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무엇인가? 과거의 철학자들에 의해서, 그리고 그러한 지식인이 아닌 일반인들조차도 한번쯤은 생각 해 보았을 법한 질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이란 무엇인지 답을 낼 수 있을까?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가설 검증 전략’을 이용해 자기 합리화를 시킨다고 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도 그와 비슷하다. 스스로가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의 모습을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상상하며 단정 짓는 것을 죽음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죽음에 대해서는 수많은 정의들이 내려져 있다. 그 예를 보면 ‘죽음은 미지에 도전하는 기개다.’ ‘죽음은 새로운 세계로 가기위한 통과점이다.’ ‘죽음이란 氣가 흩어져 존재 차원에 근본적 변화가 오는 것이다’ ‘죽음은 육체에서 영혼이 분리되는 과정이다.’ 등이 있다. 이름만 말하면 누구나 알고 있는 학자가 한 말도 있고,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듯 많은 정의들이 있지만 단 하나도 과학적으로 그리고 증거와 함께 제시되거나 결정된 적이 있었을까? 단언하건대 그런 경우는 한순간도 없었다.
이렇게 정체가 불분명하고,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죽음이 왜 과거부터 논란이 되어 왔고, 지금에 와서는 하나의 학문이 되었을까? 이렇게 학문으로까지 발전할 정도로 죽음에 대해서 지적인 호기심을 갖는 것은 인간으로써는 자연스런 일이다. 사실 철학은 이 죽음에 근본적인 질문을 두고 있다. 아니 이 질문에서 바로 철학이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철학이 가지는 모든 질문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누가 만들었는가?’ ‘창조주는 있는가?’ ‘인간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이 질문들은 ‘진리는 무엇인가?’ 라는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이 질문을 잘 생각해 보자. 아무것도 없이 갑자기 진리를 찾고 싶어졌던 것일까? 아니다. 어디의 누가 이 질문을 최초로 던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진리에 대한 탐구는 바로 죽음으로부터 나온다. 누군가의 죽음을 인식했을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죽음이 왜 일어나는 건지 알려고 하면 할수록 질문은 ‘왜 움직이지 않는 거지?’에서 ‘이렇게 움직이지 않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로 변하고, 또다시 이 질문은 ‘이 현상은 뭐지?’ 로 바뀌며 이렇게 왜라는 질문이 계속되다 보면 죽음에 대한 탐구는 어느새 진리에 대한 탐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철학 역사 즉,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의문의 근본이 된 죽음은 그 명성에 걸맞게도 단 하나의 질문으로 수만 명의 철학자들을 먹여 살리는 주옥같은 질문들을 쏟아 내고 있다. 그 질문이 바로 ‘죽음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다.
죽음이 무엇인지는 끊임없이 연구하고 있지만 결코 그 결실을 맺을 수 없는 현상이다. 수많은 철학자와 종교인 그리고 과학자가 다방면에서 죽음이라는 현상에 대하여 연구를 하고 있지만 단 하나 ‘생명현상의 정지’라는 사실 이외에는 그 어떤 학설도 그 내면에서 바라보면 가설에 불과하다. 스스로 죽음을 겪어보거나 죽음 안에서 단 하나의 증거를 가지고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혹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죽음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하는 자가 나타나는 날이 바로 인류가 멸망하는 날이 될 것이다.’ 이 말은 죽음이라는 현상을 규명하기란 불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밝혀낼 순 없어도 죽음이 무엇인지 연구하는 동안 가지게 된 질문들로 인해 현재 인류의 지적 수준과 정신적 소양을 발달시켜 온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렇게 발달되어 온 인류는 과학적으로는 혈거인,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 촌락, 도시, 국가를 거쳐서 이제는 글로벌 시대라고 불리는 시간을 맞이했다. 더 이상 그 누구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죽음은 낙오, 은퇴, 이별 등을 뜻한다. 간단히 말해서 사회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그에게 의견을 물을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같이 밥을 먹을 수도 없는 것이다. 즉 죽음이라는 현상이 일어난 후에는 당사자와는 삶이라는 것을 같이 할 수가 없다.
잠시 한 가지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인간은 죽으면 끝인가?’ 라는 질문이다. 기독교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고 한다. 게다가 그곳의 삶은 영생이다. 불교에서는 윤회를 믿고 있다. 토속신앙에서는 전생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이슬람교역시 기독교와 비슷한 개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증명할 수 없다. 위에서도 말 했듯이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다. 현실에서 우리가 느끼는 죽음이란 그저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는 생각뿐이다. 인간은 현실 속에 살아가는 동물이다. 현실 안에서는 죽으면 끝이다.
자신 주변의 누군가가 죽으면 이제 더 이상 현실 속에서 그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큰 동요가 일어난다. 이렇게 일어나는 심리적 동요로 인해 자신이 피해를 입거나 상처 입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인간은 종교나 또는 확고한 자신만의 신념을 내세우는 것이다. 죽음 뒤에 삶이 있다는 것은 죽음 뒤에 영생을 살고 있는 자만이 알고 있다. 전생한 사람은 오직 전생 시켜준 누군가만이 알고 있다. 아무리 날고기는 과학자, 철학자, 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신념 안의 죽은 뒤의 모습을 증명할 순 없다.
죽은 뒤의 모습은 한없이 불확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오직 삶이라는 것에 더 이상 미련이 없는 자와 어떠한 일에도 심리적 동요가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 이렇게 두 종류뿐이다. 인간들이 종교와 미신에 집착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확실하지만 그 뒤에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고, 두려워하며 종교나 미신에 의지하는 것이다.
