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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레이디의 대명사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백주영 |2008.02.23 20:00
조회 1,123 |추천 0
 


퍼스트 레이디의 대명사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재클린 부비에 케네디 오나시스(1929-1994), 이는 흔히 우리가 재키(Jackie)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이가 마지막으로 가졌던 이름이다.
'재클린 리 부비에'로 태어나 '재클린 부비에 케네디'를 거쳐 '재클린 부비에 케네디 오나시스'로 생을 마감한 재키. 이 나열하기 조차 힘든 이름들은 그녀 인생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권력과 부로 상징되는 인물의 성이 고스란히 그녀의 이름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재키는 1928년 7월 28일 뉴욕의 존 버누 부비에 3세와 자넷 리 부비에 사이에서 맏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인 존과 자넷의 결혼은 정략적인 것이었다. 존은 월가의 증권 중개인이었는데 결혼 전 부터 방탕한 생활고 바람둥이로 유명했다.그러나 귀족 가문이었던 부비에 가와 결합을 원했던 자넷의 아버지 제임스 리는 방탕한 기질의 존을 사위로 삼았다. 마찬가지로 존은 처가가 부자라는 사실에 주목하고 자넷과 결혼한다. 재키는 어렸을 때부터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다섯 살 무렵 재키는 유모와 동생 캐롤라인과 함께 센트럴 파크를 산책하던 중 혼자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때 재키는 자신을 보고 다가온 경찰관에게 "내 보모와 여동생이 길을 잃은 것 같아요."란 말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재키의 어른스러움은 자넷으로부터 받은 교육 때문이었다. 자넷은 다정다감한 존과는 달리 딸들에게 엄격했고, 이런 어머니의 교육으로 재키는 똑똑하고 직선적이며 승부욕이 강한 아이로 성장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삐걱거리는 결혼 생화을 했던 재키의 부모는 1930년대말 별거를 결정했고 재키가 열한 살이던 1940년에 이혼에 합의했다. 재키와 캐롤라인의 양육은 자넷에게 맡겨졌다. 부모의 이혼은 재키에게 충격을 주었고, 특히 아버지 존을 더 좋아했던 재키는 존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사실을 힘들어했다. 재키는 주말마다 존을 만나는 것을 즐거워했고, 존은 성장하는 딸에게 어떻게 하면 남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지를 가르쳤다.
"너희들은 자존심을 갖고 좀 더 냉정해야 해. 아무도 접근할 수 없을 것 같이 불가사의하고 신비스런 미소로 스스로를 가꾸어라"
또한 부비에는 딸에게 충고한다.
"대중 사이에서 시선을 끌기 위해서는 방의 한가운데로 걸어들어가서 현란한 웃음을 짓고 턱을 똑바로 쳐들어라. 시선이 아래쪽으로 향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절대 다른 사람을 찾고 있는 것 같이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들이 너를 찾고 있어야 한다."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는 누구의 마음이라도 사로 잡을 수 잇는 등대 같은 여인으로 기억된다.
재키는 학창시절 줄곧 우등생이었고, 조지 워싱턴 대학을 졸업한 후 여기자로 활약하면서 뉴포트 사교계 파티에 데뷔하여 1951년의 데뷔땅뜨(사교계의 여왕)가 되었다. 이 무렵 재키는 우연한 기회로 젊은 나이에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던 상원의원 존 F. 케네디를 만난다. 두 사람은 2년여에 달하는 뜨거운 연애 끝에 1953년 9월 12일에 결혼식을 올린다.
그로부터 8년 후 재클린은 남편의 손을 잡고 퍼스트레이디로 백악관에 입성한다.  


 


젊은 대통령 케네디의 인기는 임기 내내 50%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는 높은 지지율을 보였고 31세의 젊고 아름답고 우아한 퍼스트 레이디 역시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인기스타였다. 재키는 남편 케네디 덕분에 주목받을 수 있었으나 나중에는 남편보다 더 인기있는 스타 되었다.  재키가 케네디와 함께 프랑스 파리를 공식 방문했을 때 파리 시민이 보여준 열화와 같은 환영은 그녀의 인기를 실감케 하는 것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재키는 "비브 쟈키(재키 만세)"를 연호하는 파리 시민들의 함성을 들을 수 있었다.  케네디는 이런 부인을 자랑스러워했으며 파리 시민 앞에서 자신을 소개할때 "나는 재클린 케네디를 수행해서 파리에 온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퍼스트레이디 재클린의 세련된 매너와 패션감각은 언제나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미 국민은 재클린과 케네디 대통령을 그 어떤 대통령 부부보다 사랑했다.  그러나 재클린 케네디는 남편이 여러 여자들과 염문을 뿌리는 바람기 때문에 그다지 즐겁지 만은 않은 결혼생활을 해야 했다. 잘 알려진대로 마릴린 몬로와의 염문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사건들이 언제나 재클린을 괴롭혔다, 그러나 그녀는 미국의 퍼스트레이디로서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부부처럼 보여졌고 미국은 너무나 보기 좋은 젊은 대통령 부부를 가질 수 있었다.


