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배나의 사랑스런 작가 Jerry Uelsmann
baena's absolute fiction series
- conte #1.
샤워를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거품을 내어 겨드랑이를 문지른다.
털이 비죽 자라나 손끝에 가실하니 감긴다.
그가 사주었던 하늘색 여성용 면도기를 무심결에 갖다대니
원치 않았던 생각이 난다.
그는 나의 토실한 겨드랑이 살을 좋아했었다.
침대에 누워 얼굴을 마주보며 쓸데없고 유치한
우리만의 사랑 얘기를 지겹도록 나누다가도
어느 순간 내 팔을 머리위로 들어올려
겨드랑이 살을 만지는 걸 좋아했던 그 사람.
왜 갑자기 그 사람이 생각나는 걸까.
그는 내 몸뚱아리에서 연약해서 보듬어주고 싶은 부분이라고는
여기밖에 없다는 듯 굴었다.
꼬집기도 하고 빨기도 하면서 그는 이곳을 정복했다.
그는 남들이 정복하고 싶어 하는 대체적인 곳,
가슴이라던가 아래쪽의 은밀한 곳보다
나의 겨드랑이를 더 좋아했다.
아무도 너의 겨드랑이를 좋아한 적은 없을거야.
언젠가는 그가 내 겨드랑이를 너무나 사랑하다 못해
손톱으로 주욱 그어내려 찢어버리면
웬지 숨겨져 있던 하얀 날개라도 돋아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그래, 나는 너의 천사일지도 몰라.
이 세상에 겨드랑이가 있는 여자는 나하나 뿐이라는 착각속에서
나는 그의 열렬한 숭배를 있는대로 만끽했었다.
한참 상상의 세계를 떠돌며 무심결에 박박 밀어댄 탓에
연약한 겨드랑이 살이 아리다.
가만보니 피 한방울이 맺혔다.
흐르는 물줄기 속에서 고장난 로봇처럼 계속 면도기를
움직이고 있었던 게다.
아, 맞다, 이렇게 연약해서 그랬나보다.
그는 연약한 것들을 사랑했다.
연약해서 보듬어줘야 할 것이 생기면
자기 아닌 그 누구도 안될 것 처럼 나섰다.
그래서 난 늘 불안했다.
그의 옆에는 나 말고도 연약한 여자들이 줄을 섰으니까.
난 강한 척 하는 여자 쪽에 가까웠으니
척보기에 나보다 연약한 여자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어쩌다가 싸우고 눈물이라도 흘리는 날이면
나의 자존심은 둘째치고
날 사랑한다고 말하며 그가 미안해 하고
사과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못내 민망해지는 것이다.
꼭 내가 일부러 연약한 여자인 척 하며
그의 사랑을 억지로 내 옆에 붙들어 놓은 것 처럼
마음이 불편해 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더 강한 척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나의 숨겨진 연약함을 찾아내서
그 부분을 사랑해주는
나름대로의 노련함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겨드랑이 따위의.
하지만
나의 숨겨지지 않은 부분들은 영 자신없긴 매한가지였다.
가끔 싸워서 울기라도 하는 날이면
내가 꼭 그의 사랑을 시험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별로였다.
한번 떠오른 그의 영상은 샤워를 마치고도 날 떠나지 않았다.
오늘 하루 아무일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혹은 너무나 바쁘게 친구들과 만날 약속을 잡고 부산을 떨어도
이미 코끝에 맴돈 그의 체취가 쉽사리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볼까.
아니다, 관두자.
그의 옆에는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나기 직전인
나보다 한참은 더 어리고 보송보송한 여자가
예전에 내가 그랬듯이
하늘로 두 팔을 뻗기만 하면
그를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