가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서 착각하곤 한다. ‘인간은 죽으면 끝인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 있게 ‘아니다. 그 뒤엔 분명 XXX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정말 엄청난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다. 분명하게 말하면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끝이다. 삶이 끝나고, 인간관계가 끝나고, 사랑이 끝나고, 일이 끝나고, 우정이 끝나고, 동시에 아픔도 끝나는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너를 죽이지 않는 모든 것들은 너를 강하게 해 준다.’ 죽음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인간은 극복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또 의문점이 든다. 강함이란 무엇일까? 강함에 대해서 또 알아 보다 보면 또 다른 질문이 나온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들에 일일이 생각을 하다보면 우리는 애초에 생각하기로 했던 ‘인간은 죽으면 끝인가?’ 라는 질문을 잊게 된다. 이렇듯 죽음에 관한 원론적인 질문들은 그것을 탐구하는 자에게 엄청난 질문의 홍수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 답은 언제나 베일에 싸여있다. 오직 죽은 자만이 죽음의 비밀을 알 수 있다. 물론 죽음이라는 현상을 생명현상의 정지로만단정하고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현실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자기 자신을 방어하려고하는 행동일 뿐이다.
앞에서 얘기 한 바와 같이 죽음은 삶과 떼어놓고 얘기할 수 없다. 마치 빛이 그림자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뿐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현실이다. 빛이 그림자를 내기 위해서 어떤 사물을 필요로 하듯이 죽음은 삶이 현실에 투영되어야만 그 의미를 가진다. 특히 인간의 죽음은 앞에서도 계속 얘기 했듯이 인간이 다른 동물이나 식물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과는 사뭇 다르다. 다분히 그 의견에는 생명현상의 정지라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지만 수많은 사람, 수많은 집단, 수많은 사상가들이 ‘인간의 생명은 존귀하다.’며 죽음에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죽음도 현실이 없다면 그저 다른 생명체와 같이 그저 생명현상의 정지에 불과할 뿐이다.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고 현실에 적을 두며 삶을 꾸려 나아가고 있기에 죽음의 의미가 부각되는 것이다. 인간이 무인도에서 혼자서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자. 물론 다른 생물들도 존재하고 있다. 이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답은 ‘아니다.’ 이다. 익히 알고 있듯이 인간만이 인간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고 생각하고, 또 연구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삶은 현실로 인해 죽음과 연결되어 그 의미를 가진다.’ 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삶의 목적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 목표가 있다. 자신이 왜 존재하느냐에 대한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인간은 많지 않지만 ‘살면서 어떻게 하고 싶다.’ 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원인을 알 순 없지만 결과는 바라고 있고 또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란 무엇일까? 바로 죽음을 맞이했을 때 자신의 모습이다. 죽음자체는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인체에서는 강렬한 자기방어본능이 나오게 되는데 이 방어본능이 너무나도 강력해서 오히려 자신이 고통 받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던 때에 원하던 형태로 죽는 인간은 웃음을 띠면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당연한 일이다. 인간들의 삶이 글로벌화 되면 될 수록 서로가 삶을 공유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그렇게 되면 개인이 생각했던 계획에 변수가 늘어나고 점점 자신이 원하는 죽음의 형태는 맞이하기 힘들어 지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변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죽음은 현실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마치 그림자가 진해지려면 빛이 사물에 가까이 다가와야 하듯이 삶이 현실에 집착하면 할수록 죽음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수학에서는 극한이라는 개념이 있다. 어떠한 수치는 다른 수치로 한없이 가까워진다는 개념이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절대로 죽음이 삶과 공유될 수는 없지만 한없이 그에 가까워질 수는 있다. 이 말은 삶과 현실이 밀접하면 밀접할수록 빨리 죽는다는 말이 아니다. 죽음에 노출된다는 말도 아니다.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고 그에 맞춰서 삶의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다면 당초 자신이 본능적으로 원했던 죽음의 형태와 가까워진다는 의미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죽음의 형태를 바라고 있다. 다만 스스로가 모를 뿐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죽음의 형태를 삶의 목표라고 착각을 한다. 현실에 바쳐온 것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그것들을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일 정신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위에서도 말했던 강력한 자기방어본능으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죽음도 인간의 삶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아니 죽음은 삶의 강력한 동기가 된다. 이러한 얘기에는 누구나 이렇게 말을 한다.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라고. 난 분명하게 얘기한다. 그것은 스스로 정신적인 충격을 버티기 위한 자기방어본능일 뿐이다. 그 본능이 깨져서 자신이 사실은 죽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것도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죽고 싶은지 까지 알게 되었다고 하자. 과연 그렇게 죽기위해 열과 성을 다해서 노력할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명히 좀더 손쉽고 편한 방법으로 자신이 당초 원했던 죽음의 형태를 바꿀 것이다. 인간이 그 사실을 알고서 태어났어도 마찬가지다. 뜻하지 않게 죽게 된다고 해도 크게 동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현실이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이 경우 인간이 걸어야 할 노선은 멸망뿐이다.
지금까지 해 온 얘기들을 종합해 보면 한 줄의 문장으로 정리 할 수 있다. ‘삶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아무리 부정해도 거짓이 될 수 없는 얘기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을 찾는 철학자이다. 다만 그 방법과 형태가 다를 뿐이다. 바람직한 죽음도 바람직하지 못한 죽음도 없다. 그냥 죽음이라는 것 자체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평가할 수 있는 인간은 오직 자기 자신 뿐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과 현실의 연동을 인정하고, 죽음이 현실을 이겨내야 얻을 수 있는 삶의 목표임을 인지하고, 원하지 않던 형태의 죽음이라고 해도 돌이킬 수 없는 길이니 원하던 형태의 죽음 즉 자신이 걸어가려는 현실 안에서의 삶의 형태를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