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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_선교사

배상진 |2008.07.13 23:44
조회 546 |추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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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나 역사를 이해할 때 참으로 중요한 것은 어떤 관점에서 살펴보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 세속역사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시각에 따라 해석을 달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한국교회사를 “선교”의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할 때, 무엇보다도 선교의 두 가지 측면, 즉 피선교국으로서의 한국 교회사와 선교국으로서의 한국교회의 모습을 함께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의 선교역사 속에서 선교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부흥한 선교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 그러한 이유를 여러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 할 수 있다.

 한국기독교 역사를 일정한 사관을 가지고 전체적으로 개괄하면서 정리한 첫 번째 학자는 백낙준 박사를 꼽는다. 그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은 주로 초기 “선교사”중심의 교회사를 서술했고, 또 민족주의적 입장의 교회사(민경배 교수 등), 민중사관에 의한 교회사(오윤태, 김광수, 송길섭 교수 등) 등의 분야들이 연구되었다. 1970년대 말부터 근자에 이르면서 보다 통전적이고 포괄적 의미의 교회사 서술이 시도되고 있다. 한국기독교사의 제 3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는 한국기독교의 어제와 오늘은 어느 한쪽의 시각으로 접근하면 참 면모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어떤 사관을 설정하기보다는 우선 기독교사의 사실을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분석, 정리작업이 필요하다고 보는 부류이다. 그 대표적인 학자로 이만열 교수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합적이고 총괄적인 시각을 감안하더라도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성령의 역사 그리고 복음 선포를 위해서 수고한 여러 사역자들의 대가를 지불한 헌신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제를 염두에 두면서 본 강의를 한국교회의 선교의 관점에서 주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Ⅰ. 한국개신교의 초기선교역사(1626-1884)


 백낙준 박사는 1973년 연세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된 그의 저서 “한국개신교사”에서 선교사관으로 역사를 이해했다. 그는 그의 책 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기독교사는 그 본질에서 선교사이다. 또한 반드시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기독교사상의 한 중간적인 존재이다. 우리 주님의 죽으심으로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만 존재하게 되어 있다(고전 11:26).이 중간적 존재체인 교회의 철두철미한 사명은 복음 선포이다. 기독교사는 自初至今에 선교사로 일관되어 왔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우리 한국 개신교사도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선교사를 외인 선교사에 의한 피선교의 과정으로 해석하여서 만은 아니 된다. 기독교 2천년사의 교회의 흥쇄는 교회에서 행한 전도활동에 있었고 전도활동은 신도들의 신앙허실에 좌우되어 왔다. 전도는 교회의 지상명령이다.”(한국개신교사 p,ⅴ-ⅵ)

 이상의 언급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무엇보다도 선교사의 과정에서 보는 한국의 선교사는 기독교 2천년史에서 계속되어 온 세계의 선교사의 맥락 속에서 한국기독교사를 헤아릴 수 있다는 지적과 이러한 관점에서 보더라도 단순히 선교사를 외인선교사에 의한 피선교 과정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모순 된 듯 하지만,초기의 기독교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요인이 된다. 즉 한국개신교의 초기 역사는 무엇보다도 순교를 각오한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한 보냄을 받은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복음 선포의 열심에 크게 빚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개신교회의 시작은 이미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기독교인으로 돌아서는 면모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복음과의 최초의 접촉(1626)


 한국에 복음과 최초의 접촉은 1626년에 네덜란드인 벨테브레(Janse Weltevree, 한국명 박연)를 통해서였다. 그는 일본으로 항해 도중 표류하여 경주에 상륙을 했다가 붙잡혀 한국 해군의 고급 장교가 되었다. 그의 개신교 신앙은 얼마나 돈독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를 통해 개인적인 차원에서 복음이 최초로 한국민들에게 소개되었다. 그 뒤 26년 후 제주도에 표류한 네덜란드인 하멜(Hendrik Hamel)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 졌으며,1816년에 영국 고함 알세스토(Alceste)호의 함장 맥스웰(Murray Maxwell)과 리라(Lyra)호의 함장 버질 홀(Basl Holl)과의 접촉에서 조대복(趙大福)에게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성경이 주어졌다. 그 후 독일 선교사 칼 구츠라프(Karl Gutzlaff) 목사가 1832년에 런던 선교회 파송으로 중국으로 오게 되었다. 그 해 한국에까지 와서 항해도 장연 지역에서 통상을 요구하고 또 충청도 홍주만의 원산도에 정박하여 지방관을 통해 통상을 요구하기도 했다. 조선정부의 회신이 오기까지 원산에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주기도문을 문답하고 한문성경을 배포했다. 결국 중국의 황제 허락 없이는 외국인들과 통상을 할 수 없다는 거절을 답으로 들은 구츠라프는 그의 항해기(7.27일자)에서 한국인들에게 구세주에 관해 자주 이야기를 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그들의 구세주라는 것을 되풀이했으나 그들은 무관심했다고 안타까워했다. “어떻든 한국방문은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 땅에 뿌려진 하나님의 진리의 씨가 소멸되리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미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이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한편 이 날이 오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도를 애써 전파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하나님께서 이 미약한 첫 방문도 축복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한국 땅에 광명의 아침이 찾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1865년 9월에 영국 선교사 토마스(Robert J. Thomas/런던선교회)는 1차로 월리암슨의 주선으로 항해도 장연 소래마을에 도착한 그는 서울까지 가려 했으나 도중 폭우로 인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1866년 무장한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하여 대동강을 거쳐 평양까지 와서 죽음을 당하게 된다.1867년에는 토마스 선교사의 후원자인 월리암슨(Alexander Willamson) 등에 의하여 한국과 선교적인 접촉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선교적인 문호가 개방이 된 것은 1882년 한미 수호조약 체결 후였다. 정식 국교가 성림이 되자 미국은 푸트(Lucius H. Foote) 장군을 초대 한국 주재 공사로 임명을 하였다. 한미 수교후 한국정부를 대표하여 외교사절로 미국에 파견된 민영익은 워싱턴으로 가는 기차에서 가우처(John F. Faucher) 목사를 만나 한국을 소개하고 만주에서 한국어 성경번역에 주력하고 있는 로스(Ross) 목사의 국내 성경반포에 협조하고 있는 사실을 밝혔다. 민영익과의 대화에 감명을 받은 가우처 목사는 곧 감리교 본부와 일본 주재 선교사 맥레이(Robert Samuel Maxlay)에게 한국답사를 부탁하고 기쁨으로 한국답사를 3개월간 가진 맥레이는 선교본부에 한국의 실정을 소개하고 선교사역 착수를 희망하는 의견서를 제출한다.

 이러한 노력이 주효하여 1884년 9월 22일 알렌(Horace N. Allen) 의사가 최초의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정식으로 교단의 선교사로 파송받은 선교사들은 장로교의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와 감리교의 아펜젤러(Henry Gernart Appenzeller)였다. 이 두 선교사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에 함께 인천항에 상륙함으로 한국선교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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