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이중섭

김선미 |2008.08.22 07:02
조회 95 |추천 0





이중섭 (1916~1956)

일제 치하와 6.25라는 우리 역사의 가장 큰 아픔 속에서 자신의 예술혼을 불살랐던 화가 이중섭. 그는 유희와 낭만의 예술, 예술을 위한 예술을 고집하던 어떤 화가들과는 달랐습니다. 시대를 볼 줄 아는 눈이 있었고, 민족의 고통을 나누고자 하는 양심이 있었으며, 함께 아파하는 가슴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 안에서 끓어오르는 예술의 혼으로, 역사의 한복판에서,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민족의 비극을 감당하고자 하였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평안남도의 한 지주집안에서 막내로 태어난 이중섭은 5살에 아버지를 잃었지만 가족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즘으로 말하자면 초등학교라 할 수 있는 평양공립보통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림그리기에 상당한 소질을 보이기 시작하였죠.

그 후 이중섭이 다녔던 오산고등보통학교는 당시 독립운동가였던 조만식 선생이 설립한 학교였습니다. 그러한 민족주의적 교육환경 덕분에 이중섭은 애국심이 어떤 것인지 배우기 시작했죠. 한글을 없애려고 하는 일제의 정책에 반대하고자 그는 한글의 자모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이후 일본 유학시절에서도 그의 서명은 한글이 되었죠.

그 학교에는 유학까지 다녀온 화가 임용련이 미술교사로 있었는 데요, 이중섭은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때부터 그는 소에 관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 데요. 그의 학창 시절 많은 날을 들판에 나가 소를 관찰하는 데 보냈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이중섭을 “소에 미친 놈” 이라 했다고 하네요. 이중섭의 소질을 인정한 임용련은 일본을 알아야 일본을 이길 수 있다며 일본유학을 권유하였고, 그는 스승의 말에 따라 동경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민족적 정서를 가지고 있던 이중섭은 서양 미술의 화풍에 젖어있던 동경제국미술학교에 적응할 수 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좀더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동경문화학원으로 학적을 옮겼죠. 그 곳에서 이중섭은 착하고, 따뜻한 여인이며 훗날의 아내가 되는 마사코를 만나게 됩니다. 마사코와 귀국하여 원산에 정착한 이중섭은 원산사범학교에서 미술교사로 봉직하기도 하며,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1946년 디프테리아라는 병으로 첫 아들을 잃고, 1950년 6.25가 발발하면서 그의 인생은 참담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중섭의 집은 비행기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고, 가족을 이끌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납니다. 피붙이 하나 없는 그 곳에서 그는 부두의 막노동자, 운수회사의 인부노릇 등 말 그대로 죽을 고생을 합니다. 하지만, 아내는 폐결핵에 영양실조까지 걸리게 되고 결국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나게 되죠.

아내와 두 아이를 보내고 난 이중섭은 전국을 떠돌며 방랑 생활을 합니다. 그러던 중 1955년에 처음으로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시회 이후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져 거식증에 걸리고, 여러 병원을 전전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도 촛불이 꺼지기 직전 마지막 빛을 발하듯 손톱과 송곳으로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하죠. 그렇게 만든 작품은 뉴욕에 있는 모던 아트 뮤지엄에 소장되었습니다.

이중섭 만이 그릴 수 있었던 조선의 소와 닭 그리고 아이의 천진난만한 표정은 그를 가장 위대한 한국의 민족화가로 칭송받게 하였습니다. 죽기 직전까지 가족을 그리워하며 선과 면을 만들던 이중섭은 1956년, 가을에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병원의 침상에서 마지막의 긴 호흡을 합니다.



소의 말 /이중섭

맑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픈 것
아름답도다
두 눈 맑게 뜨고
가슴 환히 헤치다.





이중섭!
40년 그 짧은 예술의 삶


1916년 4월 10일
평안남도 평원군 송천리에서 이희주와 안악 이씨 사이의 막내로 태어나다. 형은 12년 위, 누나는 6년 위임. 부농집안. 1923년 5세무렵 아버지 죽다.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사과를 먹기 전에 그리고 먹었다고 한다.

