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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은 없되, 진보는 살아있다.

박민진 |2008.05.20 14:37
조회 55 |추천 0

 

 

 

 

1. 제목 : 

(7인 7색) 21세기를 바꾸는 교양 

 

2. 저자 :

박노자, 한홍구, 홍세화, 하종강, 정문태, 오지혜, 다우드 쿠탑

 

3. 출판사 / 쪽수 / 초판연월일 :

한겨례신문사 / 275p / 2004년 6월 30일

 

제목 : 교양은 없되, 진보는 살아있다.


 한국에서 교양은 없다. 교양이란 사회의 다양한 문화를 통해 얻는 마음의 지식인데 한국에서의 교양은 부와 명예를 갖기 위한 도구로 쓰인다. 오히려 아름다운 그녀와 고급 레스토랑에서 칼질하는 것이 교양이라면 오히려 귀엽게 봐줄 수 있다. 상식을 공부하는 시대에 무슨 말을 더 할까. 공무원이 되기 위해 혹은 대기업을 가기 위해서 오늘도 도서관에서 교양을 쌓는 교우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답답해진다. 서글픈 학문적 고뇌가 목적이 희미해질 때 우리 학생들의 얼굴에는 그늘만 가득해 질뿐이다. 보여 지기 위한 학문을 하는 이 사회에서 교양을 찾는 것 자체가 왕따를 당할 만한 짓임에 서글프다. 내 레벨을 높여 좋은 회사에 취직하는 교양 따위가 아닌 세상이 돌아가는 것 자체를 이해하는 인생으로서의 교양을 쌓길 원하는 욕구는 명백하다.


 <21세를 바꾸는 교양>이 저술된 의도는 한마디로 사회의 다양한 계층의 인사들에게 그들의 삶을 들어보고 왜곡된 문화를 바로잡으며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라 생각된다. 진정 진실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들이 무너짐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것은 교양이 아닌 진보였다.


오리엔탈리즘의 악습.

 오리엔탈리즘은 내가 알고 있기로는 동양의 미학이었다. 한마디로 동양의 사상을 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회적 관점으로 볼 때 오리엔탈리즘은 무조건적인 우월문화에 대한 동경과도 같은 것이다.  그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생각해보면 우월한 문화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 장점과 단점을 모두 흡수해 발전과 함께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동반하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귀화한 교수 박노자는 외국인의 입장에서 한국의 무조건적인 오리엔탈리즘과 그것이 다시 아시아에서 동남아시아 빈민 국가로 악습 되는 것을 보고 쓴 소리를 날린다. 그게 우리 사회의 오리엔탈리즘의 현주소다. 근대적인 것을 무조건적으로 추구하는 오류는 진보와 퇴보를 구분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진보를 서구의 문화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동일시하는 태도는 일시적인 한국을 진일보하는데 크게 기여했지만, 그 이면에는 부정적인 면을 다량으로 포함하고 있기에 서구를 더 이상 뛰어넘지 못하는 딜레마를 가지게 한다. 그것은 오리엔탈리즘의 복제다. 미래에는 중국이 세계의 패권을 잡게 될 것이라는데 과연 그것이 진정 실현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는 그 누구도 속 시원히 대답할 수 이유는 것은 중국이 가지고 있는 무조건적인 오리엔탈리즘으로 추론한다. 다른 아시아 국가도 마찬가지다. 한국도 서구의 것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경향이 강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고 동남아에 미국이 우리에게 했던 것처럼 한국도 그들에게 우월적 존재로서 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자본적인 측면에서의 있고 없음인데 그것을 마치 민족의 우월성으로 해석하여 나라와 나라의 악습을 반복하는 것이 문제이다. 자본주의가 몰락하지 않는 이상 이 경제력에 의한 오리엔탈리즘이 멈출 리가 없다. 허나 이 자본주의를 문제시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면 근대성이 가지는 오류에 우리가 놀아날 리는 만무하다. 이제는 아시아의 시대다. <앨빈 토플러의 부의 미래>에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의 지식경제가 세계를 장악할 것임을 명시한다. 그 조건에는 정보를 걸러내는 능력이 함양되어야 한다는 것을 빼놓지 않는다. 한국은 무조건적인 근대(서구)의 것에 놀아날 만큼 약한 국가가 아니다. 이제 미국을 넘고, 분단의 조건을 넘어 심기일전해야 할 때이다. 진보를 모른다면 진정한 진보에 대해서 공부할만한 인재를 기르는데 모든 것을 집중해야 할 우리다.


