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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백과 : 제갈량 그는 꼭 북벌을 추진해야만 했는가

양보람 |2008.01.28 11:02
조회 60 |추천 1
오픈백과 : 제갈량 그는 꼭 북벌을 추진해야만 했는가 평점 : +16 (34명) 나도 평가하기 조회: 5687 집필자 : kyh5036 (2004-08-02 21:33) 신고하기 | 이의제기 (1)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 없는 대화이다. - E.H. Carr - 1. 형주는 지켜져야만 했다. 유비와 제갈량 그들이 처음부터 자기 대에서 삼국통일을 이루려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다. 실제로 유비는 양자강 중류에 거점을 잡고 천하 대세를 쥐려고 하였을 뿐 삼국 통일은 무리였다고 생각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제갈량 역시 마찬가지로 너무 늦게 만들어진 촉이란 신생국이 침략 전쟁만을 하는 것은 앞으로 나라가 성장해 가는데 문제가 많았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형주를 맡고 있던 관우가 형주를 잃고 손권에 의하여 목숨을 잃는다. 솔직히 유비가 슬펐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당시 삼국시대는 대의명분이 클수록 군사들의 사기 충천과 승리에 크게 관여하는 중요한 요소이기에 관우의 죽음을 명분삼아 그가 군대를 일으켰을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관우가 포위당했을 때 유비가 삼국지 연의처럼 사전에 몰랐다고는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양자강 중류인 형주 지방을 중심으로 삼국의 통일을 생각하고 있었던 유비는 양자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에 보충된 설명을 보려면 지도를 보아야 하는데 양자강 중류에 형주가 위치해 있다. 이 양자강에서 대규모 군대를 일으킨다면 북쪽으로는 위의 장안, 낙양, 허창 등의 위나라 거점 대도시가 위협받게 된다. 문제는 이 도시들은 위나라 군사력과 경제력, 인구수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들이란 것이다. 만약 유비가 형주에서 북쪽인 장판파 -> 신야 -> 남양-> 낙양의 공격 루트만 정하고 군대를 일으킨다면 위나라로써는 막을 수도 있을지 모르나 이 상황에 오나라가 가만히 있을리 없다. 순간 유비를 막기위해서 자연적으로 군사력이 약해질 합비를 공격할 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위나라가 합비를 잃은다면 오나라는 강남에서 강북으로 진출함으로써 더욱 더 세력이 확장된다. 합비가 강북과 강남을 나누는 중요한 지정학상의 의미를 가진 곳이었다는 것을 조조가 장요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손권이 대군을 일으켜 공격을 하자 바로 중앙군을 이끌고 합비로 내려왔다는 것이 증명해 주고 있다. 동쪽으로는 오나라 수군의 핵심인 파양호가 공격이 가능하다. 이는 육군력이 약한 오나라가 해군 지원을 받는데 큰 손실을 가져오고 양자강의 중심에 있는 형주에서 시작하여 강하 그다음에는 무창 그 다음에는 파양호 그다음에는 호구 그다음에는 여강 그리고 최후의 보루인 오나라 수도인 건업까지 공격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만약 오나라 해군이 파양호에서의 접전에서 패전한다면 오나라로써는 강을 타고 공격해 오는 촉나라 대군을 막을 방법은 거의 없다. 만약 여강까지 진출한다면 오나라의 경우는 건업에서 수도를 옮겨야 할 것이고 이는 촉나라가 건업을 점령함으로써 강북진출이라는 이익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형주에 머물렀던 동안 관우는 해군력을 증강시키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관우는 육군전을 주로 했으므로 해전에는 아무래도 어리숙했을 것으로 보인다. 유비가 해군력을 증강시킬 장수를 관우에게 보냈다면 여몽에게 의해서 그리 쉽게 형주성을 수복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오히려 판도가 바뀌어 형주의 해군이 건업으로의 기습작전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촉나라는 인구수가 600만에 이르렀다. 그러나 만약 촉나라가 형주를 손에 쥐고 있었다면 더욱더 인구수가 많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촉나라가 작다고 생각하시는데 사실 촉나라의 영토는 위나라와 오나라에 비해 작기는 했으나 거의 비슷한 크기였다. 남쪽으로는 곤명호 와 부랑강(홍하) 를 넘어섰고 동쪽으로는 아롱강까지 그 영토를 넓혔다. 거기에 형주를 계속 지켰다면 그 크기는 삼국에서 제일 넓은 크기였다. 어쨌든 형주를 국토로 존재하는 한 북벌을 하더라도 훨씬 더 유리한 조건에서 공격을 할 수 있었다.그리고 형주는 땅이 기름지고 해군을 기르기에 용의했으며 천연 요새들이 많아 방어에도 용이 했다. 이러한 형주를 빼앗긴 것은 이미 촉나라의 북벌 공격 루트의 숫자가 줄어들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 하나가 있는데 제갈공명이 북벌을일으켜 공격했던 루트에는 무관, 동관, 함곡관이 자리를 잡았지만 형주에서 위로 올라가는데는 그러한 관문이 없었다. 오히려 호로관은 낙양의 북동쪽에 위치하였으므로 낙양, 허창으로 북벌을 진행했더라면 더욱더 큰 타격을 입힐 수도 있었다. 