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신데렐라와 재벌 왕자의 전성시대다. 돈이란 초강력 무기를 지닌 현대판 왕자. 바로 재벌 2세들의 브라운관에 왕좌를 틀었다. 물론 그 주변엔 행복해지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한 신데렐라가 씩씩하게 자리 잡고 있다.‘발리에서 생긴 일’의 철없는 왕자 조인성과 ‘불새’의 화끈한 왕자 에릭,‘황태자의 첫사랑’의 거만한 황태자 차태현, 트렌디 드라마 뿐 아니라 주말 드라마‘애정의 조건’의 미국 유학파 엘리트 송일국 왕자와 아침 연속극 ‘청혼’에서 이혼녀를 죽도록 사랑하는 열혈 왕자 이진우까지 합세하였으니, 우리 시대 많은 재투성이 아가씨들이 불쏘시개 던지고 TV 앞에서 목을 빼며 왕자를 바라보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백마 탄 왕자님의 이야기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린 매일 아침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잠옷바람으로 TV에서 방송되는‘캔디’를 보며 일곱 살부터 신데렐라를 꿈꿔왔고, 명작 동화‘키다리 아저씨’때문에 닉네임을 주디로 바꾼 소녀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불황의 시대에 ‘신데렐라’를 꿈꾸는 것은 로또로 인생 대박을 노리는 심리와 다르지 않다. 게다가 덴마크의 왕세자 프레데릭과 섬처녀 메리 도널드슨, 할리우드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와 19세 웨이트리스 출신 앨리스 킴의 결혼, 약혼 소식은 뭇 처녀들의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남녀노소 한기주라는 남자에 빠지다
예전 드라마 속 재벌 2세는 능력도 없이 아버지 회사에서 이사나 기획실장 자리 하나 꿰차고 앉아 있기 일쑤였다.‘발리~’의 정재민 왕자는 넓고 깨끗한 책상에 다리를 올려놓은 채, 늘 수정에게 전화만 걸었다. ‘불새’의 서정민 왕자도 화재 현장에서 지은을 구할 때만 날쌨지 일 잘하는 장세훈에게 항상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황태자~’에서 부모 몰래 무위도식하는 망나니 황태자 최건희는 또 어떤가.
그러나 한기주는 경영 수업을 충실하게 받아 프로답게 일하는 능력 있는 재벌 2세란 점이 기존의 왕자와 다른 점(그의 일중독자에 가까운 모습은‘귀여운 여인’의 리처드 기어에 가깝다). 직원 식당에서 식사하는 소박한 재벌 2세는 너무 가식적이지 않느냐며 거절하는 모습은 오히려 현실성이 있다. 그러면서도 팍팍한 재벌가의 법도와 생활에 지쳐 일탈을 일삼는 반항적인 왕자와는 차이가 있다. 사고 치는 조카 수혁의 뒷수습을 해주며, 태영에게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뒤에서 조용히 해결해주는 그는 성숙한 어른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그가 잘생기고, 모든 것에 완벽하고 자상한, 퍼펙트 그 자체는 아니다.‘사랑을 그대 품안에’의 차인표처럼 오토바이에 색소폰까지 불며 완벽한 매력으로 포장한 트렌디한 왕자는 아니라는 것. 젠틀하지만 때론 막무가내인 카리스마에 2프로 모자람이 바로 한기주란 남자의 매력. 최민수식 카리스마와는 전혀 다른, 젠틀한 카리스마라고 해야 할까. 한기주는 강태영의 말대로 뻣뻣하고 냉정하고, 김이 서릴 정도로 서늘한 남자다. 그런데도 가끔 그가 하는 행동과 말은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태영이 카페에서 궁지에 몰리자 뿅 하고 나타난 박신양이 “우리 애기 놀란 거 안 보여요? 애기야, 가자”라고 말한 것은 장안의 화제가 됐을 정도. 방영 후 검색 포털 사이트에‘애기야 가자’가 검색 1순위에 오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 유머가 가슴에 새겨진 것은 박신양이란 배우, 또 한기주란 인물과 잘 매치되지 않는 어색함 때문일지 모른다.‘애기야, 가자’란 단어가 늘 와이셔츠 단추를 끝까지 꼭꼭 채우는 엄격한 재벌 2세의 입에서 나올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느끼하지만 귀여운 것. 그래서 우린 한기주란 사나이에게 빠져드는 것.
나도 왕자의 애기이고파
‘파리의 연인’은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인기 높은 로맨틱 드라마라는 점. 통상 드라마에서 남성 평균 시청률이 10%의 벽을 뛰어넘기란 쉽지 않은 일.
“기주는‘불새’의 서정민이나‘발리~’의 정재민처럼 겉멋 든 미남이 아니라서 좋아요. 눈에 띄는 미남도 아니고, 괜히 폼을 잡거나 오버해서 반항아인 척하지 않고 현실적이라서 애착이 가요. 재벌 2세란 설정만 빼면 평범한 샐러리맨의 모습이 있거든요. 대사가 닭살이다 싶은데도 썰렁한 코드가 은근히 남자들에겐 먹힌다는 것이죠.” (박기정, 30세, 건설회사)
‘파리의 연인’이 특히 드라마의 사각지대에 있는 30대 남자들의 지지가 두드러지는 이유는 여자들이 2프로 부족한 남자에게서 모성애를 느낀다면, 남자들은 그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명품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아무렇지 않게‘너 가져’라고 선물하는 모습에선 괴리감을 느끼지만, 찜질방 옷을 입고 뻘줌해하는 모습은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파리의 연인’에서 한기주가 큰 왕자,‘캔디’의 알버트 같은 캐릭터라면 이동건이 연기하는 한수혁은 테리우스 같은 존재다. 가방에 드럼채를 넣고 다니는 낭만적인 드러머. 전형적인 반항아 캐릭터지만 한기주가 젠틀남이라면 그는 연약하고 감성적인 보헤미안에 가깝다.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된 골격 중 하나는 바로 신데렐라를 둘러싼 삼각관계, 또는 그로 인한 갈등 구도의 전개에 있다.‘발리~’에서 정재민과 강인욱,‘불새’의 서정민과 장세훈,‘황태자~’의 최건희와 차승현. 이들은 모두 연적 관계임과 동시에 일에서도 라이벌 관계. 돈 있는 재벌 2세와 착하고 능력 있는 남자의 전형적인 구도다.
‘파리의 연인’은 이 전형적인 대결 구도에서 살짝 비껴나 있다. 수혁과 기주는 모두 태영을 사랑하지만, 서로의 질투심을 유발하는 유치한 신경전을 벌이지 않는다. 수혁은 자신을 키운 8할은 삼촌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정도로 삼촌인 기주를 좋아한다. 이들의 갈등 관계는 겉으로 내질러지는 과격한 형태가 아니라 속으로 삭이는 내적 갈등의 양상으로 전개된다. 애잔하게 삭이는 슬픔은 만화 같은 신데렐라 스토리의 시놉시스에 짠한 페이소스를 선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삼각관계가 나름 깔끔하게 전개되는 것은 바로‘파리의 연인’의 두 왕자가 성숙한 어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