한국사의 인식

 치욕의 한국사라고 한다. 영광의 한국사라고도 한다. 그런 말들로는 한국의 역사는 우리에게 솔직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역사만큼 투명해야 하는 것도 없는데 우리는 감추고픈 건 감추는데 급급하고, 내세우고픈 건 너무 열을 내 오버한다. 개관적으로 역사를 바라보려는 시도는 온데간데없고, 역사학자들과 같은 지식인까지 포장의 기술에 능숙하다. 월드컵 4강은 계속 떠들어대는데 올림픽 축구 예선탈락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꼴이다. 좋은 것만 내세우니 반성이 없다. 단점이 사라지니 피드백조차 불가능 하다. 한홍구 교수가 가장 애석해하는 점은 이런 우리 국민의 과잉의 한국사랑 때문에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함에 있다. 일제시대를 겪으며 당했던 핍박과 위안부와 같은 역사적인 고통에 대한 발표는 시도 때도 없이 해대면서, 가장 반성하고 연구해야 할 부분인 친일문제와 민간인 학살에 대한 사건들은 쉬쉬하고 덮어두려 한다. 한국은 피해자라는 것을 알리는 데만 급급하지 왜 그런 상황에 처해졌고, 우리가 반성해야 할 부분을 덮어버리는 한국의 모습은 멍청하기 짝에 없다. 그리고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런 고난의 세월을 겪어 왔기에 지금에 이르러 OECD 국가로서 경제 강국이 됐다고 선전한다. 허나 한국이 미국의 거의 모든 무력전쟁에 참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교과서에는 백의민족이락 써놓고는 미국의 석유쟁탈전에 돌격기동대로 참가하는 현실인 셈이다. 베트남 전쟁 시의 한국군인의 학살사건을 아는 이도 많지 않다. ‘노근리 사건’에서 무참하게 살해당한 피난민들의 모습도 이제는 잊혀진지 오래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찌 이렇게 된 것인가. 언제부터 다른 나라의 명령에 이리도 잘 따르던 정부인가. 올바른 것이 무언지 알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못하는 한국의 현실이 한홍구 교수가 지적하는 가장 큰 문제점이다. 미국이 우리 민족을 무시한다는 것에만 분노하고 미국의 침략전쟁에 자랑스럽게 우리 군인을 파병하는 현실을 살아야 하는 우리가 안타까울 뿐이다. 정부의 이 같은 기형적인 눈치싸움은 국민 개개인의 고민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실을 알고, 그것을 오픈시켜 제대로 된 역사의식을 함양할 때 비로써 올바른 민족적인 마인드가 갖춰질 것이다. 아직도 일본에 대한 콤플렉스로 축구를 보고 있는 많은 분들에게 권하고픈 이야기다.


한국인의 진보적 삶.

