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올림픽 횃불이 파리에 전달된 4월 7일, 수 천 명의 인권단체 회원, 티베트인 및 지지자들이 ‘자유와 인권광장’에 모여 중공에 항의하는 대규모 집회를 개최했다.
[대기원] 베이징 올림픽 횃불이 그리스에서 점화된 후 가는 곳마다 끊임 없이 항의받고 있다. 이례적으로 국제여론은 항의 단체를 지지하고 있고, 많은 중국 네티즌들은 이에 격분해 서방언론과 항의단체 혹은 항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있다. 마치 정말로 중공이 선전하는 것처럼 ‘반(反) 중국세력이 나를 죽이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지난 4월 9일 미국 듀크 대학 학생 왕첸위안(王千源)은 올림핏 횃불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함께 서 있었다. 그는 곧 중국 유학생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삿대질을 당해야 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집을 찾아가 유리창을 부수겠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심지어 온 가족을 몰살시키겠다고 협박했다.
중국인들의 이런 극단적인 애국주의 혹은 민족주의 경향은 많은 이들의 우려를 자아내게 한다.
중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필자는 중국인들의 애국정서를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인들에게 있어 애국이란 일종의 본능과 같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중국인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또 함부로 애국하지 않는 다른 사람을 비난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욕설과 인신공격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중국’이 욕을 먹는가? 중국인으로서 어떻게 해야 진정한 애국이며 어떻게 해야 화인(華人)에게 유리한가? 어떻게 해야만 중국이 진정으로 세계에서 존중받을 수 있는가? 이 문제야말로 모든 중국인들, 특히 욕을 하는 그런 사람들이 가장 생각해볼만한 일이다.
필자가 보기에 ‘중국’이 욕을 먹는 데는 3가지 중요한 원인이 있다. 하나는 중공 당국의 방식이 다른 문명국가의 가치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대부분의 전세계인이 중국 공산당과 중국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많은 중국인들도 중공과 중국을 구분하지 못해 외부의 모든 비판을 부정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원래 중공을 비판하려 한 말인데 종종 중국을 비판하는 것으로 되거나 혹은 본래 중공을 말한 것임에도 중국을 지칭한 것으로 받아 들인다. 또 선의적으로 비평한 것임에도 악의적인 공격으로 받아 들여 종종 불필요한 오해를 하기도 한다.
보편적 가치에 어긋난 중공 정책
급속한 글로벌화가 진행된 오늘날 세계는 갈수록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다양한 민족, 다양한 문화가 서로 가까이 접근하면서 융합되고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각 민족이 서로 다른 특징을 포용하면서 공동의 가치관을 서로 교류할 수 있는 기초로 삼는 것이다. 보편적인 가치관, 예를 들면 생명에 대한 존중, 사람의 기본 권리에 대한 존중, 박해와 학살 금지 등은 주류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는 문명가치관이다.
서방사회에서 이런 기본가치는 인권(人權)을 통해 표현된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중공의 선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인권에 대해 일종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만약 냉정하게 생각해본다면 사실 그들도 내심으로 자신의 정당한 권리가 보호받을 수 있기를 원할 것이다. 적어도 그들이 불공정한 대우를 받을 때 정의를 펼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를 원할 것이다. 때문에 인도(人道)와 인성(人性)에서 출발한 기본가치관은 어느 민족이나 개인을 막론하고 모두 공통적인 것이다.
중공이 인권을 박해할 때 서방인들은 인권의 이념에서 출발해 아주 자연스럽게 비판을 제기한다. 많은 중국인들은 미국인들의 이런 솔직함과 정의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중국 공산당의 당문화(黨文化)는 중국인들을 늘 시시각각 다른 사람의 ‘불량한 동기’에 대해 조심하고 경계하게 만들었다. 사실 미국에서 조건 없는 도움을 받거나 혹은 자발적으로 아무 대가 없이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아주 보편적이며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백여 년 전에 프랑스의 법학자 토크빌과 독일 사회학의 태두 막스 베버는 이미 미국의 자원봉사정신에 대해 찬탄해 마지않았다. 얼마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허메이(賀梅) 사건에서도 허씨 부부는 무보수로 변론을 맡았던 미국 변호사의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역주: 허메이 사건이란 생활고에 시달리던 허사오창(賀紹强) 부부가 자신들의 어린 딸 허메이를 미국인 부부에게 맡겼다 나중에 되찾으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양가의 소송사건을 말한다.]
서방사회의 보도를 자세히 분석해보면 서방사회가 겨냥하는 것은 사실 중공의 폭력적인 정책과 인권침해이지, 중국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실상 비판을 제기하는 그런 서방인들은 종종 중국을 아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중국문화에 대한 동경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그들은 또 중국이 잘되기를 바란다. 만약 중국 정부가 인권을 보장할 수 있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매우 기뻐하고 격려할 것이다.
1999년 4월 25일 주룽지(朱鎔基) 총리가 국무원 청원 사무실을 찾아온 파룬궁 수련생들을 접견했을 때 서방사회는 모두 한결같은 찬사를 보냈다. 나중에 장쩌민이 파룬궁 박해를 시작한 후 전 세계의 비난을 받은 것과 비교해 볼 만하다.