수도인 장안을 점령하는 것보다는 인구와 재력, 군사력의 중심 요충지인 낙양과 허창을 점령하는 것이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는데 더 용이하기 때문이다. 2. 제갈량은 관우를 죽이러 형주로 보낸 것이 아니다. 요즘에는 제갈량이 라이벌인 관우를 죽이러 형주로 보냈다는 추측도 큰 지지를 얻고 있다. 필자 역시 그 점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았으나 제갈량이 단지 정치적 적수를 죽이려 형주로 보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형주의 중요성은 촉나라의 삼국통일에 큰 역할을 한다. 아마 정치적 적수인 관우를 다만 중앙 정부에서 떨어진 지방으로 보냄으로써 제갈량은 조정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더욱 확장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관우가 전술에 관한 저서들도 많이 읽고 그동안의 실전 경험도 쌓았기에 성급하고 젊은 무장에 비해 관우가 형주를 다스리기에는 적합했을 것이다. 그리고 위나라의 조조와의 친분관계도 있고 유비와 손권의 여동생 손상향(유비의 아내) 이 유비와 살고 있으므로 형주를 공격할 때의 명분이 있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조조와 손권이 관우를 좋아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형주를 점령하려고 눈에 혈안이었고 이러한 와중에 조조는 방덕으로 하여금 손권은 여몽으로 하여금 물밑 작전을 시작한다. 그리고 관우가 위기에 처했을 때 조조는 완전히 뿌리를 뽑기 위하여 서황을 보냈고 오나라 역시 반장 등 오나라의 내노라한 무장을 내보냈다. 이러한 대규모 군대의 출현을 유비가 몰랐을 리 없다. 소식통에 의해 미리 짐작했겠지만 아마 가망성이 없는 전투이기에 그리고 형주를 공격함에 대한 역공격을 하기 위해 유비와 제갈량은 그것을 암묵적으로 바라보고만 있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는 유비가 군대를 일으킨 후 계속 승승장구하여 형주를 대부분을 회복하고 오나라의 영토에 진출하려고 했던 것이 증명해 주는 것이다. 사실, 만약 방통이 낙봉파에서 죽지만 아니했어도 봉추가 형주로 가게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곳의 지리를 잘 아는 그는 성공적으로 방어 했을 것이다. 형주에는 형주의 지리를 잘 알고 전술과 외교 능력이 뛰어난 자가 선출되어서 다스려야 했는데 여기에 봉추가 적합하기 때문이다. 3. 형주 탈환 작전의 실패, 유비의 죽음과 북벌의 관련성. 형주를 잃음으로써 그리고 탈환 작전의 실패함으로써 유비는 촉이 주도하는 삼국통일에 대해서 의문점을 품게 되었고 대군을 잃은 충격으로 얼마뒤에 세상을 떠난다. 여기서 중요히 여길 것은 그가 백제성에 머물렀으며 무용과 지략이 뛰아난 이엄 역시 백제성을 관장하는 벼슬을 했다는 것이다. 이는 백제가 오나라를 방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역으로 형주 탈환 작전이 실패하자 또다시 형주를 탈환할 기회를 노리는 것이라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유비가 살아있을 경우만 적용된다. 이에 뒷받침해 주는 것이 유비가 죽은 후 오나라에서 사신 장온에게 촉나라 승상 제갈량 마저 비유를 맞추고 있었다는데에서 알 수 있다. 그렇다. 유비가 죽은 이후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사람이 없었기에 그리고 촉나라가 대군을 몰살당한 후 더욱 더 국력이 약해졌기에 촉나라로써는 오나라와 연합을 해야했고 형주 탈환작전에 대한 꿈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 이러한 와중에 생각해 낸 공명의 전략은 남서쪽의 남만 정벌과 그 유명한 북벌 정책이다. 4. 제갈량 그는 꼭 북벌을 추진해야만 했는가? 북벌은 총 7번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북벌을 할때마다 실패를 하였다. 그렇지만 제갈량의 군대도 피해는 경미했다. 이는 제갈량이 안전주의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안전주의자적인 그의 성격은 군대의 피해를 줄이는데 크게 기여하고 실패할 확률을 적었겠지만 위나라 조조, 오나라 손책처럼 모험적인 작전으로 적의 허를 꿰뚫어서 대승하여 적을 궤멸시킬 확률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북벌의 실패를 의미하기도 했다. 정말 북벌을 성공시키려면 제갈량은 자기의 목숨을 내놓고 안전을 추구하기보다는 필사적인 공격으로 임했어야 했다. 그러지는 않고는 황제를 옹립하고 2대가 넘어 황실이 된 조비의 철옹성을 뚫은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굳이 사마의가 아니었더라도 수비력만을 배로 증강시키면 안전주의자 제갈량에게는 북벌을 성공시킬 수가 없을 것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기에 현대에 들어서 인정을 받고 있는 위연의 자오곡 계책의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5. 맹달에게 적극적이지 않은 태도 그것은 제갈량 인생 최대의 실수 였다. 제갈량이 기산을 점령했을 때, 맹달이 항복하고 공명에게 의기 투합하여 위나라 내부에서 위나라를 공격하겠다는 밀서를 백제성 진수 사령관 이엄의 아들 이풍이 받고 공명에게 전한다. 이때 공명은 기뻐하였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는 한중이 전에 점령당하고 기산마저 점령한 상태에서 장안 점령은 거의 확실시 되어 보였다. 