 진보적으로 산다는 것은 이 사회의 사상과 철학을 공부해야 함을 뜻한다. 물질적인 것에 구속되지 않고,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의 활력을 찾아내는 것을 뜻한다. 그에 반하는 보수는 변화보다는 현재의 내실을 택하는 쪽이기에 진보와 충돌하다. 그것이 국회에서는 여야가 되는 것이고, 국민들에게는 지속된 고민거리로 남는다. 과연 한국에서 진보적으로 사는 것은 무엇일까? 한국의 기업공화국이다. 저자는 계속해서 개개인의 변화를 촉구하지만 그것이 와 닿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한국의 진보는 기업들에게 중심이 맞춰진 상태이고, 신자유주의 실패로 정부의 위신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정당을 뒤로한 대통령은 기업에게 고개를 숙이며 그들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 정부의 정책이 아닌 기업의 정책을 펼친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기업들의 헤게모니가 국민들을 진정한 진보란 무엇인지 잊게 만들었다는데 있다. 기업이 중소기업과 청년 구직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다보니 정부는 일자리 창출에도 애를 먹는다. 기업이 추구하는 인사고과가 이 나라의 중심적 학문으로 자리를 잡아버리자 국가의 진보를 위한 움직임은 점차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앞에서 본 한국사와 오리엔탈리즘의 악습은 이 진보라는 것이 해답이다. 국민적으로 진실을 알고, 학문적인 열의를 통해서 진정한 진리를 추구하는 우리의 진보. 이 책은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서 진보를 추구하는 인간에 대한 동경심을 한마음 표현한다. 홍세화 교수가 제시하는 이에 우리 사회의 진보에 대한 해답은 개인의 발전밖에 없다고 말한다. 개인이 1인 기업이 되는 프로슈머의 개념을 설명코자 한 느낌을 풍기는데 그런 해답이라면 누구라도 제시할 수 있다는데서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가 기대하는 진보세력 정치인이 과연 그런 역할을 해줄지는 미지수이다. 홍세화 교수의 강연은 특권층에 대한 비판에만 날이 서 있을 뿐이지, 과연 그가 해답을 제시할 만한 현실적인 감각을 가졌는지 여부에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인터뷰를 읽고 있자면 현재 한국의 진보 정치인이 처한 상황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아 참담하다. 대표적인 진보 정치인 유시민이 처한 상황의 경우, 현재 자유방임을 추구하는 진보 정치인으로 분류가 되지만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지키는 일이 산을 오르듯 힘들어 보인다. 이번 민주신당의 경선에서 꼴찌로 사퇴한 것만 보아도 그가 진보 정치인으로서 그 태생적 한계에 얼마나 고심하고 있을지 안타깝다. 그도 글쟁이였다. 꽤나 괜찮은 글쟁이였다. 많은 진보정치에 대한 글을 써온 교수였다. 허나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자 할 때에는 따라주지 못했다. 그도 한국에서 해답을 가지지 못한 정치인이기에 설득할 수 있는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진보는 해답이 없다.


이 시대의 노동문제를 말한다.

 운동권이라 불리던 이들이 정치판을 장악하고, 드디어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작된다고 좋아했던 운동권의 그 청년들이 이제는 넥타이 부대가 되어 운동권 정치인들에게 뒤통수를 맞고, 소주에 삼겹살을 먹고 있는 현실을 하종강 노동전문가는 진보하고 있기에 안심하라 말한다. 이랜드 노조 사태를 보면 알듯이 우리시대의 노동운동은 사회에 민폐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그런 와중에 귀를 자극하는 소식이 얼마 전 들려왔다. KTX 여승무원 대량 해고사태가 얼마 전에 해결이 되었다. 그들이 단식투쟁과 길거리 행진으로 얻은 결과이다. 그들에게 보내진 성원은 언론을 통한 것이었고, 그것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이 진보의 결과인가? 그렇지만 협정 내용을 보면 눈을 한번 감게 된다. 그들이 요구가 반도 들어지지 않은 협상결과는 이 시대의 진보적 노동은 어디인지 모르겠다. 언론의 보도로 알려진 KTX 여승무원들이지만 그 영향은 일주일이상 가기 힘들었다는 것이 그들의 증언이다. 그 와중에 걸려온 KTX의 제안에 그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살길이었기 때문이다. 이랜드 노조는 아직도 파업 중이다. 우리의 인식이 너무도 개인주의화가 되어 더 이상 집단의 행동에 달가운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내가 아닌 일에 나서지 않는 이 사회를 개탄하는 내용만 가득한 하종강 씨의 강연은 홍세화 교수가 겪는 진보학자의 문제와 일맥상통함을 느끼는 부분이었다. 이 책의 제목이 교양보다는 진정한 진보가 되기 위한 지침서라 불러도 될 것이라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린 절대로 노동조합의 파업을 폭력적인 범죄로 몰아선 안 된다. 이 시대의 노동인구의 비율을 따져보자 내가 고등학교 졸업자의 3할이 노동자로 취업을 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대학을 가고, 그 대학 졸업생의 7할이 노동자가 된다. 내가 노동자이거나 우리 가족 중 한사람은 노동자라는 얘기다. 즉, 언제 어느 상황에 내가 파업을 참가할 수 있다는 점을 모르고 있다. 왜 이랜드 사태에 관심을 갖지도 않으면서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는지 모르겠다. 저 붉은 머리띠를 맨 사람이 내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현재 한국 노동환경은 세계 최악이라는 점을 왜 잊고 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 시대의 노동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지 않고는 진보란 없다고 말한다.


가깝고도 먼 한국과 전쟁의 괴리.