1925년
마을 서당에 다니다가 평양 외가로 가서 종로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다. 선국적인 유화가인 김찬영의 아들이며 뒤에 화가가 된 김병기와 한 반이 됨. 김찬영의 집에 가서 각종 화구와 미술서적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벽화가 그려진 고구려 무덤유적 안에서 잠자기도 하고 운동과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다.

1931년
졸업.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 미술부에 가입해 교사이던 유화가 임용련, 백남순 부부의 집중적인 지도를 받음. 식민 당국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반발해 한글 자모로 된 그림 을 그리다. 이후 한글로 이름 쓰기를 실천하다. 이때부터 소를 즐겨 그리다. 2학년 때인가 3학년 때 다쳐서 1년간 학교를 쉬다.

1934년
일본회사의 보험금을 타서 학교를 재건하겠다는 의도로 친구들과 교사에 불을 지름. 졸업 기념사진첩에 일제에 항거하는 그림을 그려 물의가 일었음.

1935년
졸업 후 곧 일본 토오쿄오로 가서 테이코쿠 미술학교에 입학. 연말에 다쳐 쉬면서 프랑스 어 공부에 몰두. 1936년 21세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인 분카 가쿠엔으로 옮겨 입학. 김병기와 오산의 선배 문학수 그리고 유영국이 상급생이었음. 강사로 나오던 쓰다 세이슈와 친밀하게 됨. 기츠조지의 아파트에서 자취생활을 함.

1938년
일본인 화가들이 창립한 단체 지유미즈츠가쿄카이(自由美術家協會)의 2번째 공모전(이하 지유텐)에 응모하여 첫 출품에 협회상을 받았으며 동시에 평지들의 대호평을 획득하다. 후배인 일본 여성 마사코를 알게 되어 사귀기 시작하다.

1940년
졸업. 토오쿄오에 머물면서 제작에 몰두. 두해전에 이어서 토오쿄오와 경성에서 열린 4번째 지유텐에 , , , 을 내어 커다란 찬사를 받다. 휴가로 원산에 있으면서 연말부터 마사코에게 그림만으로 된 엽서를 보내기 시작함.

1941년
26세 일본에 있던 미술유학생인 김종찬, 김학준, 이쾌대, 진환, 최재덕 그리고 문학수와 더불어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토오쿄오에서 창립전을 가짐. 을 출품 하다. 이어 경서엥서 열린 전시에도 출품하다. 이어 경성에서 열린 전시에도 출품하다. 5번째 지유 텐에 과 출품, 회우로 추대되다. 어머니와 형의 권유로 대향 이라는 호를 지음. 휴가로 돌아와 개성박물관에 다니며 스케치에 몰두했다. 조선신미술가협회의 주동자인 이쾌대의 형 이여성과 그를 통해 알게 된 미술사학자 고유섭의 글을 읽고 감화받은 결과로 보인다.

1942년
27세 6번째 지유텐에 회우로서 , , , 등을 출품하 다. 경성에서 식민 당국의 종용으로 신미술가협회로 바뀐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다. 시인 오장 환, 서정주와 교유한 것으로 보임. 시인 서정주의 증언에 의하면 마사코가 경성으로 와 놀다가 갔다고 한 다.

1943년
28세 7번째 지유텐에 이대향(李大鄕)이라는 이름으로 , , , , , , , 을 출품하다. 특별상인 태양상을 수상하고 회원으로 뽑힘. 서울에서 3번째로 열린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기 위해 조선으로 갔다가 일본으로 다 시 가기를 포기하다. 징병을 피하기 위해 고아원 등에서 일하기도 하나, 그림은 거의 못 그리게 됨.

1945년
30세 4월 마사코가 천신만고 끝에 홀로 현해탄을 건너 원산으로 와서 결혼함. 아내의 이름을 이남덕으로 바꾸다. 분가하여 따로 집을 마련해 살다가 소련의 대일 폭격을 피해 다시 이사함. 여기서 8. 15를 맞이함. 10월 서울에서 열린 전람회에 출품했다. 최재덕과 지금의 서울 미도파백화 점 지하에 복숭아나무에 매달린 아이들이 등장하는 벽화를 그리다. 명동의 술집에서 친구가 부당하게 여러 사람에게 뭇매질을 당하는 것을 말리다가 순찰중이던 미군정 헌병에게 방망이로 맞아 머리가 터지다. 벽화 사례금으로 골동품을 사서 원산으로 돌아감. 이해말 평양 체신회 관에서 황염수 등과 6인전 개최.