그러므로 문제는 국제사회가 중국에 무슨 편견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중공의 정책과 행동이 세계의 보편적인 기준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이미지를 훼손하고 중국인들의 체면을 깎아내린 것은 서방의 그런 비판자들이나 시위자들이 아니라 바로 중공 자신이다.
서방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초래하는 오해
"중국이 티베트에서 몇 명을 살해했다." 서방 언론이 여기에서 말한 중국은 중공이고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중공의 학살정책이다. 또 "중국에 인권이 없다"라고 할 때는 중공의 탄압 정책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중국(China)이라는 하나의 명사로 그곳에서 발생한 모든 비인도적인 사건들을 표현한다.
많은 중국인들은 누가 중국을 말하기만 하면 자신이 비난을 받았거나 상처를 받았다고 여긴다. 이런 마음은 체면을 중시하는 중국인들의 심리와 중공 당문화가 조성한 외부 비판에 대한 배척과 맞물려 더욱 강화되었고 더욱 감정적이고 더욱 공격적으로 표현하게 했다.
서방인들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당신이 만약 그에게 중공은 중국이 아님을 알려주고 그들이 비평하는 것이 중공을 향할 경우 ‘중국’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면 그들은 아주 흔쾌히 받아들일 것이다. 그들은 “원래 내가 말하려던 것은 중공이었다”라고 할 것이다. 사실 갈수록 많은 서방인들이 이미 중국과 중공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로라바처 의원은 전에 “중공은 우리의 적이지만 중국 인민은 우리의 친구이다” “우리는 중국인민과 함께 하며 중공과 함께 하지 않는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중국과 중국정부, 중공을 정확히 구분하자
다른 각도에서 말하자면 국제사회가 중공을 비판하거나 중국정부를 비판할 때 중국인들은 지나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 중국과 중국인은 수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세계인이 동경하는 역사와 문화를 남겼다. 이런 오랜 문명과 지혜야말로 진정하게 중국을 대표하고 중국인들이 자부할 만한 것이다. 중공에 대한 외부의 비판은 중국이란 나라와 민족 자체에는 아무런 손상도 끼칠 수 없다.
자유사회에서 어느 정치인이나 정당을 비판할 때 아무도 이들을 공격하는 것이 애국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야당이라고 하여 꼭 정부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 무슨 ‘당을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반당(反黨)’이란 단어조차 없다. 더욱이 당에 반대한다고 하여 국가전복죄가 성립하진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주도적으로 당파를 선출하는데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정당, 정부가 민중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의무이지만 반대로 민중이 정당이나 정부의 비위를 맞출 의무는 없다.
중국인 내부의 비판이거나 외부의 비판이거나 간에 이를 통해 정부가 국민을 위해 봉사하게 된다면 좋은 일이다. 서방인들은 이런 기개와 도량이 있는데 중국인들은 왜 있으면 안 되는가? 왜 미국인들은 자유롭게 정부와 여당에 불만을 표현할 수 있는데 중국인들은 안 되는가? 왜 인권을 주창한 마틴 루터 킹은 미국의 국가적인 영웅이 되었는데 중국의 인권수호인사들은 비슷한 용기가 있음에도 중공의 죄수가 되어야 하는가?
중공은 정권을 잡은 지난 반세기 동안 줄곧 중공과 중국, 중국정부를 의도적으로 뒤섞어 왔고 이를 통해 중국인들로 하여금 무의식중에 자신을 중공의 한 분자로 만들어버렸다. 이리하여 중국인들은 설사 중공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할지라도 그것을 대신해 변호하고 목숨까지 바친다. 심지어 중공의 여러 차례 악행이 모두 쉽게 뜻을 이루게 했으며, 역사적인 교훈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고, 서로 다른 수많은 단체의 중국인들이 돌아가면서 중공의 탄압과 박해 대상이 되었다.
오늘에 이르러 이런 상황은 마땅히 변해야 한다. 사람들이 모두 평화와 비폭력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중공은 여전히 폭력박해를 미신하며 자기 백성들을 해치는데 이는 결코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정의와 양지를 가진 중국인이라면 모두 마땅히 중공의 자국민 박해를 반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중공이 그 어느 사람을 박해하든지 모두 이 국가와 민족을 해치고 다른 사람을 피해자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중국과 중공을 분명히 구별하지 못한다면 이는 우리가 주동적으로 중공이란 누명을 쓰고 중공을 대신해 악행을 변호하고 중공이 중국을 해치는 것을 돕는 것이다.
이에 필자는 3가지 작은 건의를 하고자 한다.
만약 또 다시 중국에 대해 항의하는 일을 만나게 되면 우선 중공이 왜 국가이미지를 훼손하고 중국인들의 체면을 손상하는지 항의해야 하며 이를 통해 중국이 욕을 먹는 근원을 없애야 한다.
둘째, 전 세계 사람들은 중공과 중국을 혼동하지 말아야 하며 중국에 중공의 죄를 씌우지 말아야 한다. 비난의 창끝은 진정한 재앙의 근원인 중공을 향해야 한다.
셋째, 외부에서 중공을 비판하는 것을 격려하고 지지해야 하는데 이렇게 해야만 중국이 세계와 보다 빨리 연결되고 욕을 덜 먹으며 나라와 국민에게 모두 좋은 점이 많아질 것이다.
궁핑(龔平)
<인성, 인권, 자유, 아름다운 미래를 여는 신문 대기원시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