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_김부자_모정의 세월
시를 쓰시던 어머니
書.정호승
내가 시를 쓰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어머니 덕이다.
나는 시의 모든 것을 어머니한테서 배웠다.
대구 계성중학교 2학년 때 김진태 국어 선생님한테
숙제로 써간 시를 잘 썼다는 칭찬을 받은 이후.
나는 시에 대해 막연한 호기심만 있을 뿐 시가 무엇인지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 것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교내 백일장에 나가 "등불"이란 시로 장원을 하기도 했으나
내가 왜 장원이 되었는지 나 자신은 잘 몰랐다.
당시 미션스쿨인 계성중학교에서는 부활절이나 추수감사절 같은
절기 때는 물론 매달 학생들의 문예 작품을 공모해서
입상자에게 교내 매점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상품권을 주었다.
상품권이라고 해봐야 흰 종잇장에 100원. 200원이라고 쓰고
학교장 도장을 찍은 것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나는 늘 그것이 탐이 나서 매달 시를 응모했다.
그리고 매달 입상돼서 그 상품권으로
교내 매점에서 빵도 사 먹고 학용품도 사곤 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매달 상품권을 타먹는 재미.
그 재미 때문에 나는 시에 대해 약간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인간에게 시가 무엇인지. 왜 시를 써야 하는지
(실은 지금도 잘 모르지만)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도 고민하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중학교 3학년 때인지 고등학교 1학년 때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우연히 부뚜막에 놓여 있는 어머니의 시작노트를 보게 되었다.
가계부용으로 쓰이는 어머니의 작은 수첩을 뒤적거려 보다가
거기에 씌어 있는 어머니의 시를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가네 가네 한 여인이 풍랑 속을 가네
비바람 세파 속을 헤치며 가네
기우뚱기우뚱 풍랑은 쳐도
그 여인 어머니 될 때 바람 잦으리.
어머니는 이와 같은 소월의 민요조 같은 시를
뭉텅한 연필 글씨로 수십 편이나 써 놓으셨다.
콩나물 얼마, 꽁치 몇 마리 얼마 하고 써놓은
가계부 한 귀퉁이에다 어머니가 남몰래 써놓은 시들은 충격적이었다.
어머니가 시를 쓴다고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놀라움이었다.
당시 우리 집은 몹시 가난했다.
살고 있던 본채를 다른 사람에게 세주고
우리는 닭장이 있던 곳에다 두 칸짜리 슬레이트집을
지어 나왔을 때였다.
은행원이었던 아버지가 퇴직금으로 여러 가지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는 바람에 갑자기 가계에 빚이 늘어 궁여지책이었던 것이다.
연탄아궁이가 있는 곳에다 임시방편으로 만들어 놓은
부엌으로 늘 어머니가 허리 굽혀 드나드시던 일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안방에 딸린 제대로 된 부엌을 사용하다가
그것을 남에게 세주고 그 옆에 옹색하게 간이로 만든
부엌을 사용하시게 된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어머니는 가난한 생활의 고통을 시를 통하여 이겨내고자 하셨다.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죽기보다 더 힘들어 남몰래
시에 의지하고 계셨던 것이다.
당시 생활비 마련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머니는 일수를 얻어서라도 우리 형제의 등록금을 마련해 주셨다.
일수란 목돈을 빌려 쓰고
매일 얼마씩 푼돈으로 갚아 나가는 것을 말하는데,
그때 우리 집을 찾아오던 뚱뚱한 일수쟁이 영감님의
사람을 깔보는 듯한 무표정한 모습을 나는 잊지 못한다.
오죽하면 내가 어느 시에서 보름달을 일컬어
"일수쟁이 얼굴같이 살찐 달"이라고 표현했을까.
어머니는 그 영감님만 대문으로 들어서면 안절부절못하셨다.
줄 돈은 없는 데 매일 사람이 돈 받으러 찾아오니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 일을 어떻게 다 견디셨을까.
어머니는 당신이 쓰신 시를 내게 보여 주신 적은 없다.
