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종된 세대
이명박 정부의 미친 소 파동을 지켜보면서 가장 놀랬던 것은 20대가 완전히 실종되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촛불 집회의 대부분은 10대들이었고, 자식들을 둔 주부들이었으며 87년의 6월 항쟁을 기억하고 있는 회사원들이었다. 그 어디에서도 대학생. 아니 더 나아가서 20대의 이름을 찾기란 어렵다. 지난주에 이루어진 이명박 대통령 지지율 조사에서는 3.40대가 10% 미만의 지지율을 기록했으나 20대는 그나마 평균 지지율과 비슷한 20여%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3,40대가 까먹는 지지율을 20대가 벌충해 준 셈이다. 나 자신도 20대 이지만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혼란스럽다.
20대의 보수화에 대한 이야기는 몇 년전부터 있어왔다. 하지만 그러한 흐름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작년 대선과 올해 총선이라고 해야한다. 전국 평균 투표율에 한참 못 미치는 투표율을 기록한 20대는 그 표의 절반 이상을 이명박과 한나라당에 던졌다. 개혁적 성향의 3,40대는 물론이려니와 보수적 경향이 뚜렷한 5,60대와 맞먹는 수치이다. 본격적으로 20대의 보수화에 대한 의논이 터져나온 건 이때부터이다. 인터넷에서 흔히 회자되는 ‘국개론’이 그 타깃을 20대를 향해 정조준 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지금 왜 20대가 보수화 되었는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88만원 세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세대가 택한 선택이라는 진단을 내놓는다. 우석훈 박사는 자신의 책 88만원 세대에서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 20대의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연예인이 없다고. 무기력한 20대는 뒤에서부터는 10대에 쫓기고 앞에서는 30대에게 박해받는다고 한다. 나는 이말이 옳다고 본다. 어느 순간부터 20대는 잊혀진 세대가 되어버리고 있다.
이렇게 된 원인을 많은 사람들은 IMF와 그 이후 등장한 신 자유주의체제에서 들고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단순히 20대가 사라지는 것을 이 이유 하나만으로 들 수 있을까. 나는 위의 세종대의 골육상쟁을 이야기하면서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기 위해서는 많은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게 됨을 증명했다. 지금 20대가 사라지는 것도 비슷한 이유라고 봐야한다. 단순히 이 문제를 3,40대가 처놓고 있는 ‘굴레’나 ‘사슬’로 해석하는 것은 20대 자신이 스스로를 다시 수동적인 굴레 안에 자신을 가두어 놓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지금의 20대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때 청소년 기를 거쳤다. 이시기는 IMF와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들어온 시기이기도 하지만 다시 말하면 인터넷이 전국에 본격적으로 보급된 시기이며 동시에 전국에 대학이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학부체제가 도입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것은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가.
능동에서 수동으로
대한민국의 공교육 체계는 말로는 인성교육 인성교육 하지만 결국 기계를 찍어내는 공장에 불과하다. 그러한 교육체제를 통과한 사람들이 제대로 된 사회인으로서 기능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군대가야 사람된다. 라는 말은 이 사회가 군대문화가 아니면 꾸려갈 수 없는 문화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회인으로서의 재교육을 담당할 수 있는 교육체계가 붕괴된 사회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체제에서 군대와 더불어서 사회화 교육을 담당하는 또 다른 구조는 바로 대학이었다. 인터넷이 전면 도입되기 이전의 대학은 지식의 전달통로이자 그 전달통로를 구현해주는 선배와 교수들이 밀집해 있는 공간이었다. 물론 대학을 통과하는 학생의 수는 적었지만, 그것은 전체 사회분위기와 직결되어있다. 지식인계층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전체 사회분위기가 결정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대학이 더 이상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갈 수 있는 ‘구조’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고등학교 졸업생중 80% 이상이 대학을 가는 현실은 대학이 큰 학문을 배우는 공간이 아닌 고등학교 4학년이 될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되게 만들었다. 이는 대학에 대한 인식이 그전과는 달라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대학에서 배우는 것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 질 수 있게 된 저변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학부제의 도입과 인터넷의 보급은 어떠한 사태를 낳았는가. 대한민국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시민’으로서의 사회화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능이 사라지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대학에 들어가도 지식을 배우고 사회화를 받을 수 있는 선배와 교수는 사라져갔다. 인터넷을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지식들의 향연은 당분간은 지식의 충족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은 즉흥적인 ‘시각의 향연체’에 불과하다. 인터넷으로 사회화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인터넷은 잠시 잠깐의 흥분과 감동을 안겨줄 수는 있어도 머리를 맑게 해주고 앞으로 무엇을 해나가야할 지를 깨닫게 해주는 능동적 사고를 주지는 못한다. 20대는 바로 그 인터넷에 매몰되어 버렸다.
20대는 인터넷을 가장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사용했던 소비자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것은 20대로 하여금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꿈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영원히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소년과 소녀가 되어버린 20대는 막상 IMF와 신자유주의 체제의 협공 앞에서 무기력하게 변해버렸고, 수동적으로 변해버렸다. 세대별로 뭉쳐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고? 2002년의 월드컵과 노무현 당선은 20대가 해내지 않은 것이었을까? 그때는 그렇게 잘 뭉쳤으면서 지금은 왜 이렇게 뿔뿔이 흩어져서 무기력하게 변해버린 걸까. 완벽하게 말한다면 그때는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지 않으려했던 사람들이 보인 일종의 유희였을 따름이었다. 지금의 20대는 그 초반에 들어서면서부터 단 한번도 강요받지 않았던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을 강요받고 있다. 실현해 보지도 않았고, 숙달되지도 않았던 그 요구에.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낭떠러지가 놓여져있는 그 구름다리 위에서 20대가 부들 부들 떨고 누구의 손이라고 잡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20대는 죽었다.
이것을 누구의 책임이라고 부를 수 있을것인가. 책임전가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니다. 무기력해져버린 20대의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이 확정되고 서서히 소멸되어가는 이 세대 앞에서 나처럼 무의미한 진단을 하고 우리 뒤에서 다가올 운명을 기다리는 10대들에게 그렇게 되지 말라고 당부하는 의미없는 송사를 낭독하거나, 최대한 책임을 회피하려고 발버둥치거나.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최후의 발악을 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미 대한민국을 이끌 동력도, 의미도 상실했다. 최후의 동력도 최후의 의지도 우리는 모두 떠나버렸다. 우리는 파편화되어 서서히 죽음을 향해 침몰해 하고 있다. 세종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바꾸지 못했듯이 우리 역시도 이것을 바꾸지 못한다. 개개인으로 뛰어나게 활약하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대로서 20대는 죽었다. 우리 앞에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나는 아직도 다른 세대보다 더 많이 이명박을 지지하는 20%의 20대로부터 이 죽음의 향기를 맡는다. 단순히 이명박이 싫어서거나. 그가 대통령감이 아니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런 의도로 지금의 20대를 죽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언제나 시대는 불공평했었다. 그러나 그 시대를 고치려 노력했던 사람들은 언제나 젊은이들이었다. 지금의 20대는 그 불공평을 인정하려 한다. 그러니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20대는 죽었다. 이건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20대는죽었다
학교를다니며 학생운동을 경험한적이있다. 그당시 인터넷이 물론 발전했지만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회의와 기나긴 토론 그리고 자기에 생각을 이야기할수 있는 시간과 경험이 많았다. 생각만 가지고 컴퓨터앞에 타자만치는것보단 학교나 일이끝난후 직접 거리로 나가보길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