 유일한 분단국가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전쟁은 과연 가까운 것인지 묻고 싶다. 이 강연의 주인공 정문태 기자는 국제분쟁 전문기자라는 생소한 호칭으로 활동 중이다. 장장 17년의 세월동안 그가 느낀 점은 한국은 전쟁과 무관한 나라 같다는 점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렇다. 전쟁은 남의 일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보니 아예 언론사는 전쟁기자를 키우지 않는다. 한국의 언론은 기행문이나 일기와 같은 신변잡기 위주의 기사만을 보도한다. 그러니 더욱 우리는 전쟁과 멀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07년 10월의 2일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다시 개최되었다. 2박 3일 동안 노무현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평화 의지를 확인했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 기사가 언론에 타는 순간 한국 사람들은 전쟁과 더 멀어지게 될 것이다. 협상 하나가 우리를 좌지우지 할 만큼 큰 것이라 인식하는 것은 위험하다. 정문태 기자는 그 허점이 전쟁의 무서움이라 말한다. 아무도 모르는 순간에 들어와서 우리의 삶을 앗아갈 그것. 우리의 관심이 요구된다. 그의 말투는 진실했다.


딴따라를 말하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개봉한 2001년 가장 작품성 있는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해외 영화제의 단골손님이 되었고, 마니아도 많았다. 하지만 돈은 벌지 못했다. 돈을 벌지 못했다는 것은 배우 오지혜 씨가 대중영화로서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어찌 보면 예술 하는 사람으로서 섣부른 말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은 경고이다. 극단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대중문화에는 최소한 수익성이 없다면 의미가 사라진다. <디 워> 논란에서 보듯이 예술은 작품성과 수익성을 모두 가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데 <디 워>가 돈을 가져갔다면, <와이키키>는 작품성을 가져간 케이스다. 이 양면성은 모든 예술인들이 고민하는 너무도 진부한 문제다. 거론하는 것조차 지리멸렬할 정도로 말이다. 요즘은 작품성보다는 수익성을 선호한다. 완전한 비즈니스가 되어버린 이 시대의 예술. 그것을 지적하고픈 오지혜 씨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쏘아댄다. 그녀는 말한다. 프로파간다의 힘을 가진 대중 예술인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엔터테이너도 중요하지만 예술적 정신을 숭고이하는 ‘와이키키’같은 예술인이 필요하다 말한다. 연극이 영화의 10분의 1의 수익을 주지만 작품의 의미에 모든 것을 거는 스타가 필요하다 말한다. 그 영웅의 프로파간다가 대중을 자극할 수 있다면 수익성에 치우치는 현재의 구조를 타파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당연히도 대중도 다양성을 존중해주는 수준 높은 문화적 식견을 갖추길 희망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딴따라는 관심이 필요하다. 예술이 엔터테인먼트가 되는 순간의 고민이 신날하게 들려온다.


 7인이 추구하는 서로 다른 문화와 충돌했다. 부족하다 느껴지는 부분도 분명히 있고, 머리만 아프게 고민이 늘어난 부분도 있다. 그리고 그 문화에 적응하여 기분이 신나는 부분도 존재한다. 하지만 상식이라는 이름보다는 진보라는 이름을 이 책에 붙여주고 싶다. 앞으로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그 진보 말이다. 사회의 각 분야에는 잘못된 인식이 만연하다. 특히 노동에 대한 하종강 씨의 강연은 반성만을 할 수 밖에 없는 나를 발견한다. 난 언제부터인가 돈 때문에 가로막혀 자신을 구속하고 사시는 우리 부모님을 잊고 있던 것 같아 순간 눈물이 돌았다. 충격이었다. 하루하루 지리멸렬한 삶에서 나는 조울증에 걸릴 듯하다. 과연 좋은 직장에 취직하면 행복한 삶이 올까 생각해 봤지만, 점점 그 물음에 대답을 시원히 할 수가 없다. 세상의 진보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세상 한번 태어나 멋지게 살고 싶다. 조금 유치하지만 과감하게 옮은 것을 배우고, 옮은 것을 실행에 옮기는 젊은이가 되고 싶다. 내가 프로파간다가 될 수 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그런 면에서 이 세상이 주는 진리를 친절히 설명해준다. 때로는 차분하게 때로는 강하게 내 머릿속을 뒤흔들며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열변을 토한다. 이제 내가 힘을 보탤 차례인 듯싶다. 벽돌 하나를 쌓아 줄 것이다. 내일이면 잊을 그런 것이 진보는 아니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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