시를 쓴다고 말도 한 번 하신 적이 없다.
그저 시를 쓰는 나를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셨다.
당신이 직접 시를 씀으로써 아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신 것이다.
시가 무엇인지 왜 써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학교에서 상품권 타 먹는 재미로 시에 대해
잔뜩 호기심만 가지고 있던 나는 그때부터 시에 대하여
진지한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장차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그 후 어머니보다 더 열심히 시를 쓰게 만들었다.
어머니의 시는 가난의 고통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의 시이자,
절망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갈망의 시들로
아직도 내 가슴에 각인돼 있다.
지금 내가 쓰는 시들도 어쩌면 어머니의 시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시는 내 삶의 절망과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한 방편이다.
나의 시 속에는 예전에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고통을 견디고 이겨내는 오솔길이 있다.
그렇다.
어머니는 내게 있어 하나의 자연이다.
시는 자연을 모태로 한다.
내 시의 출발점은 어린 시절에 체험한 자연의 마음이다.
자연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누구나 시를 쓸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런 자연의 마음을 어머니를 통해 배우고 이해하게 되었다.
어머니한테는 그 모든 자연의 눈물이 있었다.
지금도 내 가슴속에는 어머니가 가꾸시던 꽃밭이 그대로 살아 있다.
어머니는 가난 속에서도 늘 꽃을 가꾸셨다.
어머니가 가꾸시던 우리 집 꽃밭에는 장미, 다알리아,
채송화, 분꽃, 봉숭아, 달맞이꽃, 수국 등의
꽃들이 겨울이 될 때까지 늘 그치지 않고 피었다 지었다.
어머니는 특히 석류나무를 좋아하셨다.
가을 햇살을 견디지 못하고 기어이 석류가
그 붉은 속살을 부끄러운 듯이 톡 드러내 놓으면
어머니는 그걸 따다가 안방 한구석에다 걸어 놓으셨다.
가끔은 간식거리가 없는 우리 형제들에게 보석 같은
석류를 먹으라고 내어 놓기도 하셨고, 석류나무 앞에서
가끔 사진도 찍으셨다.
옥색 치마저고리를 꺼내 입고 한 손으로 살며시
나뭇가지를 잡으시고 마치 새색시처럼 부끄러운 미소를 띠며
사진을 찍으시던 모습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어디 그뿐인가.
어머니는 눈 내리는 밤의 아름다움도 가르쳐 주셨다.
크리스마스이브 날 밤, 교회에 다니시던
어머니를 따라 새벽송을 돌면 함박눈은
왜 그리 펑펑 쏟아지던지, 다음날 아침이면
나는 어머니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기도 했다.
우리의 인생이 눈사람과 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워지기를 기원하면서.
그러나 이제 늙으신 어머니가 가꾸시는 꽃밭은 없다.
어머니와 만들던 눈사람도 없다.
어머니 인생의 꽃밭에 있는 꽃들은 모두 시들어버렸다.
석류나무 아래에서 찍은 옛 사진을 꺼내 놓고 보면
세월이 흐른 만큼이나 어머니의 모습은 변해 있다.
어머니는 흑백 사진 속에서만 영원히 젊을 뿐,
지금은 허리마저도 꼬부장하고 걸음마저도 활발하지 못하다.
틀니를 빼고 혼곤히 잠들어 주무시는 모습을 보면
입 주위가 유난히 합죽하고 키가 더욱 줄어든 것 같아
문득 눈물이 고인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나를 시인으로 키우셨다.
시를 통하여 인간의 인내와 사랑을 깨닫게 해주셨고,
자연과 인생의 비밀을 엿볼 수 있게 해주셨다.
지금 가난한 어머니의 시작노트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지만,
어머니 또한 더 이상 시를 쓰는 어머니가 아니지만,
내 마음속에는 아직도 부뚜막에 있던 어머니의 그 시작노트가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것은 아마 아들인 내가 바로 어머니의 시작 노트이며,
어머니가 평생을 두고 쓴 시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