1946년
31세 2월 조선조선예술동맹의 회화부원이 됨. 원산사범학교의 미술교사가 되었으나 작업 에 전념하기 위해 금새 사직. 닭을 키우며 이를 그리는데 열중하다 이가 옮아 고생하다. 첫 아들이 태어났으나 곧 죽음. 연말에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공동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를 그림. 시 내 용과 더불어 표지 그림이 북조선문학가동맹의 규탄을 받아 문초 받음. 이후 부인이 일본인 이라고 하여 친일파로 치부된 점과 더불어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수 없다고 하면서 자주 술 마시고 주정을 부리기도 했다고.

1947년
32세 6월 친구인 오장환의 시집 나사는 곳 의 속표지 그림. 8월 평양에서 열린 8. 15 기념 전에 를 내다. 이를 본 소련인 평론가의 호의 어린 평가를 받기도. 아들 태현 태어나다.

1949년
34세 봄 아들 태성 태어나다. 원산 시외인 송도원으로 이사. 소를 하루 내내 관찰하다 소 주인에게 고발당함. 원산에서 가까운 강원도 금성에 살던 화가 박수근과 친하게 됨. 1950년 35세 6월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가장인 형이 행방불명되다. 10월 집이 폭격으로 부서져 가까운 친척집으로 가서 머물다. 전세가 바뀜에 따라 남한군 북진. 원산에서 신미술가협회를 결성 하고 회장이 됨. 12월 초 다시 바뀐 전세에 따라 부인, 두아들, 조카 영진을 데리고 부산에 다다름. 범일동의 창고에 거처를 정함. 부두에서 짐 부리는 일에 잠시 종사함. 이때 껌을 훔친 소년을 잡아 마구 때리는 군인을 말려도 듣지 않자 화가나 군인을 때리다. 못 견딘 군인이 패를 지어 다시 나 타나서 휘두른 총개머리판에 맞아 머리에 큰 상처를 입음.

1951년
36세 이해초 가족과 부산을 떠나 제주도에 다다르다. 여러 날 걸어서 서귀포에 도착. 은 이때의 체험을 그린 것임. 서귀포에서 만난 주민이 방을 내주어서 안착하게 됨. 피난민에게 주는 배급과 고구마로 연명하는 한편, 게를 잡아 찬으로 하다. 장차 벽화를 그리기 위해 갖가지 조개를 채집하여 솜으로 싸 두다. 선주에게 사례하기 위해 6폭의 병풍 형식의 그림을 그려 주다. 부산에서 열린 월남작가전에 출품하다. 12월 다시 부산으로 가다. 오산학교 동창을 만나 범일동에 있는 판자집을 얻게 됨. 일본의 처가로부터 소액의 원조금이 오다.1952년 37세 국방부 종군화가단에 가입하다. 영도에 있는 대한경질도기회사에 다니던 친구 황염수 를 매개로 그 공장에서 당시 미술대 학생이던 김서봉과 두어달 같이 지내다. 3. 1절 경축미술전에 내다. 곤란이 계속되어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곧 일본의 친정으로 감. 부인과 두 아들에게 보내는 그림편지 시작되다. 박고석, 한묵 등과 기조 동인을 결성하고 르네 상스다방에서 전람회를 열다.

1953년
38세 부인이 남편 이중섭의 생활과 제작비를 위해서 오산 후배인 해운공사 소속의 승무원에게 일본서적을 외상으로 보내고 이익의 일부를 이중섭에게 주기로 했으나 어김으로써 거액의 빚을 지게됨.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실망과 고민을 안게 되다. 8월 선원증을 입수해 일본으로 갔으나 일주일 남짓 만에 귀국. 유강렬의 호의로 통영으로 가서 제작하고 개인전을 열다.

1954년
39세 봄에 화가 박생광의 초대로 진주에 머물면서 제작하고 이를 다방에서 전시함. 서울로 가다. 부인이 진 빚을 갚기 위해 개인전을 열 계획함. 경복궁미술관에서 열린 대한미협전에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