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위손’ ‘캐리비안의 해적’등
수많은 영화서 독특한 괴짜 캐릭터 구축
10대엔 학교 자퇴 20대엔 볼펜 세일즈맨 전전…
최근 ‘스위니 토드’서 살인마로 골든디스크 남우주연상
바싹 야윈 광대뼈에 완강한 자기 고집을 숨기고,
형형한 두 눈에서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공상과 왠지 모를 슬픔을 쏟아내던 소년.
제임스 딘을 마음 속에 품고 기타 하나 들고 학교를 뛰쳐나왔던 10대.
볼펜을 팔아 연명하던 20대의 세일즈맨이 마침내 당대 최고의 무비스타가 됐다.
지난 14일 시상식 없이 전해진 골든 글로브상(뮤지컬.코미디영화
부문 남 우주연상)은 조니 뎁(45)에게만큼은 차라리 매우 이상적인
방식으로 보였다.
7번이나 골든글로브에 노미네이트됐 고 2번이나 아카데미 후보에
올랐지만 조니 뎁의 ‘자폐적이고 비사교적 인’ 스타일과 호들갑스
러운 시상식 무대는 잘 맞지 않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2003년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펄의 저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부문 후보에 올랐을 때 “나는 오스카상 후 보가 되길 원하지 않는
다. 나는 내가 탈락하고 숀 펜이 수상했을 때 안심하고 박수를 보내
줬다”고 말한 그였다.
첫 번째 부인인 로리 앤 앨리슨과 이 혼한 후 제니퍼 그레이, 위노나
라이 더, 케이트 모스 등과의 염문설이 한 창 할리우드 타블로드지
를 장식할 무 렵에도 조니 뎁은 당시 루머로 가득 찬 연예계를 냉소
했다. “누가 누구와 데이트를 하는지 모여서 떠들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제발 다른 화제를 꺼내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아니면 차라리
마스터베이션이나 하 든지”라고 독설을 던진 것도 그였다.
스스로를 “수줍음이 많고 예민한 사 람”이라고 표현하는 조니 뎁은
“유명 세를 피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할
만큼 할리우드의 영원한 아웃사이더다.
그에게 스타덤을 안겨 준 ‘가위손’ 이후 최근작인 ‘스위니 토드: 어
느 잔혹한 이발사의 이야기’까지 조니 뎁은 영화 속에서도 골똘히
자기세계에 몰입했으며 언제나 외계로부터 온 타자였고, 정상과 비
정상의 경계에서 고독한 슬픔에 감싸여 있었다.
조니 뎁은 스크린 바깥에서든 안에서든 어둠과 안개가 감싸고 도는
고딕풍의 성채에 혼자 있는 소년같이 살아왔지만 ‘가위손’에 동화되
듯 세상 사람은 그에게 환호했다.
▶섹시한 악동, 낭만적인 무법자, 최고의 배우
미국 엔터테인먼트업계는 지금 조니 뎁에게 잇따라 ‘최고’라는 타이
틀을 안기고 있다.
최근 미국 극장주를 상대로 한 출판사 퀴글리의 설문조사에서 그는
2년 연속 ‘가장 돈벌이가 잘 되는 배우’로 꼽혔다.
또 미국의 연예주간지 피플은 가장 인기있는 남자 배우라는 영예를
그에게 헌정했으며 세계적인 영화 사이트 IMDB는 ‘2007년 최고의
배우 25인’에서 조니 뎁을 1위로 꼽았다.
그 이전에는 ‘영화 역사상 가장 섹시한 스타 1위’(1995년.엠파이어
매거진), ‘가장 아름다운 50인’(1996.2001년.피플), ‘현역배우 중 가
장 섹시한 스타’(2003년.피플) 등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각종 타이틀 목록을 보면 조니 뎁은 할리우드 내의 비주류로 섹시하
고 개성적인 이미지로 어필했으나 최근 들어서는 메인스트림에서
최고 스타로 인정받고 있는 추세다.
계기는 그에게 흥행배우의 입지를 가져다 준 ‘캐리비안의 해적’ 시
리즈다.
조니 뎁은 원래 미국의 전위적인 펑크 뮤지션인 이기 팝을 카피하던
10대 록밴드로 경력을 시작했다.
켄터키 오웬스 보로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로부터 체로키족과 나바
호족 등 북미 인디언의 피와 아일랜드, 독일 혈통을 이어받았다.
어린 시절 부모는 일찌감치 이혼했으며 그는 여기저기를 떠돌아다
니며 생활했고 학교는 15세때 그만뒀다.
조니 뎁은 성장과정에 대해 한 인터뷰에서 “집시처럼, 유목민처럼
항상 다른 곳으로 이동 중이었다”며 “그런 생활이 나의 뇌리에 그대
로 박혀 한 곳에 지나치게 오래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고 말했
다.
