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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전국이기 때문에 파묻힌 영국의 악마..

홍순기 |2008.03.05 20:09
조회 615 |추천 0

 

(아더 T 해리스)

 

그는 제 2차세계대전(1939~1945년) 당시 1942년, 영국 공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했다.

 

당시 폭격기의 공습방식은 눈에 잘 안 띄는 야간공습을 감행해 군수물자공장 등을 파괴하는

목적이었고, 민간인 밀집지역은 최대한 피하는 그나마 '인도적인 폭격'이었다.

하지만 그런 골라폭격은 영국공군 역시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었다.

(하늘아래에서 폭격기를 향해 반격해오는 고사포. 영국폭격기의 피해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1942년, 해리스가 취임한 이후 영국의 폭격 양상은 급변했다.

 

그가 말하기를..

 

 

 

"적국의 민간인도 적은 적이다.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그런 적을 위해 눈물을 흘릴 필요는 없다."

 

 

그의 작전의 근본이란,

 

 

"최단시간내로 최대량의 폭격기를 동원해,

단시간만에 최대면적을 쥐새끼하나 남기지말고 모조리 쓸어버린다.

 

 

 

 

 

그렇다. 그는 전쟁의 승리보다도 독일의 멸망을 원했고, 독일을 그 누구보다도 증오했고,

그런 독일의 아이와 민간인들을 모조리 멸하는게 그가 가장 희락을 느끼는 일이었다.

그는 독일 민간인들의 대학살을 보고받고도 미동하나 없었다는 냉혈안이라고 전해진다.

 

 

 

 

 

 

 

 

 

 

 

(폭탄비를 뿌리는 폭격기)

 

전쟁사의 '융단폭격'이라는 새로운 장을 열었고, 이 작전이 바로

'밀레니엄 작전'이라고도 불리운다. 이 작전의 목적은 사실 군수물자공장 지대 궤멸로

보이는듯 하지만, 전 도시를 폐허로 만들어 적의 사기를 꺾어버린다는 목적이었다.

 

 

 

 

그의 첫 공습은 1942년,5월 31일, '퀼른 대공습' 으로 시작되었다.

동원한 폭격기의 수는 1080대 !!

 

 한마디로 하늘을 가리는 폭격기들이 먹구름같이

독일도시로 다가오는 모습이라고도 할수 있다.

그들이 뿌려대는 폭탄은 한마디로 '폭탄 비'로밖에 표현이 안된다.

 

그런 그들의 무시무시한 공습으로 한 도시가 20분만에 궤멸이 되었고,

 

민간인 사망은 6만에 달한다.

 

 

그에 비해 영국공군의 폭격기 격추 수는 40~60대를 밑돌았을정도로

한마디로 대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전)


 

 (후)          

 

 

 

 

 

 

 

 

 

 

그 다음으론 '함부르크 대공습'이 개시되었다.

동원된 폭격기의 수는 1000대 가량.

 

삽시간만에 전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이때 함부르크를 알아볼수있는 건물 모두가 없어졌다고 전해지며,

 

5만에 달하는 민간인이 사망했다

 


 

고모라 작전으로 유명한 함부르크 폭격 물론 함부르크에 대한 폭격은 그 전후로 계속 됬다

 

가장 크게 터진 것은 바로 고모라 작전으로 명명되어 1943년 5월 27일, "폭격대 사령관 명령문 173번 "이 공포되면서 7월 24일부터 8월 3일까지 3천 여 기의 폭격기들이 9천 톤 가량의 폭탄과 소이탄 '쿠키'(거대한 시설물 파괴에 쓰이는 고폭탄) 등으로 인해 도시는 화염폭풍에 휩싸였다.

 

함부르크에 무시무시한 대기류가 몰아쳐 도시의 온도는 무려 섭씨 800도까지 올랐고, 최대 풍속 시속 240km 의 엄청난 태풍이 불어닥쳤다.

대재앙이 끝난 뒤, 시민 5만 여명이 사망했고, 25만 가구, 백만명 이상의 함부르크 시민들이 집을 잃었다.

 

 

 

 

1945년 2월 14일.

직전 나치 독일의 마지막 발악인 발지대전투에서 연합군이 승리하자, 더 이상 독일에게는 저항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이미 독일의 패배가 기정사실이 된 시점에서, 영국 공군 원수 해리스는 독일의 항복을 앞당기기 위해서 역사적인 대학살극을 지시한다.

 

이가 드레스텐 폭격이다.

 

214대의 제1진이 46만개의 폭탄을 드레스덴 상공에 흩날렸으며, 다음날 새벽 3시 제2진의 공습에서는

1진의 절반가량인 28만여개의 폭탄이 투하됐다.

 

그의 마지막 공습으로 꼽히는 '드레스덴 대공습' 은

한마디로 '지옥' 그 자체였다.

 

드레스덴은 사실 군수물자공장과도 관계가 없었고, 독일 민간인들 역시, 연합군이

드레스덴만은 폭격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엄청난 피난민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고,

해리스는 그런점을 노려 드레스덴를 끔찍한 지옥의 무대로 만들어버렸다.

 

 

 

 

1945년, 2월 14일,미국과 합동작전을 개시, 무려 3000대 에 육박하는

대규모 폭격기들을 동원하여, 1시간만에 전 도시를 초토화는 물론,

 

무려 4만에 달하는 사람들을 몰살시켰다. 하지만, 이 숫자는 확인된 시신의 수지만,

시신 자체가 '소각'되어 행방불명된 수만 따지면 10만명을 초월한다.

 

 

(드레스덴 폭격의 희생자)

 

당시 그때의 13세 소녀의 '지옥'의 증언에 따르자면..

