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맨홀’이라는 일본 만화를 봤다. 기생충을 다룬 공포 추리물이었는데 내용은 이렇다. 일본 어느 도시에 어떤 사람이 벌거벗고 돌아다니다 죽는다. 알고 봤더니 기생충에 감염됐는데 이 기생충은 뇌의 특정 부위에 침입해 그 사람의 ‘욕망’을 제거한다. 기생충에 감염된 사람은 먹고 싶어하지도, 성관계를 맺고 싶어하지도 않다. 알고 봤더니 누군가가 과거의 복수를 위해 그 기생충을 퍼뜨린 것이다. 그의 음모는 점점 커지는데….
기생충에 대한 꽤 과학적인 묘사와 상상력에 푹 빠져 3권짜리 만화를 집으로 가는 버스 안과 집 앞 가로등 아래에서 다 읽었다(집에 가면 오자마자 만화 본다고 잔소리할까봐). 만화를 다 읽고 나니 기생충을 자신의 뱃속에서 기른 실제 일본 의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1999년 국내 신문에 처음 소개된 이야기다. 일본 도쿄의과 치과대 후지타 고이치로 교수는 자신의 장 속에서 촌충을 3년이나 길렀다. 당시 촌충을 구하기가 어려워 그는 어시장에서 불결한 생선을 골라먹고 겨우(?) 촌충에 감염됐다고 한다. 촌충은 장의 길이보다 길어지면 항문을 비집고 나온다. 후지타 교수는 빠져나온 촌충을 조금씩 끊어 연구재료로 썼다. 후지타 교수는 당시 인터뷰에서 “기생충에 감염되면 좋은 점도 있다”며 “콜레스테롤과 체중이 준다”고 설명했다. 불필요한 영양과 지방을 촌충이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세기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가 너무 뚱뚱해지자 일부러 촌충에 감염돼 6개월 만에 105kg에서 55kg으로 몸무게를 뺐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기생충에 감염되면 알레르기 줄어
만화 속에서 악당은, 그 기생충에 감염된 인간은 동물적인 욕망이 제거되고 도덕적인 의지만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세상엔 강간도, 뇌물도, 도둑질도 없어진다고 역설한다. ‘팍스 패러사이타나(기생충에 의한 평화)’인 셈이다. 만화는 만화일 뿐이다. 그러나 사실 기생충은 현대 의학에서 꼭 나쁘거나 귀찮기만 한 존재는 아니다. 기생충을 이용해 병을 치료하거나 생명의 비밀을 푸는 연구가 활발하다.
기생충을 이용한 연구로는 단연 알레르기가 꼽힌다. 세계 여러 곳에서 벌인 역학 조사 결과 기생충 감염과 알레르기 질환의 수가 반비례했다. 예를 들어 가봉, 에콰도르, 잠비아 등에서 기생충 감염이 천식 증상을 완화한다는 보고가 있었다. 왜 기생충에 걸리면 알레르기가 줄어들까. 알레르기 반응은 면역 시스템이 지나치게 반응한 것이다. 기생충에 감염되면 면역 시스템이 기생충을 공격하느라 에너지가 줄어들어 알레르기도 함께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기생충 감염이 줄어든 1930년대 이후 면역체계의 과민 반응으로 생기는 장염과 크론병이 증가했다는 보고가 있다. 우리나라도 기생충 감염률이 떨어지면서 아토피 피부염이나 천식 등 알레르기 질환이 늘어났다.
과학자들은 면역글로블린E(IgE)라는 항체를 기생충과 알레르기의 연결고리로 의심하고 있다. 이 항체는 우리 몸에서 기생충을 공격한다. 동시에 히스타민의 분비를 촉진해 알레르기가 일어나게 한다. 즉 우리 몸이 기생충에 대항하기 위해 이 항체를 만들었는데 막상 기생충이 없으니 엉뚱한 것들을 공격하는 셈이다.
기생충으로 신약 만든다
그렇다고 알레르기나 대장염를 치료하기 위해 몸 안에 기생충을 달고 살기는 어렵다. 그 대신 기생충 연구는 신약 개발과 새로운 치료 기술로 이어진다. 기생충이 우리 몸에서 오래 살아남았다는 것은 우리 몸을 그리 손상시키지 않고도 면역 시스템을 피하는 기술이 있다는 뜻이다. 즉 기생충이 면역 시스템을 억제하는 물질을 분비하거나 직접 면역 세포를 죽인다는 것이다. 염증을 치료하는 약으로 가장 유명한 아스피린의 기초 성분은 처음에 버드나무 껍질에서 발견됐다. 2004년 4월 ‘면역학 회보’는 피 속에 기생하는 선충에서 염증을 억제하는 새로운 물질을 발견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기생충에서도 효과적인 염증 치료제가 개발될 수 있다. 과학자들은 기생충 신약이 기존 약보다 부작용이 훨씬 적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미 기생충으로 신약을 만드는 과학자들이 있다. 미국의 과학저술가 칼 짐머가 지은 ‘기생충 제국’에서는 십이지장충으로 알려진 구충에서 외과 수술용 혈액 희석제를 개발하고 있는 미국의 한 생명공학 업체를 소개하고 있다. 구충은 피를 빨아 먹기 위해 혈액 응고 단백질의 작용을 방해한다. 이를 위해 구충이 분비하는 물질을 약으로 개발하려는 것이다.
미국 아이오와대 조웰 웨인스탁 박사는 더 ‘엽기적인’ 약을 기생충에서 개발하고 있다. 아이오와대 의대 연구진은 1997년 궤양성 대장염에 걸린 환자 7명에게 동물의 장에 사는 기생충의 알을 몰래 먹였다. 이들은 기존 치료법이 전혀 듣지 않던 환자들이었다. 2주 뒤 기생충 알이 부화하고 유충이 태어나면서 6명이 병에서 나았다. 웨인스탁 박사는 이를 이용해 돼지편충알을 이용한 면역강화제를 만들었다. 돼지편충은 인체에 살 수 없어 알에서 깨어난 뒤 몇 주 머물다가 배설된다. 그 사이에 인간의 면역계를 자극해 항체를 많이 만들고 면역계를 안정시킨다. 물론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면역 기능이 크게 떨어진 환자들이 대상이다. 기생충은 결코 필요 없는 존재가 아니다. 기생충은 생태계의 균형을 조절한다. 지금은 ‘기생’으로 불리지만 사실은 인간과 서로 이익을 주고받으며 ‘공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생물의 성이 수컷과 암컷으로 나뉜 것은 기생충과 병균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는 진화 이론도 있다. 미래에는 기생충이 애완동물만큼 인간의 사랑을 받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