10대 시절 열광했던 제임스 딘이나 그가 최고로 꼽는 배우 말론 브
랜도, 좋아하는 작가인 비트 제너레이션 세대의 잭 케루악과 윌리엄
버로스 등에는 정처없이 떠다니던 유년의 경험이 반영됐다.
뿌리 없이 방랑하는 유목민의 감성과 내면 깊숙이 도사린 상실감은
조니 뎁이 자아내는 감성의 근원이다.
그는 “내가 연기하고 반응했던 등장인물은 모두 잃어버린 영혼의
소유자”라고 평했다.
그가 처음으로 연기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첫 부인 로리
앤 앨리슨을 통해서였다.
볼펜 세일즈맨으로 살아가던 조니 뎁은 앨리슨을 통해 니콜라스 케
이지를 소개받고 1984년 ‘엘름가의 악몽(나이트메어)’이라는 영화로 데뷔한다.
이어 24세이던 1987년 제프 야거 대신 출연한 TV 시리즈 ‘21 점프
스트리트’로 청춘스타로 떠올랐다.
▶세상 모든 사람은 괴짜다-‘가위손 소년’에서 ‘면도칼을 든
연쇄살인마’까지
조니 뎁이 키애누 리브스, 찰리 쉰, 톰 크루즈, 맷 딜런 등 비슷한 세
대의 청춘스타와는 전혀 다른 ‘배우’로서의 이미지를 팬들에게 깊이
남긴 작품은 팀 버튼 감독의 ‘가위손’이었다.
이 작품 이후 조니 뎁은 어둡고 기괴한 캐릭터를 주로 맡아 연기하
며 진지한 연기파 배우로서 객석과 평단의 인정을 받았다.
조니 뎁은 이때부터 꼬리표로 따라붙는 ‘진지한 배우’라는 표현에
대해 “그건 마치 ‘공화당’이나 ‘기내식’이라는 말처럼 멍청하게 들린
다”고 비꼬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때부터 그는 스크린에서 괴짜, 악동, 괴물, 이방인 등 ‘정상적인
세계와 불화하고 갈등하는 비정상적인 존재’로서 이미지를 구축한
다.
미국 영화 사상 최악의 B급 감독을 그린 ‘에드 우드’나 어머니 살해
장면을 목격하고 정신적 외상을 갖게 된 수사관 역의 ‘슬리피 할로
우’, 초콜릿 천국을 만든 천재로 등장하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 등
이 대표적이다.
조니 뎁이 롤링스톤스의 멤버 키스 리처즈로부터 영감을 받아 연기
한 ‘캐리비안의 해적’에서조차 그는 선과 악,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지워내고 낭만적인 반영웅과 괴짜의 이미지를 결합시킨다.
특히 이 영화들을 감독한 팀 버튼과는 잔혹하고 기괴한 동화적 환상
을 공유하는 ‘영화적 동지’다.
다시 한번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춘 최근작 ‘스위니 토드’에서 조니 뎁
은 사방으로 뻗친 헤어스타일과 죽은 사람처럼 새하얀 얼굴, 음산한
눈 주위의 다크서클로 고딕풍의 캐릭터를 연기한다.
아름다운 아내를 가졌던 평범한 이발사가 고위 관료에게 행복을 빼
앗기고 잔인한 복수에 나선다는 이 영화에서 조니 뎁은 면도칼로 많
은 사람의 목을 자르는 연쇄살인마다.
이야기만 들으면 인면수심의 악마지만 오로지 아내에 대한 절대적
인 사랑과 복수의 일념 외에는 어떤 대화법도 갖지 못한 ‘스위니 토
드’ 조니 뎁은 차라리 외롭고 수줍으며 서글픈 소년이다.
4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어느덧 40대 중반에 이른 조니 뎁은 자기
세계와 취향을 양보하지 않고 최고의 스타덤에 오른 보기 드문 경우
다.
그는 “할리우드나 거기서 기대하는 사교적인 관계로부터 거리를 두
고 지내고 싶다”며 “그런 종류의 게임에는 서툴다. 이번주에는 또
누가 제일 잘 나가고 또 누가 사람들 관심에서 멀어졌는지 따위를
알아야 할 압박이나 의무감을 지내지 않았도 되기 때문”이라고 말
한다.
그는 자신의 연기철학에 대해 “유심히 관찰해보면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대부분의 사람이 사실은 누구나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며 “대부분의 사람은 전부 ‘또라이’이며 그런 모습을 발견하
는 것이 재미있다”고 말한다.
조니 뎁은 현재 두 번째 부인인 프랑스 모델 출신 가수 바네사 파라
디소와 그의 사이에서 낳은 두 남매와 함께 1년의 반은 프랑스에서
나머지는 미국에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