 

--엄마는 나에게 젖은 담요를 덮어주고는 내게 키스를 하시고 "어서 달려라!" 라고 소리쳤다.

그 후 엄마를 보지는 못했고, 내가 밖을 나섰을땐 온 도시가 불바다였다.

내가 발을 디디는 순간, 나는 순간 발을 띠어야겠다고 느꼈다. 폭격은 도로 자체를 녹였다.

주변을 보니 녹은 도로에 다리가 붙어 떨어지지않는다며 아우성인 사람들이 천지였고,

몇몇 사람은 그 상태에서 불이 붙어 죽어갔다.--

 

(녹아버린 시신)

 

 

 



드레스덴 폭격에 의해 죽은 민간인 시체들

 

 

 

 

 

한아이와 그의 부모가 서로 껴안은채 죽어간 모습..

 

 

 


길거리에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시체들

 

 

당시 도시는 무려 화씨 1800도에 치닫닫았고, 하늘에선 여전히 폭격비가 쏟아져내렸다.

 

 

영국 폭격기 파일럿들은 하늘 아래 불바다가 되고있는 '드레스덴'을 보며

전송기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불쌍한 개자식들..잘가라"

 


 

드레스덴 폭격후 완전히 파괴된 성모 마리아 대성당.

 

 

드레스덴 폭격전

 

드레스덴 폭격후

 

 

 

전화기로 드레스덴 폭격 명령을 내리는 아더 T 해리스

  

나치 독일이 V2까지 동원해가며 5년간 영국본토에 공격을 가한 결과 발생한 영국 민간인의 희생자 수가 51,909명인 것과 비교했을때,

수시간만에 20만이라는 민간인이 죽은것은 어떤 변명의 여지조차 없다.

 

15년전.. 영국에서는 아더 T 해리스의 동상을 세우자고 영국 시민들은 주장하였다..

 

그 때 한 독일인이 영국인들에게 말한 것이 생각난다.

울부짖으며.. "히틀러조차도, 한시간에 십만명을 죽이지는 못했다.." 

 

독일인들이 이런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1992년 영국의 여왕에 의해서 동상이 세워져 지금까지 학살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드레스덴 폭격으로 인해 생겨난 것..

 

1. 아더 T 해리스의 폭격으로 블럭버스터(blockbuster)란 말이 생겨나게 된다.

아더 해리스의 명령으로 폭격을 했을 때 사용했던 폭탄의 이름이 바로 블럭버스터이다.

블럭버스터란 흥행에서 대 성공을 한 영화를 가르키는 말이다.. 블럭이란 말은 대도시에서 사방 도로에 의해 경계 지어지는 한 구역을 단위로 부를때 쓰는 말인데 이 전체 구역(block)을 날려 버릴(bust) 정도로 큰 폭탄이 원래 blockbuster 인데 이 정도로 대단한 파워를 가진 영화란 뜻..

 

2.

드레스덴 폭격에서 이름을 따온 드레스덴 돌스라는 그룹

 

 

 

 

아더 T 해리스.. 그의 작전으로 죽은 독일 민간인의 수만

 

50만명에 이른다.

 

 

 

하지만 그는 1953년, 독일이 항복한 후, 연합군 군사재판에서 처벌을 받지않았다. 결국 전쟁은

 

-이긴 자가 정의다-

 

 

또한

 

-선으로 가장한 악의 농락이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사람을 죽이라고 이 자리에 얹혀졌다."

 

 

 

 

 

거의 6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드레스덴은 복구 중이고,

완전히 복구 하려면 앞으로도 수십년이 있어야한다고 한다..

(아직 복구되지 않은 건물 중 하나)

 

전세계 방문객을 대상으로 무분별한 폭격이 남긴 상처에 대한 끔찍한 다큐멘터리를 지하 교회에서 상영을 하고 있다.

 

무엇을 위해 도시 전부를 녹여버렸는가에 대해서 [폭격의 역사]를 쓴 스벤 린드크비스트는 '이 폭격은 상징적 의미 이외에 전략적 목표는 실존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부 전선에서 이미 독일군은 무너졌고, 연합군이 밝힌바대로 그 독일군의 동쪽으로의 진군을 막고자 했더라면, 엘베강 위의 철교를 무너뜨려야 했을텐데 부셔야할 철교는 고스란히 놔두었다고하니..


 드레스덴 공습으로 인한 피해 규모 (역사학자들 마다 다름)

 

 공습 직후 작성된 드레스덴 경찰국 보고서에 다르면 민간 거주 건물 12000개 파괴, 은행 24개, 보험사 건물 26개, 소매 및 유통 창고 31개, 일반 상점 6470개, 창고 640개, 상가 256개, 대형 호텔 31개, 여인숙 26개, 행정 및 기타 정부 관련 건물 63개, 극장 3개, 영화관 18개, 교회 11개, 예배당 60개, 문화유산 50개, 병원 19개, 학교 39개, 영사관 5개, 동물원 1개, 철도청 1개, 우체국 19개, 수도 공급처 1개, 전차역 4개, 선박 19개, 식품.의류공장 200개 등이 파괴, 사상자 60만명(반 이상이 사망)의 피해를 입었다.  그 당시 1945년 무렵, 드레스덴 폭격이 일어났을 당시 독일군들은 무방비에 속수무책이었다.전투기는 있어도 조종사가 부족했기 때문에 연합국의 폭격기를 막을 방법조차 없었다. 또한 미국과 영국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었고, 당연한 일이었다며 주장하였다.. 우린 미국의 진주만보다 알려지지 않은 이 폭격들을 기억해야 한다. 드레스덴 폭격 외의 민간인 폭격에서 희생당하신 모든 분들께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http://cafe.naver.com/nazzis/251 - 왜곡되거나 승전국에 의해 파묻힌 역사들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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