 GK) 등이 초롱초롱한 빛을 낸 스타들이었다. 반면 지나간 월드컵 무대를 밝혀온 낯익은 별들의 마지막 섬광 또는 희미한 빛들이 세월의 흐름을 서러워했다. 독일의 마테우스(37세)는 25경기 2048분의 새로운 출전기록을 세우고 사라지는 큰 별이었다. 역시 독일의 클린스만도 아직은 빛이 남았지만 물러나는 월드컵 무대였다. 하지(루마니아), 스토이치코프(불가리아), 둥가(브라질), 베베토(브라질), 발데라마(콜롬비아), 수비사레타(스페인 GK), 로베르토 바죠(이탈리아), 라우드루프 형제(덴마크), 시포(벨기에), 베르캄프(네덜란드), 캄포스(멕시코 GK) 등의 이름들은 2002년 월드컵에서는 보지 못하게 될 지도 모른다.

이번 대회부터는 선수단 22명 외에 GK 한 명을 추가로 합류할 수 있게 했고, 개막경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엔트리를 교체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프랑스의 우승으로 아직도 월드컵의 양대 산맥인 유럽과 남미는 공평히 8번씩 우승을 나눠 가졌다.

1998년 6월 10일부터 7월 12일까지 33일간 34개 팀이 64경기를 치른 제16회 프랑스월드컵축구대회는 역대 가장 긴 기간에 가장 많은 팀이 출전했고, 훌륭하고 충분한 시설과 설비에, 가장 성공적이었으며 아름다운 대회로 평가됐다. 특히 각각의 특징을 살린 스타디움들의 예술적인 설계와 쾌적한 관중석(입석 입장권을 판매하지 않은 덕도 있었다), 잘 다듬어진 그라운드 등 경기장 시설들이 훌륭했고 대회 진행도 매끄러웠다. 33일간의 대회기간은 너무 길어, 조별리그의 공백을 좁히는 방법으로 단축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지배적이었다. 대회기간 중 불상사를 일으킨 유럽 몇 나라들의 난동자들(훌리건) 문제는 각 해당국과 FIFA, 개최국이 함께 대처해야 할 숙제로 남겨졌다.

아벨랑제가 74년 회장선거에 공약으로 내건 본선진출국 수 증가는 단계적으로 실행에 옮겨졌다. 16개 나라로 유지돼오던 본선출전국을 82년 스페인대회부터 24개로 늘렸고, 16년 만에 98프랑스월드컵에는 32개 나라로 증가시켰다. 일부에서는 본선출전국 수가 많아져 월드컵축구의 질이 떨어진다고 비판한다. 이에 대해 다른 쪽에서는 후발국들의 축구수준을 높이는 데는 월드컵대회처럼 좋은 방법이 없다. 월드컵축구에 참여하는 나라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것은 어느 때인가 대륙 간의 축구수준이 평준화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고 받아친다.

98프랑스월드컵에서는 새로운 전술이 나타나지 않았다. FIFA의 기술조사단(TSG : Technical Study Group)이 조사한 본선 32개국의 시스템을 보면, 대체적으로 80년대 이후 주류를 이룬 3-5-2와 4-4-2 두 가지 전술이 혼합된 것으로 나타났다. 대인 방어형인 3-5-2를 쓴 팀이 19개 나라였고, 94년 미국월드컵에서 많이 채택됐던 4-4-2 지역 방어형 포메이션은 13개국이었다. 그러나 종래의 특성을 고집한 3-5-2나 4-4-2가 아니라 이 틀들을 기본으로 지역방어와 대인방어를 절충한 팀들이 16개였다. 74년 서독대회에서 선풍을 일으킨 네덜란드의 토탈사커 이후 새로운 포메이션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감독들이 축구에만 전념할 수 없게 하는 상업주의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지도자들이 있다. 70년대 이전까지는 감독들이 선수의 훈련과 지도에만 매달리면 됐으나 근래에는 돈과 관련된 잡다한 일에 유혹을 받고 있다는 얘기다. 20세기 베스트 11에 뽑혔고, 아직도 유일하게 감독으로 후진 양성에 애쓰고 있는 브라질의 카를로스 알베르토는 옛날의 감독보다 지금의 감독들이 더 어렵다고 말한다. "온갖 상업적인 압력이 너무 많은 경기를 하도록 강요해 감독들은 선수들의 체력관리에만 매달려 전술을 연구할 충분한 시간이 없다. 이것이 1974년 월드컵에서 선보인 네덜란드의 토탈사커 이후 새로운 전술이 나오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다"고 지적했다.

힘과 개인기술은 과거 대회들에 비해 향상된 것으로 평가됐다. 중간에 탈락한 팀들은 대부분 후반 체력열세가 원인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선수들이 드리블로 상대선수 한 두 명을 제치거나 돌파하는 능력들을 가지고 있었다. 체력을 바탕으로 박진감 넘치는 공격들이 펼쳐졌고, 전 방위에 걸친 압박전술도 완화돼 체력을 비축하는 효율적인 경기를 운영하는 나라들이 대부분이었다. 30년 우루과이대회 월드컵 1호 골의 주인공 루시엥 로랑(90세)도 이번 월드컵 경기들에 대해 "기술과 체력은 좋아졌다. 그러나 승부에 너무 집착해 반칙을 지나치게 많이 하는 점이 안타깝다"고 지적하고 "없어진 윙의 역할을 윙백이 겸하고 있는데, 진정한 윙의 위력을 볼 수 없어 아쉽다"고 말했다.

