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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eless Beauty

정병철 |2008.08.06 20:35
조회 70 |추천 0


경계선 성격 장애를 앓고 있는 지수(김혜수)는 정상과 비정상,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오가며 혼돈에 빠져 있는 여자다. 자신의 증세를 치료하기 위해 지수는 정신과 전문의 석원(김태우)의 상담을 받지만 그녀의 상담을 맡자마자 석원은 병원을 그만둔다. 헤어진 후 잊고 지냈던 그들은 1년 뒤 우연히 마주치면서 서로에 대한 기억을 회복한다. 석원은 최면을 통해 지수의 병증이 지난날 한 남자와의 헤어짐으로 인한 상처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고 지수 역시 석원의 개인사를 듣게 된다. 서로의 사연을 알게 되면서 호기심이 증폭되는 두 사람은 환자와 의사가 지켜야 하는 경계를 위태롭게 오가는 관계로 발전한다.

의 탄생 동기는 다소 엉뚱하다. 영화가 모티프로 삼은 건 1980년 방송된 TBC 드라마 의 납량 특집편 '얼굴없는 미녀'였다. 하지만 정신과 의사와 환자의 위험한 로맨스, 최면이 영화의 소재로 등장한다는 것 외에 둘 사이의 연관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과거 드라마가 한 서린 원귀(寃鬼)의 복수담인데 비해 는 인간의 존재론적 외로움, 상실감의 무한 반복을 형상화한 심리극에 가깝다. 이런 사실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제작 전부터 이목을 집중시킨 몇 가지 화제 요소들 때문이다. 당대 최고의 섹스 어필 스타지만 한번도 스크린에 자신의 몸을 드러내지 않았던 김혜수의 노출, 몇몇 대사와 노출 장면 때문에 심의가 유보된 예고편, 정신과 의사와 환자의 선을 넘은 관계라는 위험한 설정 등 에 대한 소문의 태반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묘사와 연관돼 왔다. 미안하지만 영화의 실체는 이 같은 기대감을 배반할지도 모른다. 세간의 음험한 기대처럼, 는 외설스런 성애 영화는 아니다. 트라우마의 기원을 추적하는 미스터리 구조를 따라가지만 정교하게 짜인 드라마도 아니다.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인간관계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인 이 영화를 지배하는 것은 취한 듯한 무드와 스타일이다.

형체가 사라진 얼굴을 하고 있는 미녀의 형상처럼 이 영화의 모든 요소들은 파괴적이다. 장르적으로 보면 그것의 실체는 무국적 혼성 장르 영화에 가깝다. 멜로와 미스터리, 호러, 심지어 SF의 요소까지를 품고 있다. 누군가 이 영화를 ‘호러’라고 부른다면 그건 장르의 관습이나 더러 보이는 몇 개의 잔혹한 이미지 때문이 아니라 부지불식 중에 원귀들이 출몰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에게 얼굴이 없는 것은 그녀가 유령이기 때문이다. 유령을 만나는 것은 기시감(deja vu)의 환각을 불러일으킨다. 영화는 홀로 남겨졌다는 것에 대한 설움 때문에 구천을 떠돌고 있을지 모르는 영혼들을 불러내 스크린 위에서 대면시킨다. 석원은 지수의 얼굴을 아내의 그것으로 치환하며 지수는 최면을 통해 과거 사랑했던 남자와의 추억 속으로 돌아간다. 망각은 그녀를 식물 인간(비존재)으로 만들고 기억은 그녀를 미치광이로 만든다. ‘기억’은 여기서 이중성을 띤다. 최면을 통한 기억의 회복은 지수에게 치유의 방법인 듯하지만 석원에게는 또 다른 집착의 빌미가 되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존재들이 거하는 곳은 늘 ‘경계’이다. 과거와 현재, 현실과 비현실, 안정과 불안, 여기와 그곳의 사이에서 그들은 정처 없이 유랑하는 유령들이다.

그렇다고 가 뿌리 잃은 실연자들의 넋두리만을 보여 주는 건 아니다. 현실 그 자체를 묘사하지는 않지만 인물들의 상실감은 생생히 감각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인간을 병들게 하는 과거의 기억과 환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존재의 무의식, 버림받을 데 대한 두려움과 집착이 빚어내는 파멸의 상황을 보여 준다. 외로움은 세상에 만연해 있고 고독에 몸부림치는 영혼들은 어두운 거리를 헤맨다.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의 처지는 바이러스처럼 전이되는 관계를 통해 ‘고리’를 형성한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것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원형 이미지’다. 고독과 집착, 버림받음의 순환 고리는 원형성의 드라마와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기억과 상처가 타인에게 전이되는 과정을 쫓아가는 영화에서 원형의 이미지는 중요하다. 혼돈과 집착, 실연, 홀로서기로 귀결되는 이야기의 순환 구조, 지수와 석원의 만남이 이뤄지는 피트니스 클럽의 원형 트랙, 최면과 섹스가 이뤄지는 공간에서 빈번하게 출몰하는 카메라의 원형 운동 따위는 모두 원형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이 대물림의 상징은 현대적인 사랑을 지배하고 있는 보편적인 법칙, 즉 버림받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결국엔 홀로 남고 마는 현대인의 가련한 운명으로 맺음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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