그래도 안전주의자 였던 제갈량은 평서도독으로 임명되고 군사를 장안에서 모으고 있는 사마의를 염려하여 계책들을 맹달에게 보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맹달은 듣지 않았고 그의 반란작전은 실패로 돌아간다. 제갈량은 맹달이 죽기 전에 사마의가 공격하기 전에 신성태수 맹달을 부추기고 심하게 협박까지 해서라도 신성을 방위하는 것보다는 공격을 함으로써 내부에 혼란을 가중시켜야 했다. 만약 그리했다면 사마의는 제갈량에 맞서든지 맹달을 섬멸하는 것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장안을 공격할 제갈량을 막는 것이 급했기에 나라의 존속을 위해서 제갈량을 막을 수밖에 없다. 제갈량을 막기 위해서 군대를 모았으니 맹달을 막을 병력은 소수에 불과했을 것이고 토벌군을 보낸다고해도 대규모로 보낼 수 없다. 이는 치밀한 준비를 한 맹달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와중에 맹달은 금성, 신성, 남양을 점령하고 낙양까지 올라가게 된다. 이는 위나라를 반으로 쪼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낙양과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허창 역시 위험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나라의 군사력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허창은 맹달을 막기 위해서 사마의에게 지원을 할 수 없게 되고 승승장구하고 있는 제갈량의 군대는 사마의 군을 능히 격파하고 장안을 점령할 수 있다고 추측이 가능하다. 맹달의 항복 밀서를 받았을때 제갈량은 자신이 사마의가 있는 장안을 직접 대규모로 공격을 하는 수라도 써서 맹달을 살려야 했다. 6. 외유내강, 과유불급(過猶不及) 이란 단어를 제갈량은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 북벌의 여러차례의 실패는 신생국인 촉나라에 엄청난 경제적인 손실, 인명손실로 이어졌다. 사실 북벌을 계획하는 것보다는 신생국 촉나라의 기반을 탄탄히 하는데 그의 전력을 퍼붓어야 했다. 오나라 역시 기반이 탄탄했기에 3대 손책에 와서 눈부신 효과가 존재할 수 있었다. 제갈량은 무엇보다도 험한 산지로 이루어진 촉나라를 개간하고 출산을 장려하는 등 인구 증가에 관심을 가졌어야 했다. 그당시에는 전술도 중요했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병력이었다. 아무리 전술이 훌륭해도 병력에서 차이가 극심하면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당시 위나라 2500만명, 오나라 1200만명, 촉나라 600만명이라는 인구수는 (요즘 들어 위나라 촉나라 오나라를 합쳐서 천만도 안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무슨 근거를 들어 그런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2000년 전에도 중국은 인구수가 많았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인구수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 한족만의 인구 뿐만 아니라 여러 민족의 수가 합쳐져 있었고 그당시의 중국 대륙 역시 매우 넓었기 때문이다. 백만의 군대를 출병시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 하겠으나 몇십만명을 출병시키는 일은 당시 중국은 가능했고 이러한 그들의 힘에도 굴하지 않고 막아내고 이겼기에 우리 고구려의 역사가 빛나는 것이다.) 촉나라가 북벌을 외친 것은 과유불급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북벌을 하려면 주변의 조공을 받치는 나라들(촉나라에 70여개가 넘는 조공을 받치는 나라가 있었다.) 의 군대의 대규모 지원을 받아야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멀리 북쪽에 있는 흉노의 도움도 청할 필요가 있었다. 한족과 흉노족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당연한 사실이나 나라의 존망과 번영을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지원을 받는 것은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엄청난 재력과 과거의 수도들이 밀집되고 인구가 가장 많은 위나라, 땅이 기름지고 곡식이 풍부하며 넓은 양자강을 차지하고 있는 오나라에 비하여 촉나라가 가지고 있는 이점은 지형이 험하다는 것 뿐이었다. 이는 이점이 될 수도 있고 불리한 점이 될 수도 있는 양면성을 가진 것이다. 과유불급 이는 바둑에서도 많이 쓰이는 고사성어이다. 지나치면 안한 것만 못하다는 과유불급을 제갈량 그는 왜 무시했는가? 왜 외유내강이란 말 한마디를 깨닫지 못하고 북벌에 촉나라의 국력을 소모시켰는가? 이는 제갈량의 잘못만은 아니다. 이미 제갈량은 촉나라가 삼국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무모하게 북벌을 계획했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인구와 능력있는 관료들, 수많은 재화를 가진 위나라와 3대를 거쳐 나라로써 확고하게 기반을 잡은 오나라를 잡을 수 있는 기회는 자기가 살아있을 때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제갈량의 자만만은 아니었다. 확실했다. 촉나라는 인재의 부족과 부패로 인해 제갈량 사후 몇십년을 버티지 못하고 멸망했기 때문이다. 7. 자오곡 계책은 삼국의 판도를 바꾸어 놓을 수 있었다. 