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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문/ 배덕자 (앙드레 지드)

송은혜 |2008.06.13 08:07
조회 79 |추천 0
지난 주, 정말 오랫만에 지드의 좁은문과 배덕자를 다시 읽었다.

 

얘네를 처음 읽었던 때가 열한살 때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는 너무 어려서 였는지, 아니면 그 나이때 흔히 그렇듯 묘사나 사상의 서술 따위는 대충 읽고 스토리 전개만 흥미를 가져서 그랬는지 몰라도 별다른 감흥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좁은문의 알리사에 대해서는 '왠 청승이시람;' 정도로 생각했고, 배덕자의 미셀이 게이였다는 것을 (혹은 게이적인 성향을 가졌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었다 ㅋㅋㅋ

 

어쨌든, 조금 나이가 들어서 읽은 지드는 새로웠다. 좁은문과 배덕자가 서로 상반된 두 주인공을 통해 평생동안 지드를 사로잡았던 상반된 사상 (종교적 도덕 vs 인간적 직관과 감각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라나?)의 갈등을 묘사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얘네는 늘, 한 세트로 묶여서 출판되었던 거군)

 

나 스스로도 두개의 상반된 사상 사이에서 무엇이 옳은지 고민하던 때가 있었고, 여전히 많은 부분이 의문으로 남아있다.

 

"Sometimes I feel like my mind is at a constant war.


There's this sensible, prudent, discreet side of me who knows that life is not made of emotions. I know that real things that count (ex. Faith, Trust, Truthfullness, Loyalty) are not made of momentary feelings. You sometimes even have to fight against your instincts in order to acheive these goods, and they come from tempering yourself constantly.
This is something God teaches me in the bible, my parents tought me all through my life, and I do want it so much. From myself, and from someone I will love in the future.

But then..
There is also this...emotional, sentimental, impulsive side of me that rejoices in beauty of feelings and emotions. I don't know how I look outside, but I know I'm really sensitive to both beauty and ugliness of the world, and laughter and tears both strike me strongly.
And worse than that, I can't deny that I like myself for being this way. I believe that for this reason I am able to see and feel things that some cannot, and although I know I lose a lot for being this way, I don't want to change places with anyone who is not.

I feel as if my whole being contradict each side and I don't even know what is right anymore." 

(2003.11.27 일기 중 )

 

이것은 내가 예전에 'mind vs emotion'이고 나름대로 제목붙힌 일기이다. 당시 나는 지드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저 글을 다시 보니 정말 문법 오류 투성이라 민망할 지경이지만, 일기이기 때문이 다시 고치지는 않겠다. -_-; 때론 한 인간으로써 가장 수치스러울 때가, 예전에, 조금 더 어린 자기 자신이 진지하게 쓴 글을 다시 읽어 볼때가 아닌가 싶다.)

 

나는 크리스쳔이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절대선'을 믿지만, 그렇지만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물음들이 지금의 내게도 너무도 많다.  앙드레 지드도 아마 그러했겠지.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에 의거한 순종을 원하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물음' 자체를 갖는 것이 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좀 더 어릴적에는 했었다. (물론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저 글을 쓰던 당시에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지금와서 다시 저 글을 분석해 보면 나의 고민의 본질은 "인간으로서, 나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또 '인간다움'을 즐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가?" 정도의 질문으로 축약시킬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진짜 문제는 이거다. '과연 어느 쪽이 행복하냐'는 거다.

한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에 대한 질문에는 두 가지 답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그는 완벽한 존재이고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를 우리 자신 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시고,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도 더욱 잘 알고 계시다. 그럼으로 그에게 순종하는 것, 즉, '하나님의 그늘'아래 거하는 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이다.

 

또 하나는, (교회 밖에서의 '행복론'이다') '스스로의 본 모습'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Be yourself!", "Follow your heart"와 같은 메세지는 한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 세상이 내놓은 해답이다.  즉,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행복하고 즐거워야 다른 사람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볼 수 있다. 내 모습에 충실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나 스스로가 먼저 받아 들여야 비로소 자아를 실현할 수 있으며 나의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은 한 사람의 삶을 180도 바꾸어 놓는다는 것을 나는 수없이 목격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신의 삶의 선택을 독립적으로 하며, 그 어떤 것에도 종속되거나 의존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 두가지 '행복론'이 서로 상반되면서도 둘 다 옳고, 또 둘 다 그릇된다는 사실이다.  항상 스스로를 절제해야 하는 삶은 숨막힌다. 또 그 반대로 '스스로의 인간다움에 충실하게만'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공허하고 허무하며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가. 그래서 좁은문의 알리사도, 배덕자의 미셀도 결국 둘 다 파멸한다. 

알리사는 스스로의 갈망을 끝없이 억누르고 절제함으로써 하나님안에서의 행복을 추구하다가 쓸쓸히 혼자 죽게되고, 미셀은 그와는 반대로 스스로의 직관과  감각에 충실하게 살아가지만, 결국 그 욕망때문에 사랑하는 아내를 희생시키게 되고, 스스로의 삶이 더이상 의미가 없음을 고백한다.

 

결국 지드도 이에 대한 해답은 평생 내리지 못했나 보다.

 

 

"무엇때문에 나는 항상 그의 앞에서 나의 미덕을 과장하는 것인가? 나의 마음이 부인하는 이 덕은 과연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중략)

아! 그러나 당신은 약속하셨습니다. 주여, 욕심 없는 순수한 영혼들에게 이제부터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받을지어다' 라고 당신의 거룩한 말씀은 이야기 하셨습니다.  죽음에 이르러서까지 저는 기다려야 하는 것이옵니까?"    - 좁은문 '알리사' -

 

"남의 행복을 부러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거야. 그건 아무데도 못쓸 일이지. 행복이란 기성품은 좋아하지 않아. 재어서 맞춰야 해. 나는 내일 떠나네. 나는 알고 있지. 나는 이 행복을 내 몸에 맞추려고 애써 왔어.  - 배덕자 '메날끄' -

 

"나는 해방되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중요한 일이냐? 나는 아무소용 없는 이 자유가 괴롭다. (중략) 자네들이 나를 처음 알았을 때, 나는 지극히 안정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실된 인간을 만드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내가 없다."

- 배덕자 '미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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