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법률가 노무현'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0. 지난 번에 쓰다가 지쳐 그만 둔 '법률가로서의 노무현' 이야기를 이어 하려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지난 5년간의 무수한 비판을 보다보면, 어렸을 때 할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 하나가 생각납니다.
시골 장터에서 독을 팔 때 엎어놓고 판다고 합니다.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나 뭐 그런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독을 사러 온 노인이 한참을 들여다 보더니, "여기 독들은 모두 구멍이 막혔네"라고 중얼거리더랍니다. 그러더니 독 하나를 잡고 아래를 들추어 보고서는, "아이고, 바닥은 또 뚫렸네."라고 하더니 혀를 차면서 가버렸답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의 상당수는 이런 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좌파', '포퓰리스트' 등 마음대로 딱지를 하나 붙여놓고는, 그 기준에 안 맞으니깐(맞을 수가 없죠^^) '얼치기 좌파' 등으로 다시 비난하는 식입니다. '진보정치인'이라는 말은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진보를 주장하는 많은 분들은 '진보'의 개념을 하나의 틀에 꼭 묶어 두고는 노대통령의 모습이 그 틀에서 벗어날 때 마다 '배신자','신자유주의자'라는 식으로 비난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그렇게 단순하게 규정할 수 있는 정치인이 아닙니다. 제가 파악하기로는 노무현대통령은 진보주의자인 동시에 시장주의자였고, 법률가였습니다. 이런 여러가지 측면을 두루 고려해야 노대통령을 이해할 수 있고, 또 의미 있는 비판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노대통령님의 여러 면 중에서도 법률가로서의 모습이 가장 덜 알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시민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 할 법률가들이 노무현대통령을 미워하고 비난하느라, '법률가 노무현'을 외면하고 감춰왔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족하나마 저라도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 지난 5년을 찬찬히 돌아보려고 합니다.
1. 상대주의
앞의 글에서도 간략히 말씀드렸지만, 노 대통령은 법학공부를 하면서 상대주의 철학을 익히게 되었다는 말씀을 하신 바 있습니다. 제가 그 말씀을 처음 본 것은 어느 인터뷰였는데, 그 인터뷰는 끝내 찾지를 못하고 다만 비슷한 내용의 기고문을 찾을 수 있어서 관련부분을 소개합니다.
저는 고시합격을 위해 유신헌법을 공부했습니다. 한때 이 일을 부끄럽게 생각했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유신헌법 책을 쓴 학자들도 민주주의의 원리에 관하여는 소상하게 써놓아서, 민주주의를 받치고 있는 상대주의 철학을 접할 수는 있는 기회를 저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은 일생동안 저의 생각을 지배하는 철학이 됐습니다. 저는 이것을 참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2007.2.17. "대한민국 진보, 달라져야 합니다 " 중)
노무현 대통령의 상대주의철학, 상대주의적인 태도가, 노 대통령이 경직된 이념을 벗어나 유연한 진보를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2. 절차
법학은 상당부분 '절차'에 관한 학문입니다. 흔히 절차법이라고 하는 소송법은 물론이고, 그 외의 법들도 다툼을 해결하고 문제를 풀어가는 절차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습니다. 법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올바른 절차'에 대해 늘상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물론 많은 법률가들은 생각만 하고 실천은 잘 안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서는 절차를 중시하는 성향이 아주 강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정해진 절차를 준수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 한 편으로는 합리적인 절차를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임기초에 디지털TV 전송방식이 한창 문제될 때의 일입니다. 신학림 언론노조 위원장은 노무현 대통령을 접견한 자리에서 디지털TV 전송방식에 대한 결단을 직접 내려달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이라고 하나하나 개입할 수 없다. 정책결정에는 프로세스가 있다. 이미 추진 중인 정책을 대통령이 뒤엎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대답합니다(2003.10.1., 오마이뉴스).
저는 노무현 대통령의 이런 점을 특히 존경합니다. 최고 결정권자로서는 구체적인 정책결정내용에 개입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훌륭하고 힘든 결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지시하고, 그대로 밀어붙이면 당장은 편하지만, 더 많은 후유증이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정책결정과정을 단순히 정부의 기존 시스템에 맡겨 둔 것이 아니라 그 시스템 자체를 세우고 다듬기 위해서 노력했기에 노 대통령님을 더욱 존경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단순히 '프로세스'를 핑계로 신학림 위원장의 요청을 외면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합리적인 절차를 통해 디지털TV 전송방식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 해 12월의 어느 국무회의에서 노대통령은 아래와 같이 주문합니다.
노 대통령은 “지금부터라도 정통부가 다른 부처의 협력을 받아 활발하게 대화하면서 합리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프로세스를 만들어달라”며 “대화한 결과를 1월 중 보고해달라”고 지시했다고 윤태영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2003-12-31, 한겨레)
이날 국무회의에서는 KBS에서 요구한 전송방식 비교시험을 받아들이겠다는 결정도 내려졌습니다. 이후 정통부를 중심으로 합의의 틀이 만들어지고, 7개월 뒤에는 디지털TV 전송방식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집니다. 정부, 방송사, 언론노조 등이 함께 참여한 뜻 깊은 합의였습니다. 디지털TV 사례는 방폐장 사례와 함께 참여정부가 어떻게 합리적인 절차를 만들고, 이를 통해 사회적 갈등을 해결해왔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3. 절차(2)
노무현 대통령의 법절차에 대한 존중이 강하게 드러난 사례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대통령 탄핵 때의 일입니다. 부당한 탄핵에 많은 국민들이 분노했고, 열린우리당 국회의원들은 온몸으로 탄핵을 막아 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국회의원들에게 탄핵을 몸으로 저지하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당시 TV토론에 나온 유시민의원은 이번 탄핵의 경우에는 다수결원칙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대강 아래와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
"다수결의 원칙에도 예외가 있습니다. 게임의 룰에 관련된 경우, 상대방의 존재근거를 말살하려는 경우에는 무조건 다수결에 맡겨둘 수 없습니다."
저는 유시민의원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옳은 경우에도, 우리 생각만을 고집하지 않고 의사결정의 절차에 따르자는 것이 노무현 대통령의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노무현 대통령이 말씀해 온, 상대주의이고 법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절차를 존중함으로써 당장은 잘못된 결론이 나올지 몰라도, 그렇게 만들어진 대화와 합의의 전통이 나중에는 더 큰 힘이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4. 시간 많은 밤에 적으려다 보니 좀 힘이 드네요;; 오늘은 여기서 마치고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드리겠습니다. '법률가 노무현'에 관한 이야기는 한 번만 더 하면 끝날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는 참여정부에서 일어났던 법관련 문제들 - 관습헌법, 탄핵 등 - 에 대한 생각을 적어볼까 합니다(못쓰게 될지도 몰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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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레고, 사람 사는 세상(www.knowhow.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