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도 없는 아침 이른 외출 채비를 하고
하릴없이 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갔다.
며칠사이 악몽에 시달리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지만
걷고 걷고 걸으며 쉼없이 다리를 움직인 덕분에
밤새 시달림에 축 늘어졌던 몸은 한결 가벼워 졌다.
그렇게 한시간 반쯤 걸었을까..?
잠깐 멈춰서 담배에 불을 붙이는데
내 시선을 끄는 건물 하나가 있었다.
옛벨기에영사관이었다는 미술관-
뭔가 사연많을듯 보이는 고풍스러운 향기에 끌리듯
나도모르게 안으로 발걸음을 향했었다.
마치 이곳에 오기로 약속이나 한듯 자연스레 전시실을
이리저리 찬찬히 돌아보던중
문득 오래전 한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한장의 그림은 천마디의 단어를 대신 한다."
그때 당시에는 변변찮은 글을 읽고 쓰는걸 좋아했던
나로써는 왠지 모를 반박감이 생겨
소설이 읽은이로 하여금 상상력을 자극하여
얼마나 무궁무진한 그림을 머릿속에 펼쳐낼수있다는 것을
설명하며 억지주장을 펼쳤지만 지금와 돌이켜생각해보면
제대로된 반론은 한마디도 못했었다.
그런저런 예전기억에 쓴웃음을 지으며 전시실을 돌아보던중
한장의 그림을 마주하게 되었다.
전시실 한쪽 벽을 몽땅 차지하고 앉아있는 빨려들듯한
수묵화 한장을 넋을 놓고 한참을 바라봤다.
정 중앙에 자리잡고 앉아 웅장하면서도
사뭇 그모습이 근엄하기까지 한 옛 조선시대 어느 궁궐을
중심으로 하얀 캔버스 빼곡이 메우고 있는
크고작은 어느 대감댁 으리으리한 기와집도,
아랫집 난봉꾼 김선달네 기와집도,
논 두어마지기로 항상 궁핍한 뒷집 김선달네 초가집도,
장날이면 너나 할것없이 복작일것같은 저작거리마저도
모두가 살아숨쉬는 그시절 어느날을
그대로 옮겨놓은것만 같은 청사진이었다.
그리고 미술관을 나서며 7년만에 그 때의 친구의 말을
겨우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한장의 그림은 천마디 단어를 대신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