한중에 오랬동안 머물르면서 그쪽 지리가 밝은 위연은 제갈량에게 자오곡 계책을 내놓는다. 그러나 제갈량은 군대의 안전을 생각해 모험적인 이 작전을 실행하지 않는다. 지금이야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제갈량은 자오곡으로 가는 길이 험준하고 길이 좁아 복병을 만나면 전멸을 면치 못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마의 역시 자오곡 계책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잠깐 이러한 점을 생각해보자. 당시엔 지도와 지형에 대한 연구와 탐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두명이 동일인물도 아닌데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현재의 우리를 보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지도가 흔하지만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조금만 떨어진 도시를 가면 길을 전혀 모른다. 당시의 중국은 어떠했을거라 보는가? 시대도 2000년 전이고 미개발된 드넓은 토지가 많은 중국의 땅을 어떻게 자세하고 객관적인 자료로 돌출하여 지도를 만들었을까? 독자분들이 고등학교 국사 공부를 하셨으면 아실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천년전에 제작된 지도도 거의 만든이의 상상으로 된 부분이 많았고 정확하지 않았다. 대동여지도의 의의가 큰 것도 여기에 있다. 어쨌든 삼국지를 토대로 생각해 보면 제갈량의 성격을 아는 사마의는 안전주의자 제갈량이 그러한 작전을 펼칠 거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사마의와 장합과의 대화에서도 나타난다. 사마의가 장합에게 '내가 만약 공명의 처지에 있다면, 위를 공격하는 데에 이 지방은 산이 험하고 길이 여러 갈래 있으니, 자오곡(子午谷) 에서 장안을 진격하려 할 것이오. 그러나 공명은 아마 그런 방법은 택하지 않을 것이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조심성이 많아 절대로 패하지 않을 땅을 차지하고 싸우기 때문이오.' 라고 말한 것이 신빙성을 보태준다. 만약 위연의 자오곡 계책을 받아들이고 제갈량의 전군이 장안을 공격했을 경우 사마의는 장안 방어에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장안성이 서한(西漢) 의 수도로써 성이 튼튼하여 점령하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들도 더러 있으나 그러나 방덕이 마초에게 장안은 흙이 단단하고 물도 음료수로는 적당치 않고 땔나무도 없다고 한 말과 마초가 포위할때 장안의 사람들은 짠물만 마시고 땔나무가 부족해 곤란을 겪었다는 것은 적을 방어하는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기에 제갈량이 장안으로 쳐들어왔을 경우 사마의는 가정을 공격하다가 장안으로 황급히 돌아오는데 이미 장안은 제갈량에게 점령당한 뒤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마의 군은 가정을 공격함으로써 촉나라군을 끊으려다가 오히려 자기가 포위당해 궤멸당할 수 밖에 운명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갈량이 성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한나라의 수도를 한바탕 쓸어버린다면 그 타격은 아무리 큰 나라라도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백제의 경우에도 수도인 한성을 잃은 뒤부터는 중국 대륙을 누비던 힘을 잃고 말았다. 하물며 위나라는 어떠한가? 8. 마속과 위연은 왜 죽어야만 했는가? 가정전투에서 패전한 마속은 얼마뒤 참수를 당한다. 자신이 아들처럼 키운 마속을 참수하는 것은 제갈량 역시 매우 가슴 아픈 일이었다는 것을 읍참마속이라는 유명한 단어를 통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제갈량이 마음 한구석이 허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속을 참수한 것은 북벌에 대한 패전의 책임을 문책당하지 않기 위한 조치로 볼 수도 있다. 제갈량이 출사표를 던지고 북벌을 던지는 동안 중앙정부에 없었기에 그에 대한 강경파가 많이 생김은 자연적이다. 그리고 위연 역시 제갈량에게 걸핏하면 불평하고 대립하는 구도였고 이에 덩달아 패전을 책임을 진다면 제갈량은 정권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이러한 인사조치가 오기 전에 마속을 참수하고 후퇴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직접 승상에서 직위를 낮추고 우장군(右將軍) 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 마속은 실수를 한 것이지 참수형을 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보면 자신이 강유에게 패전하여 잃은 군사와 학소의 몇천 안되는 병력에 질질 끌려다니고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은 어떻게 배상할 것인가? 사실 가정에서 촉군의 길목이 끊긴다고 해도 당시 고생하고 있던 것은 사마의 역시 마찬가지 였다. 그는 왜 패기가 부족했는가? 단지 촉의 보급로가 끊겼다고 황급히 철수한다면 위나라만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거기서 죽었다고 해도 만약 계속 진격을 해서 장안을 공격했더라면 가정은 다시 방비가 허술해져서 촉나라에서 구원군만 와도 재탈환 할 수 있던 곳이다. 