 

 

 달라스에서 울린 총성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의 주도 달라스에서 재클린은 남편 케네디 대통령과 나란히 앉아 카 퍼레이드를 하고 있었다.
이때 울린 한발의 총성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갑자기 케네디 대통령이 머리를 재클린 쪽으로 젖히며 고꾸라졌다. 순간 재클린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는 그 유명한 ‘오 마이 갓’.  미국 제35 대 대통령 케네디는 그렇게 암살자의 손에 의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재클린도 그날의 총성과 함께 10여년 간의 결혼생활과 3년간의 퍼스트레이디 생활을 끝내야 했다.
남편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장에 3살의 어린 아들 존 F. 케네디 2세의 손을 잡고 참석한 후 공식석장에서 사라진 재클린은 일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역사의 뒤편으로 밀려나는 듯 했다.  그리고 5년간 재클린은 미망인이 된 전 퍼스트레이디로 기억될 뿐이었다.


 

선박왕 오나시스와의 재혼   그로부터 5년후 미 국민은 경악할 만한 소식을 접한다. 그저 조신하게 들어앉아 아이들이나 키우며 눈물젖은 세월을 보낼 것으로 믿었던 재클린 케네디의 재혼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그저 전 퍼스트레이디가 재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불쾌감을 보였을 미 국민은 재혼의 상대가 불한당같은 그리스의 세계적인 부자 오나시스라는 데서 더욱 더 경악했다. 갖가지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으며, 케네디와 비교해 한참이나 못생겼으며, 게다가 최근까지 세계적 오페라가수 마리아 칼라스와 염문을 뿌리던 60대 고령의 남자 오나시스와 재클린이 재혼한다는 사실에 미 국민은 말도 못할 상실감과 분노를 느꼈다. 온갖 악의에 찬 기사들이 언론을 도배했다. 그러나 재클린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케네디와의 사이에 낳은 두 아이를 데리고 당당히 오나시스와 결혼했다. 오나시스 가문은 지금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부자이지만 당사자인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가 생존시엔 세계 최고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돈을 가지고 있었다. 이 결혼으로 재클린은 부를 얻었고 오나시스는 미국 최고의 미남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의 아내를 탈취한 남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워킹우먼으로의 변신   그러나 이 결혼도 그렇게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나시스는 재클린을 전시용으로 데리고 다니며 자신의 능력을 뽐내고 싶어했다고 한다.
말도 못한 모욕감속에서도 재클린은 8년간의 결혼생활을 보냈다. 오나시스의 갑작스런 죽음이후 그녀는 장황하게 긴 재클린 부비에 케네디 오나시스란 이름과 막대한 금액의 상속금을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온다. 사람들은 이제 재클린이 부유한 생활을 즐기며 조용히 칩거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재클린은 보통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여성이 아니었다. 재클린은 기자로 활동했던 처녀시절의 경력을 되살려 출판과 언론 일에 뛰어들어 잡지를 발간하고 책을 출판하였으며, 특유의 매력과 지성으로 많은 사업 동반자를 끌어들였다. 그녀는 누구보다 뛰어난 워킹우먼의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케네디와 오나시스라는 이름 속에 깃든 전 남편들의 영향력을 완전히 제거해 버렸다.  


 


