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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정미진 |2008.07.01 12:03
조회 68 |추천 1


음악에 압도되어 버리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음악이 너무 가슴에 사무쳐 볼륨을 최대한 높여놓고

그 음악에 무릎꿇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내 영혼의 깃대위에 백기를 달아

노래 앞에 투항하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음악에 항복하고 처분만 기다리고 싶은 저녁이 있습니다.

 

지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지지 않으려고 너무 발버둥치며 살아왔습니다.

너무 긴장하며 살아왔습니다. 지는 날도 있어야 합니다.

비굴하지 않게 살아야하지만 지지 않으려고만 하다 보니

사랑하는 사람, 가까운 사람, 제 피붙이한테도 지지않으려고 합니다.

 

지면 좀 어떻습니까,

사람 사는 일이 이겼다 졌다 하면서 사는 건데

절대로 지면 안된다는 강박이 우리를 붙들고 있은지 오래되었습니다.

그 강박에서 나를 풀어주고 싶습니다.

폭력이 아니라 사랑에 지고 싶습니다.

권력이 아니라 음악에 지고 싶습니다.

 

돈이 아니라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풍경에 무릎꿇고 싶습니다.

선연하게 빛나는 초사흘 달에게 항복하고 싶습니다.

침엽수 사이고 뜨는 초사흘 달

그 옆을 따르는 별의 무리에 섞여

나도 달의 부하 별의 졸병이 되어 따라다니고 싶습니다.

 

낮달같이 푸른 달이 시키 대로 낙엽송 뒤에가 줄서고 싶습니다.

거기서 별들을 따라 밤하늘에 달배, 별배를 띄우고

별에 매달려 아주 천천히 여행길에 따라가고 싶습니다.

 

사랑에 압도당하고 싶습니다.

눈이 부시는 사랑

가슴이 벅차 거기서 정지해 버리는 사랑

그런 사랑에 무릎꿇고 싶습니다.

진눈깨비같은 눈물을 뿌리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고 싶습니다.

 

-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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