그리고 사마의 군은 가정에 거의 몰려 있어서 장안으로 만약 계속 제갈량 군이 진격해 간다면 제갈량 군을 추격할 수 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조조는 제갈량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제갈량이 조조를 이길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제갈량은 조조와 같은 패기가 없었다. 이는 군주와 책략가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멸망했던 원소, 동탁, 여포와 젊은 나이에 전사한 손견, 손책 그리고 패기가 없었지만 군주로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패기가 생긴 유비,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전투마다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방법만은 추구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무모한 작전을 실행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어 영웅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추측들을 보면 제갈량이 급히 후퇴한 이후는 다음 북벌을 추진하기 위해서 그리고 병권을 놓치지 않기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고 많은 사례들을 보아서 필자가 말한 제갈량은 안전주의자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사마의군을 2500명의 군사들로 하여금 눈속임을 하여 후퇴하게 하였다는 것은 익히 알려지 유명한 일화이다. 그런데 안전주의자인 그가 혹시나 사마의가 15만 대군에 죽을 수도 있는 불안한 확률을 가진 계책을 썼을까? 그리고 15만 대군이 몰려온다면 몇일 전부터 이는 사전에 발각되기 마련인데 사마의가 오기 전에 왜 관흥과 장포는 무공산(武功山))으로 보냈고 장익은 검각(劍閣) 을 수리해서 돌아갈 길을 마련하도록 보냈을까? 마충으로 하여금 조진의 군대을 공격하라고 말한 것까지도 말이다. 만약 사마의 대군이 몰려오는 것을 몰랐다면 전술을 기초도 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그가 그렇게 자랑하던 첩자, 정찰병등의 소식통이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공명이 패전의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서 만들어낸 서성현 미화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제갈량이 위험을 무릅쓰고 군대를 분산시키지 않고 무모한 장안 공격을 준비했더라면 위나라의 지휘체계에 혼란이 올 것은 분명했을텐데. 어차피 사마의 군에 의해 포위된다고 해도 촉나라에서 구원군을 보낼 것이며 오나라 역시 협공을 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로 마속 참수 사건은 아까운 인재 한명을 잃은 것으로 제갈공명이 백번 잘못한 것이다. 만약 마속이 살아있었더라면 제갈량 사후의 강유가 멋대로 북벌을 하는 것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강유가 북벌에 신경을 쓴다고 해도 마속이 성도에 머물러 조정을 관장하기에 촉나라가 썩을 일을 없을 것이며 내부의 강화를 돈독히 했을 것인데. 제갈량 그도 역시 권력의 놓치기 싫어서 어쩔 수 없이 그리해야만 했는가? 위연의 경우도 보자. 위연은 반란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마대에게 급습을 당해 죽는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위연을 죽인 사람이 마대일까? 위연과 마대는 이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유비를 마초가 공격할 때 위연과 싸운 장수가 마대이기 때문이다. 마대는 도망치는 척하다가 갑자기 돌아서 화살을 쏘았고 이 화살을 맞고 위연을 피를 흘리며 도망쳐 왔다. 마대는 여기까지 쫓아왔다가 장비와 1합도 안되어 큰 칼을 버리고 도망쳤다. 위연과 마대는 이때부터 서로의 사이는 좋지 않았고 그 이후로 위연은 마대를 종종 무시해왔다. 제갈량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위연은 사실 유비를 섬기지 제갈량을 섬기지는 않았다. 위연의 경우는 자기 주장이 뚜렸했다. 이러한 점들은 제갈량이 곱지않은 시선으로 보게 하기엔 충분하여 그를 관우와 마찬가지로 외곽지인 한중으로 보내버렸다. 마초 역시 한중에 있었다. 위연, 마초, 관우, 장비 모두 제갈량이 있는 중앙정부에서 떨어져 있었다. 봉추 역시 중앙정부에서 떨어져 나와 서촉을 공격하는 도중에 낙봉파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유비의 장자 유봉 역시 국경지대에 맹달과 함께 같이 있었다. 이러한 방면에 조자룡은 거의 언제나 변함 없이 중앙정부에 있었다. 그리고 그가 아꼈던 마씨 형제들을 비롯한 문관들은 대부분 외각지에 파견을 나가지 않았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갈량은 자신의 적수가 될만한 자들은 모두 촉나라 수도인 성도 밖에서 주둔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유비 다음가는 실권자가 되려했던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그의 위협이 될 세력들은 다 죽고 위연 하나만이 남았다. 