재클린은 미국 상류층 사교계의 대모로, 또 출판업계의 큰손으로 삶을 영위하다가 1994년 5월 20일 바흐치킨 님프종으로 퍼스트 레이디로써, 세계 최고 갑부의 안주인으로써 화려하고 파란만장 했던 삶을 마무리했다.
죽기 전, 그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대변했다고 한다. "나는 혼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해요"라고. 사람들이 재클린 케네디를 영원한 퍼스트 레이디로 기억하고 싶어하는 이유 중 하나는 외모 조차도 20세기 최고의 신데렐라이고 백설공주였기 때문이다. 재클린 케네디는 백악관에서 살던 시절, 디자이너가 아니면서 자신의 이름이 붙은 패션을 만들어 냈다.
'재키 스타일(Jackie Style)'은 단지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유용한 것이었다. 패션에 대한 그녀의 관심과 재능은 대학 재학 중 패션지 보그 주최 대학생 공모전에서 1200명을 제치고 1등에 당선된 일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재키는 이제까지 퍼스트레이디로써는 가장 어린 서른 한 살의 나이로 백악관에 젊은 취향을 불어 넣었다.
그녀는 검정과 회색을 버리고 레드, 핑크, 옐로 같은 색으로 자신의 젊음을 표현했다. 몸에 딱 붙는 민소매 원피스, 천으로 감싼 단추가 달린 부드러운 느낌의 정장은 대중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사각 턱에 큰 머리를 커버하기 위해 부풀어 올린 머리 스타일을 하거나 스카프를 두건으로 이용하는 센스는 놀랍기까지 하다. 게다가 파파라치를 피하기 위해 애용했다는 커다란 선글라스는 그대로 재키 스타일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케네디도 재키의 패션감각이 그들 부부의 인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달라스를 방문하기 전, 케네디는 재클린한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공화당의 부잣집 마나님들이 밍크코트에 다이아몬드 팔찌를 끼고 오찬에 참석할 거요. 거기서 당신은 누구 못지않게 보여야 하오. 텍사스인들에게 진짜 고상한 취향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구려." 재클린은 공식석상에 입고 나가는 옷을 '국가의상'이라고 불렀고 실제로 그녀의 패션감각은 효과적인 정치수단이기도 했다.
대통령과 재키의 첫 공식 방문은 프랑스였다. 모두들 재키의 패션쇼 여행이었다고 기억하는 이 방문에서 프랑스 사람들은 우아하고 매력적인 옷차림에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미국의 영부인에게 반해버렸다. 이후 재키의 패션은 어딜가나 뉴스의 톱을 장식했다. 심지어 하루에 옷을 다섯 번 갈아입은 것, 구두사이즈를 확인해낸 것에 대한 흥분된 기사를 싣기도 했다. 재키의 심플한 옷차림은 옷으로 계층을 나눴던 당시의 벽을 허물었다. 교육받은 듯 획일화를 걷던 패선이 각자의 스타일로 줄기를 뻗어가기 시작했던 중심에 재키가 있었다.  


 

재클린의 숨겨진 사생활 공개!   미국 대륙뿐만 아니라 전세계인에게 있어 그녀의 이름은 곧 여왕을 뜻한다. 고상함, 우아함, 단아함, 상류사회를 일컫는 모든 수식어는 바로 그녀 자체였다. 이미 고인이 되어서도 아련한 설레임을 불러일으키는 세기의 여왕, 재클린 케네디!!
하지만 사후에 속속들이 밝혀진 그녀의 사생활은 미국 사회에 충격을 안겨 주었다. 미 연예주간지 글로브는 재클린이 시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배우인 윌리엄 홀든과도 비밀스러운 사랑을 나눴다고 폭로했다. 그녀는 남편이 죽기 전에 이미 오나시스와 연정을 나눴고, 시동생 로버트와는 케네디 전 대통령이 죽게 되면서 자연스레 더욱 가까워졌다. 로버트 또한 형이 죽기 전부터 오랫동안 그를 흠모해왔다고 글로브는 주장했다. 대통령 일가와 오나시스의 관계는 1950년 6.25전쟁 때 시작됐다. 오나시스가 불법으로 기름을 선적하면서 막대한 부를 이루자 케네디 형제가 정치적으로 그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1963년 케네디 전 대통령과 재클린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패트릭이 생후 3일 만에 죽자 오나시스는 지중해에 있는 자신의 요트인 크리스티나에 재클린을 초대했다. 케네디 형제는 당연히 오나시스를 증오했고, 케네디 전 대통령은 오나시스의 대담한 제의에 쇼크를 받고 가지 말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재클린은 보란듯 제의를 받아들였다.
재클린이 오나시스를 선택한 이유 중의 하나는 케네디 전 대통령과 배우 마릴린 먼로와의 염문 때문이었다.
케네디 전 대통령이 1963년 11월 댈러스에서 암살되지전 10월에 재클린은 이미 오나시스와 지중해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시동생 로버트와는 오랫동안 연인으로, 또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의지하며 사랑해오다 로버트가 형처럼 1968년 암살된 뒤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났다. 재클린이 "로버트는 나에게 인생 이상의 의미를 가진 존재였다." 고 측근에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녀는 영부인으로 있을 당시 윌리엄 홀든과 케네디 전 대통령이 먼로와 정사를 벌였던 그 침대에서 사랑을 나눴다.   이미지 메이킹의 천재,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그녀는 자신의 상품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재키는 특히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여우 그레타 카르보 못지 않게 신비화 전략을 구사하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다. 죽기 전 그녀가 두 자녀에게 남긴 유언은 "생전의 사생활을 공개 말라"는 것이었다. 백악관의 안주인, 세계 최고 부호의 아내, 그리고 뛰어난 사업가로 살았던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삶 중에서 어느 부분이 가장 행복했을 지는 본인만이 알 일이다. 다만, 한가지 알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충격과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을 지킬 줄 아는 강인하고 굳센 여인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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