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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드 테페스와 에르체베트 바토리

이희재 |2008.05.19 15:25
조회 299 |추천 0

 

 

블라드 테페스. (1431 ~ 1476)

 

현 루마니아에 속하는 고대왕국 왈라키아 공국의 영주이며 드라큘라의 모델이기도 하다 사람들에게 널리널리 퍼져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그에 대한 잔인함은 미치광이 살인마라고 생각할 정도로 잔인하다.

 

특히 알려진게 꼬챙이로 사람을 찔러죽인다는 것인데, 실제로 1456년에서 1462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에 블라드 테페스는 4만명을 긴 꼬챙이에 꿰어 처형했다고 한다.또한 끝이 뾰족하면 꼬챙이가 빨리 뚫고 나와 일찍 죽는것을 막기위해 끝이 뭉퉁한 꼬챙이로 밑에서 부터..; 찔러 걸어두면 천천히 사람의 무게에 의해 찔려들어가 피범벅이 되어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의 모습을 블라드 테페스는 식사를 하며 즐겼다는 이야기다.

 

꼬챙이에 찔린 시체앞에서 식사를 하는 블라드 테페스

 

이것은 적군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사람은 모두 처형하거나 꼬챙이에 찔려죽이게 했고, 그의 잔인함은 날이 갈 수록 더해져 그를 따르는 병사들까지도 학살했다고 전해진다.

블라드 테페스는 1476년, 터키군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아군에 의한 죽음이라고도 전해진다.

 

 

 

그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또 한가지 사례로

터키 대사의 모자를 못으로 머리에 박아버린 사례이다. 

 그 사례는 이러하다.

 

터키에서 외교 대사가 오게됬는대 블라드 테페스는

그가 쓰고있는 터키모자를 궁전안에서는 벗어 달라고 요구하였고 터키대사가 이를 거절하자.

블라드 테페스는 터키대사의 모자를 머리에못으로 박은 다음 콘스탄티노플로 보냈다고 한다.

 

 

그가 이렇게 잔인한 모습을 보인 이유로 알려진것이 오랜전쟁으로 인한 가족의 죽음(블라드 테페스의 부모는 전쟁당시 꼬챙이에 찔려 죽었다고 한다.)에 슬픔을 못이겨 미쳐버렸다. 라는 추측과 또 한가지로 적군을 위협하고 국민의 단합을 위해서 강압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수단으로 잔인한 처형방식과 그것을 즐기는 악귀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추측이 있다.

 

 하지만 이런 그에 대한 어떠한 자료에서도

그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이며 인간의 피를 마셧다는 내용은 찾아볼수없다.

 

 

 

 

 

 

 

에르체베트 바토리. (1560 ~ 1614)

 

트란실바니아(현재 루마니아 서북부의 고원지방)에서 가장 유서깊고 부유하며 영향력있는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바토리 家는 유럽 제일의 합스부르크 家와 비견될 정도의 명문가로 집안엔 군주나 추기경도 있었고, 사촌은 헝가리 왕국의 수상이었다. 가장 유명한 친척은 숙부인 이스트반 바토리 1575년부터 1586년까지 트란실바니아의 군주였으며 폴란드의 왕이었다.

 

바토리는 4~5살 경 극히 심한 발작을 일으켰다고 한다. 일종의 간질 발작이거나 기타 다른 신경 계통 질환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훗날 그녀가 저지를 끔찍한 범죄 행위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바토리 家는 자신들의 재산이나 영지를 잃지 않기 위해 근친 결혼을 많이 했는데.

15살 때 바토리는 피란체 나다스디 백작과 결혼을 한다.

당시 백작의 나이는 26살이었고, 특이하게 남편이 아내의 성을 따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란체 백작은 매우 용감한 성격이었으나,

그성격이 너무 잔인하여 터키 사람들은 그를 무서워하고 두려워 하며,

"Black Hero of Hungart (헝가리의 검은 영웅)"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다.)

 

피란체 백작은 워낙 전쟁을 좋아했던 관계로 바토리와는 거의 떨어져 지냈다. 바토리는 남편이 전쟁터에 나가있는 동안 백모가 가르쳐준 채찍다루는 기술을 연마하고, 토르코라는 하인에게 신비주의 악마숭배등을 전수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후 1585년 딸 안나를 낳았고. 그후 카트리나와 오르소 외아들 폴을 낳았는데 이기간동안 바토리는 수시로 젊은 하녀들을 고문했다고 한다.

 

1604년 남편 피란체 백작이 51세의 나이로 전장에서 전사하자 바토리는 본격적으로 악마숭배에 빠져들어 처음에는 말이나 기타 동물들을 제물로 사용하여 목욕을 했지만 나중에는 젊은 처녀들을 죽여 그 피로 목욕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후 그녀는 "귀족 여학교"를 설립해 한번에 25명씩 학생을 받아서 고문을 해 죽이고 피로 목욕을 했는대 이로인해 바토리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고 학교에서 탈출하는 학생이 생김으로써 바토리의 이러한 잔인한 행동은 정부당국에 알려졌고 마트야시왕은 바토리의 사촌이며 그지방의 영주인 데르듀 투르즈 백작에게 진상을 조사하라고 명했다.

 

1610년 12월 30일 성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간 조사팀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온몸에 피가 모두 빠져버린 젊은 여자 시체

꼬챙이에 찔린 채 아직 살아있는 여자도 몇명..

지하실에는 온갖 종류의 고문기구와 만신창이가 된 젊은 처녀들이 수두룩 했다.

 ( "철의 처녀"

좌우로 펼쳐진 문에 다섯개의 칼날이 있다.

인형의 몸안에 갇힌 여자는 칼로 전신을 찔려 뼈가부서지고 처녀의 온몸을 사정없이 찌르면서 피를 뽑아낸다 그피는 인형안의 홈을 따라 흘러 바토리의 욕조로 쏟아지게 되어있다)

 

게다가 성주변을 파보니 여자 시체가 50여구나 나왔다.

 

 

 

 

재판은 1611년 열렸지만, 정작 바토리는 재판에 참석하지도 않았으며,

유무죄에 관해서도 일체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후에 바토리에 일기가 발견됬는대 바토리는 모든 것을 일기에 써서 기록 했고.

그 일기에 있는 숫자를 근거로 612명이 살해됬다는것이 알려졌다.

이를 도운 모든 집사 하인들은 사형을 당했지만.

정작 바토리만은 오로지 귀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목숨을 건졌다.

(법적으로 귀족은 처형할 수 없었다고 한다)

 

 바토리는 그 대신 체이터성 탑 꼭대기에 감금 되었는대.

가금4년만인  1614년 8월 말,

54세의 나이로 엘리자베스 바토리는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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