그는 생전에 위연을 미워했으나 그가 위연을 죽이라 했을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위연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다른 나라에 투항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촉나라 황실에 대한 충성심 높이 살만 하였다. 그러기에 죽일 수 있는 상황은 많았지만 오히려 상을 내리는 등 위연을 달래고 있었다. 이는 촉나라에 거의 없는 용맹한 장수를 죽이기엔 너무 아까워서 였다. 그런 그가 위연을 죽이라고 말했을지가 의문이다. 위연은 제갈량이 죽고 난 후 병권을 자신이 통솔하려 하였다. 그가 병권을 잡는 것은 당연하였다. 오랬동안 한중에 머무르면서 촉*위나라 국경지대의 지형에 밝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촉나라 승상이 되어 횡포를 부리려던 양의와 대립구도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강유는 양의의 편에 섰다. 이유는 즉 자신이 위연만 제거하면 무관중에서 자신에 대항할 자는 없었다. 요화(요화는 실제로 동명이인이라고 한다. 관우가 만난 요화와 북벌에 참가한 요화는 다르다는 것이다.) , 마대, 하평등의 무장은 그런 큰 그릇도 아니었다. 어쨌든 역사에서 강유는 양의의 편에 섰고 위연을 죽이고 나서 그와 대립구도를 가질 사람은 문*무관을 통틀어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양의는 자신이 승상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비위가 승상의 자리에 오르자 한다는 말이 북벌 당시 위나라에 군사를 거느리고 투항을 했어도 이런 푸대접을 받지 않았을 거라는 것이었다. 이 사실이 발각되자 유선은 양의를 참수시키려했으나 비위의 말을 들어 그를 평민으로 만들어 버렸다. 양의는 곧 부끄러워 자살했다. 이렇게 해서 정권을 가진자는 강유와 비위였으나 사실 병권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비위는 허수아비나 마찬가지 였다. 이러한 상황들을 유추해보면 제갈량이 위연을 죽이라 했을지도 의문점이 남는다. 제갈량이 자기는 어차피 죽는 마당이므로 위연을 죽이란 명령은 내릴 일은 없다. 자신과 대립해서 그렇지 촉나라에 충성하는 용맹스런 장수를 죽인다는 것은 북벌 계획을 더욱 어둡게 만들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강유와 양의가 거짓 유언을 만들어 위연을 죽였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 양의도 곧 죽음을 맞이하고..... 사람들은 위연을 욕하고 잘 죽었다고 욕하고 넘어가지만 이는 꼭 되집어봐야할 중요한 사건이다. 우리가 믿는 충신인 강유와 양의가 오히려 거짓 조서를 만들어 위연을 죽여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9. 삼국지 연의 적벽의 신화에서 오장원에 지는 별까지. 삼국지 연의는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계책과 하늘과 서로 통하여 바람을 불게하는 공명의 비상함 그리고 촉나라 무장의 지나친 용맹을 써왔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나관중이 삼국지 연의를 썼을 때 촉한계승론자 였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유명한 사실이다. 그는 다른 나라에 비해 경제력, 군사력 등 모든 방면에서 약한 촉나라를 내세울 방법은 신의 용맹을 가진 장수들과 다른 나라의 전략가들보다 몇수위에 있는 제갈량의 용병술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를 대변해 주는 것이 적벽대전에서 시작한 제갈량과 촉나라 장수의 상상할 수 없는 능력들 이다. 그러나 오장원에서 죽을 때의 제갈량이 한치 땅도 빼앗지 못한 것이 말해준다. 나관중은 촉을 세우기 전의 유비의 세력을 내세울 것이 없기에 촉의 무장들과 책략가들을 의도적으로 위나라, 오나라 보다 더욱더 강하게 표현을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미화된 사건이 장판파 사건, 화용도 사건 등 많이 있다. 이중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나관중이 마음대로 만들어낸 것도 있다. 그러나 그런 나관중도 촉나라 말기를 미화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쇠퇴하여 망해가는 나라를 어떻게 자랑할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강유라는 인물을 내세웠고 유선을 무능한 황제로 비유하고 황호라는 간신이 나라를 썩게 만들었던 것이다. ( 사실 유선이 무능하기만 하고 황호라는 내시 하나가 나라 하나를 무능력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는가? 앞에서 말했듯이 강유는 정권과 병권을 손에 넣으려고 위연을 살해할 가능성을 가진 인물인데 황호가 나라를 썩도록 보고만 있었을 리가 없으며 유선 역시 아버지 때의 그 힘든 고난과 자신 역시 장판파에서 조자룡에게 의해 목숨을 구하였고 이 은혜를 절대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무엇을 보아 그가 무능력 한가? 나관중의 필체에 휘둘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유선이 저지른 어리석은 행동이 무엇이 있는가? 그저 나관중이 무능력하다고 말한 것 밖에 없다. 그가 무능력했다고 했다면 그래도 몇십년을 어떻게 버텼을 것이라 보는가? 강유란 인물 혼자 위나라를 막을 수 있다고 보는가? 그렇게 유선이 무능하고 나라가 썩었다면 왜 몇십년을 버텼다고 보는가? 