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SV>
1. In the beginning was the Worl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2. He was in the beginning with God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all things were made through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g made that was made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어진 것이 아무것도 그가 없이는 지어진
것이 없느니라.
우리나라 공동번역판은 이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그런데 이런 번역은 좀 곤란하다.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라는 구절은 원문에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공동번역자는 이 구절, 즉 "엔 아르케"라는 말을 "시간 이전에"라는
뜻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해석을 본문에다가 삽입시키는 것은 매우
불성실한 것이고, 위험하고, 또 많은 오해의 소지를 야기시키며, 가장 결정적인 오류는
많은 해석의 가능성을 묵살해버리고 하나의 해석을 독점해버린다는 것이다.
이 공동번역의 실수가 다음과 같은 무자비안 막된 번역들을 잉태시킨다.
성서원에서 나온 현대어성경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천지가 창조되기 전, 아무것도 존재하기 전에 말씀이 계셨다.
내가 생각 하기에 이 번역은 정말 엉터리 번역이다. 성서는 이렇게 엉터리로 조작한다는
것은 참 부끄러운 일이다. 성서 희랍어원문에는 "천지가 창조되기 전"이라는 말도 없고,
"아무것도 존재하기 전에"라는 말도 없다. 다음에 나오는 말을 보자!
"말씀이 계셨다." 그렇다면 말씀은 존재가 아니란 말인가?
"계셨다." 는 말은 곧 "존재"라는 의미이다. 말씀은 분명히 존재이다.
그렇다면 "존재가 있기 전에 존재가 있었다" 라는 말이 도대체 성립할 수 있는가?
성서를 번역한다고 덤벼들기 전에 우리말부터 공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판은 다음과 같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매우 성실하고 좋은 번역이다. "엔 아르케 엔 호 로고스"라는 이 간결한 성경 말씀에
가장 가깝게 오는 것은 개역한글판(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과 주교회의판 두 판본뿐이다.
구관이 역시 명관이라, 그래서 내가 개역한글판(1952년 성립)을 옛 판이라 해서 우습게
보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공동번역판의 번역자들이나 그 후의 번역자들이 "태초에"를 "시간 이전에"로
해석한 것은 불트만[주석] 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The arche is not therefore the frist member of a temporal succession, but lies before all time,
and therefore before all worlds. Thus the Logos not belong to the world - not even in the
sense of being the key for explaining how the world and time began.
(roudolf Bultmann, The Gospel of John 31:dlwpqnxj qnfxnaks wntjrdms BG로 약칭)
"태초"는 시간계역의 첫 고리가 아니다. 태초는 모든 시간에 선행하며 따라서 모든
세계에 대하여 선재한다. 따라서 로고스는 이를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이 세계와
시간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열쇠가 되는 그러한 의미도 내포하고
있질 않다.
이러한 볼트만의 주석은 매우 그럴듯하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존경스러운 석학이라
할지라도 그의 주석을 우리가 그대로 따라야 할 지에 관한 논의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불트만의 전체적 해석의 틀은 영지주의라는 것이다.)
1절과 2절을 통하여 가장 고민스러운 것은 아주 단순한 신택스(syntax)상의 모순에
관한 것이다.
1.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2.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
제1 명제와 제2 명제가 완전히 다른 문맥에서 독자적으로 등장한다면 그런대로 해석이
가능하디만 이 두명제가 하나의 문장 속에서 융합되어 있는 것이다.
1. 갑돌이와 을돌이는 같이 있었다.
2. 갑돌이는 을돌이이다.
제1 명제에서는 분명히 갑돌이와 을돌이는 다른 두 개의 개체이다. 그러나 제2 명제에서는
갑돌이와 을돌이는 같은 동일한 개체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
"갑돌이와 을돌이는 같이 있었는데 갑돌이와 을돌이는 한 사람(존재)이었다."
"A와 B는 같이 있었는데 A는 B였다." 알 듯 말 듯, 도무지 아리송하다. 나는 성서를
읽을 때, 이런 말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워드로 도저히 더는 못치겠습니다. 휴~ 우선 이정도 써 놓고
개신교 장사 못하게 할 자료 있습니다.
개신교분들 자신들이 현재 보유한 번역된 성경이 잘못된 것을 인정하지
못하시고, 출처를 밝히라고 하시면 밝혀드리리다.
개신교들의 무지를 일깨우쳐 드리리다.
신성한 성경을 가지고 너희가 사기를 친 것을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시리라.. ㅋㅋ
김현수님 답변
1. A는 A가 된다. (A is A)
2. A는 B가 된다. (A becomes B)
1의 경우에는 A는 항상 A이기 때문에 "존재"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그 모습으로 있어서 그 동일성 즉 아이덴티티(identity)즐 주장하기 쉽다.
그러면 진리는 쉽게 확보된다. 그런데 A가 B로 되는 제2 명제의 경우 A는 항상 A가
아닌 것으로 변해버린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도 A의 동일성을 확보하기가 여렵다.
일례를 들면, "갑돌이는 좋은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순간에,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가 없듯이, 이미 갑돌이는 갑돌이가 아닌 그 무엇으로 되어버리리 때문에,
"갑돌이는 좋은 사람이다." 라는 말은 픽션이 되어버리고 만다. 갑돌이는 이미 나쁜
사람으로 되어 있을 수도 있고, 갑돌이가 아닌 그 무엇이 되어 버렸을 수도 있다.
따라서 진리는 오직 동일성이 확보되는 존재(Being)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희랍어의 로고스(Logos) 즉 말씀은 희랍사람들이 예로부터 아주 흔하게 쓰는 그냥
"말하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일 뿐이다. 그 말할 수 있는 능력을 희랍인들은 이성
이라 불렀다. 그 이성이라는 말도 로고스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희랍인들은 인간의 말과 그 말 할 수 있는 능력을 철학의 가장 큰 주제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