괄목할 발전을 가져온 분야는 GK였다. 특출한 방어력을 과시한 칠라베르트(파라과이)와 바르테스(프랑스), 파글리우카(이탈리아)는 물론이고 아시아, 아프리카의 몇몇 수문장들의 능력도 높은 수준에 올라있었다.

아직도 아쉬운 점은 유럽과 남미를 제외한 아시아 아프리카 북중미 대륙의 나라들 중에서 나이지리아와 멕시코만 16강에 진출했다는 것이다. 특히 아시아 4국의 성적은 너무 부진했다. 2개국이었던 아시아 본선 진출권이 4개국으로 증가(플레이오프 포함)해 한국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이란이 본선에 나갔지만, 이란이 미국에 1승을 거둔 것이 유일한 전과였다. 대회 도중 감독을 해임한 것도 아시아의 두 나라 사우디와 한국, 그리고 아프리카의 튀니지였다.

처음으로 도입된 골든골 제도에 대해 축구계 보수주의자들은 양 팀에 모두 공정한 규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골든골 제도는 보다 공격적인 축구를 지향하도록 해 경기를 흥미롭게 한다는 의도는 좋지만 실제로 양 팀의 긴장도만 높여 역효과를 낸다고 주장했다.

98프랑스월드컵 64경기의 실제 경기시간은 평균 60분32초였다. 전후반 90분 가운데 근 30분이 허비됐다는 얘기다. 실제 경기시간이 가장 많은 경기는 브라질과 칠레의 16강전 66분13초이었고, 가장 짧은 경기는 B조 칠레와 카메룬의 54분23초였다. 이 시간은 경기의 충실 도를 나타내는 척도이기도하다.

이번 대회는 67명의 심판진(주심 34, 부심 33)이 64경기를 관장했다. 지난 94년 미국대회는 46명의 주·부심이 52경기를 맡았으나 이번 대회부터는 12경기가 증가해 67명으로 늘렸다. 심판의 연령도 지난 대회는 43세로 제한했던 것을 이번에는 41세로 더 낮췄다.

FIFA는 94년 미국월드컵대회부터 뒤에서 위험한 태클을 하는 선수는 원칙적으로 퇴장시키도록 심판들에게 지침을 내렸다. 그래서 15명이나 퇴장 당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역대 가장 많은 22명의 퇴장을 양산한 백태클퇴장 제도의 도입은 선수보호와 깨끗한 축구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반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만 모든 정규 경기들에서는 적용하지 않으면서 월드컵에서만 엄격해짐으로써 심판들의 퇴장판정이 일관되지 못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당하는 쪽만 엄청난 피해를 본다는 지적은 일면 타당했다. 축구의 장래를 걱정하고 페어플레이를 강조하는 전문가들은 백태클 만이 아니라 옷을 잡는 행위 등 반칙들을 철저히 적발해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고 FIFA도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했다.

각 국 선수들의 선전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정당한 경기다. 그래서 FIFA는 94년 미국대회부터 본선에 출전하는 모든 선수들에게 페어플레이 서약서에 서명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1988년부터 벌이고 있는 Fair Play 캠페인은 선수들에게만 요구되는 일이 아니라 감독이나 코치 등 모든 팀 관계자들과 심판 등 경기 관계자들은 물론, 관중들에도 요구되는 것이다. 특히 월드컵대회에 나오는 선수들이라면 적어도 자기 나라에서 최고임은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자랑스런 선수들이다. 그들은 어린이나 청소년 선수들에게 모범이 될 책임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번 대회 도핑테스트는 매 경기에 출전한 선수 중 무작위 추출로 각 팀 2명씩이 받았다. 704명의 선수 중 256명이 검사를 받은 결과 다행히 모두 음성반응이 나타났다.

98프랑스월드컵의 TV중계권료는 1억3500만 스위스프랑이었다. 2002년에는 13억, 2006년 월드컵에는 15억 프랑이 될 것으로 예측된다. 프랑스월드컵 TV 시청자가 총 334억(94년 321억) 명에 달했고, 결승전 시청자는 17억 명이라는 얘기는 이제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월드컵축구는 세계 제일의 스포츠 행사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새로이 관심을 끄는 매체로 인터넷이 자리를 넓혀가고 있다. 경기소식은 물론 각종 기록, 주요장면을 담은 사진들, 주변 소식, 에피소드, 행사안내, 뒷얘기, 관련 상품이나 기념품 등을 안방이나 사무실에서 손쉽고 빠르게 접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인터넷이야말로 새로운 매체의 총아가 아닐 수 없다. 97년 5월 6일부터 서비스를 시작한 '98프랑스월드컵 공식 웹사이트인 ‘www.france98.com’에 대회 막바지인 7월 10일-12일 사이에 무려 10억 명 이상이 접속했고, 개막일인 6월 10일부터 22일까지 4억5천만 명이 방문했다. 월드컵 결승전이 끝날 때까지는 세계 170개국에서 15억 명 이상이 프랑스월드컵 웹사이트를 방문해 인터넷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고 한다. 인터넷은 TV와 공존관계를 유지하면서 급속히 대등한 위치로 올라설 것이다.

1998년 12월 8일 현재 FIFA 회원국은 204개에 달했다. 탈퇴했던 팔레스타인이 다시 복귀했고, 카리브해의 투르쿠스와 카이코스군도에 이어 미국령 버진군도, 사모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몽골이 가입함으로써 FIFA는 세계 최대 회원국을 산하에 둔 기구임을 다시 확인시켰다.

FIFA 기술조사단이 뽑은 1998 프랑스월드컵 올스타팀 22명에 아시아선수는 한 명도 선발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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