한때 삼국통일의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던 원소의 경우를 보라 그의 아들들은 무능력하다는 말은 없었다. 조조의 능력이 더욱더 뛰어나게 표현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관도 대참패 이후 원소가 죽고난 후 원소의 아들들은 자기들의 땅을 모두 잃고 요동으로 도망갔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유선이 무능력했다면 원소와 그의 아들들처럼 몇년도 못버티고 멸망해야 하는 것이 당연지사 아닌가? 그리고 촉나라엔 인물도 없고 인구 수도 적었으니 원소보다 훨씬 빨리 멸망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차피 촉나라가 삼국을 통일할 가능성은 더욱 줄어들고 있었다. 그래서 촉나라 멸망의 책임을 유선이란 인물이 혼자서 다 받아내야 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없던 것까지 과장해서 있는 것처럼 말하고 그래서 삼국지 연의는 역사서가 아닌 소설책, 고전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중* 고등학교때에도 배우지만 역사에는 자신의 주관을 최대한 배제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이는 거의 불가능해서 역사가들의 의견이 들어가서 승자 쪽으로의 역사가 만들어지기는 하나 현대에 와서 많이 수정되고 고쳐지고 있다. 그런데 나관중의 삼국지 연의는 너무 많은 과장과 자신의 주관이 너무 많이 들어갔으니 고전이라고는 하지만 읽는 독자의 세심한 관찰과 객관적인 시각 그리고 삼국지연의를 비판하는 생각을 가져 보아야 한다. 그것이 삼국지 시대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삼국의 무장들, 전략가들 그리고 그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을 명예롭게 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10. 현재의 삼국지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 요즘 네이버 지식인에서 삼국지에 대한 것을 보면 극단적으로 나뉘어져 있다. 한 부류는 코에이 등의 게임, 삼국지 연의를 지나치게 추구하는 사람들이요. 다른 한 부류는 삼국지 진수등을 접한 사람들이다. 삼국지 연의를 읽은 사람들은 말도 안되는 적벽대전, 조자룡의 장판파 전투를 지나치게 존경하여 객관적인 글을 쓰는 사람들을 아무런 근거 없이 비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지 진수를 조금이나마 접한 사람들은 삼국지 연의가 거짓과 허구로만 가득찬 책이라 하여 삼국지 연의를 읽고 삼국지에 대해서 논평을 할 수 없다고 깔본다. 그러나 이 두 부류의 사람들 모두 올바른 행동을 한다고 볼 수 있을까? 사실 자신이 읽은 분야의 책에 대한 자긍심이 강한 것이기에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진정한 삼국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서로의 말에 수긍하고 긍정해주는 태도를 갖추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필자가 그들을 비판할 입장은 아니고 삼국지를 다른 사람들 보다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나이가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닌 현재(2004년) 대학교 1학년 생일 뿐이다. 필자가 삼국지를 처음 접한 것은 지금으로 부터 7~8년 전의 일이었다. 물론 필자도 삼국지 연의를 좋아했고 믿었으며 처음에는 조조를 미워했고 촉나라 장수들에 비해 용맹이 딸리는 위나라, 오나라 무장들(삼국지 연의에서 보면 이상하게도 촉나라 장수들에게 힘을 못쓴다.) 과 책가들을 비웃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책들과 사람들의 의견을 접할수록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삼국지 진수를 접하게 되었고 중국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 초한지와 수호지를 비롯해서 금병매도 조금 접해 보았다. 지금 글을 쓰는 이순간 그동안의 삼국지와의 기억들이 스쳐가고 있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었던 책들을 읽고 인터넷등에서 정보를 보고 다른 사람들의 논평을 보니 삼국지 연의도 그렇게 잘못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그러기에 필자는 삼국지를 좋아하시는 분들께 삼국지 연의, 삼국지 진수, 초한지, 수호지, 금병매 등 많은 중국고전과 역사서를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다. 그렇게 하신다면 흑백논리의 오류에서 벗어나 더욱 더 자유롭게 삼국지에 대한 재평가를 내릴 수 있으며 2000년간 존속해온 삼국지가 더욱 더 빛을 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우 로마인 이야기, 로도스 섬 공방전을 비롯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와 다른 서양 나라에 대한 역사에 대해 논평을 했던 책을 현재 읽어보고 있으며 삼국지 연의도 현재도 읽고 있다. 읽는 이유는 삼국지등의 동양사와 서양사의 차이점을 알아보기 위해서 이다. 결코 자랑하려고 쓴 것은 절대 아니다. 속담 중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고사성어가 있다. 옛것을 익히고 나아가서 새로운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렇다. 삼국지 연의가 과장된 것과 허풍이 많기는 하나 읽을 필요없는 쓰레기는 아니다. 삼국지 연의 안에서는 지난 2000년전에 중국대륙에 존재했던 인물들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 앞으로도 잘못된 점은 수정되어서 나오겠지만 필자는 삼국지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삼국지 게임도 많이 해보시고 삼국지에 대한 논평이 담겨 있는 이문열의 삼국지든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삼국지 연의와 삼국지 진수 같은 책들도 읽어보거나 네이버 지식인 같은 의견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대형 지식 공유 사이트에서 서로의 의견을 주고 받으며 다방면으로 많이 접촉해보시길 원한다. 그리고 삼국지를 보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의 국사를 좋아하고 우리나라에 국사에 관련된 서적들을 읽어보시길 간절히 바란다. 이것까지는 무리겠지만 일본의 역사 서적을 읽어보심도 권한다. 그것만이 무지한 필자가 진정으로 삼국지 독자분들께 해드릴 수 있는 단 한가지의 조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즘도 중국은 고구려사가 자기 소수민족의 역사라면서 광기어린 짓을 하고 있다. 이는 중국 정부에서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역시 고구려사를 우길 수 밖에 없다. 사실 중국은 더욱더 강대해 질 것 같지만 신장웨얼 자치구와 티벳 자치구 같은 드넓은 중국의 서쪽 영토에서 독립을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으며 만주 아니 연변에 사는 조선족의 땅은 우리에게 다시 반환해야 한다. 그리고 일본과 중국의 일방적인 외교로 일본은 철도 부설권을 얻어먹고 중국은 간도를 가져갔다. 그런데 이 간도는 중국 흑룡강성에 위치해 있다. 이 흑룡강성에서 나오는 농산물을 우리나라에서 많이 수입해 오고 또 우리의 입맛에도 맞는다. 이 넓은 간도는 러시아와의 무역에도 용의하다. 이러한 이유 그리고 중국 내부의 공산주의 국가의 큰 문제점인 공무원들의 지나친 부폐(우리나라는 엄청 깨끗한 편이다.) 그리고 베이징, 상하이 등의 거점 대도시에 비해 대부분의 도시의 낙후, 서쪽 대륙과 동쪽 대륙의 불균형(중국은 몇십년에 걸쳐 균형잡힌 도시들을 만들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노력하고 있으나 성공할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지나친 인구수로 출산 1명으로 제한(이때문에 실수로 더 낳게 되버린 경우 아이들을 버리는데 이는 국제 사회에서도 큰 문제가 되었다.) 성비 불균형등 신흥 강국이라는 중국의 미래 역시 편치만은 않다. 만약 그리고 한 자치구만 독립을 해도 다른 자치구들도 덩달아 독립을 주장하며 할 것이기에 이런 상황에 마주친다면 중국은 강한 힘을 쓰지 못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하기에 중국은 정부까지 나서 역사를 왜곡하며 걸핏하면 대만을 위협하여 냉전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들의 위혐에 우리의 고구려사를 잃어버려야 하는가? 우리 한민족의 가장 자랑스러운 역사를 왜 중국에게 넘겨 주어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고구려사에 대한 철저한 고증과 더 활발한 연구를 우리나라와 북한이 공동으로 협력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자랑스런 한민족의 후예로써 우리들 역시 고구려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고구려사를 지킬 수 있는 것이며 우리나라의 미래를 밝게 하는 것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격언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중국을 알기에 앞서 우리를 알아야 한다. 우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역사를 알아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의 역사는 우리의 유리되어 있고 상충하는 것이 아니다. 몇천년 전의 우리의 기억인 것이다. 왜 우리의 기억이 남의 기억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의 의지로 만들어진 산유물이 우리의 역사 아닌가? 우리의 기억은 우리가 자각하고 있어야지 남이 자각해봤자 소용없는 것이며 남들은 자각할 수도 없다! 이제 그만 삼국지에 대한 글을 마칠까 한다. 나를 필자에 비유하여 글을 쓰게 되어 읽는 이로 하여금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그 점은 양해 바란다. 기타 궁금한 점이나 잘못된 점 그리고 보충 설명을 해주실 분은 kyh1985912@hanmail로 메일을 보내주시기 바란다. 앞으로 여러분이 삼국지에 더욱 더 정념하고 삼국지를 통해 많은 것을 알게되길 기원하겠다. 독자 분들께 더욱 더 많은 것을 알려드리지 못한 것과 거의 해본적이 없고 능력이 안되어 발생한 필자의 작문의 미숙함에 대하여 읽는 이에게 진심으로 사과 드린다. 내용출처 : [직접 서술] 직접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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