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를 배신한 ‘오우삼판’ 삼국지라고 말하는 편이 옳다. 할리우드에서 다시 동양으로 건너온 그는 ‘의’(義)와 ‘리’(理)의 세계로 이루어진 동양적 정서와 함께 마초적 낭만주의를 구현하고 있다.
드라마는 실패를 사랑한다. 역사는 성공을 기록한다.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대문자의 기록은 승리한 자의 언어와 기억을 남긴다. 하지만 드라마는 다르다. 우리는 때로 승리가 아닌 결국 실패로 끝난 자의 삶을 이야기로 회고한다. 이는 역사가 우리가 옳다고 믿는 윤리나 도덕대로 결론지어지거나 기대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하 )만 해도 그렇다. 은 가히 삼국지의 하이라이트요,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결국 역사의 승자인 조조, 위나라의 성공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은 위나라, 조조 군의 참혹한 실패를 기록하고 있다. 의 절정이 최종적 패배자인 동오와 촉나라의 승리로 꾸며져 있다는 것은 역사와 이야기의 아이러니를 짐작케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즐기고 싶은 ‘이야기’란 역사적 결과와는 사뭇 다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엄밀히 말해 은 ‘오우삼판’ 삼국지라고 말하는 편이 옳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왜 하필, ‘적벽대전’에 오우삼이 관심을 가졌냐는 사실일 테다. 알려져 있다시피, 오우삼은 의 성공 이후 바로 을 제작, 감독하고자 했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스케일과 제작비용에 작업은 차일피일 미뤄졌고 18년 만에 실제 제작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은 오우삼이 미국으로 건너가 작업했던 최근의 작품들 나 과 같은 작품들보다는 의 정서와 더 가깝다. 그렇다면 ‘의 정서’란 어떤 것인가?
오우삼은 아시아 5개국의 투자로 이루어진 이번 작업에서 의 이야기 질감 자체가 아니라 동양의 정서를 담고 싶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가 말하는 동양의 정서란 ‘의’(義)와 ‘리’(理)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의리’란 사전적 의미에서, ‘사람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며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지켜져야 할 도리’로 등재되어 있다. 오우삼의 필모그래피를 통해서 의리는 두 남자 사이의 끈끈한 우정과 충정으로 수렴된다. 그리고 과연 오우삼은 두 남자 사이에 지켜져야 할 신뢰를 곧 ‘인간’이 지켜야 할 관계의 법칙이자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을 비롯한 홍콩에서 만든 그의 모든 초기 작품이 바로 이 의리라는 원대한 원칙 아래 정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의 주인공 중에서 유비와 그의 장수들의 관계를 의리의 대명사로 환기한다. 반면, 조조는 용병들을 이용해 승리만을 쟁취하는, 능력 있지만 간악한 수장으로 기억하고 싶어 한다. 어쩌면 이는 결국 혼란을 잠재우고 왕이 된 승리자에 대한 심리적 보상심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한편 결국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를 아는 올바른 사람이라 해도 반드시 왕이 될 수만은 없는 현실의 아이러니에 대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조조의 대참패가 그저 역사의 한 페이지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여러 차례 다른 방식의 예술적 양식으로 노래해왔다. 경극으로, 판소리로 은 호쾌한 남자의 이야기라면 빠질 수 없는 소재로 각인되어 있는 셈이다.
오우삼판 에서 빛나는 의리는 바로 동오의 주유와 촉나라의 제갈량이 나누는 지적인 교감이다. 이 지적 교감은 ‘지음 설화’를 영화화한 듯한 거문고 연주 장면에서 충분히 재연되고 있다. 두 사람은 전쟁에 참여해달라는 설득과 그러하겠노라는 대답을 두 사람만이 이해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거문고 연주로 응대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귀에는 그저 음악으로 들릴 뿐인 이 장면을 통해 오우삼은 제갈량과 주유의 지적인 우아함과 고상함을 입체화한다.
이 장면에서 구체화되는 것은 두 사람의 지적인 우수함이라기보다는 사람다운, 그리고 남자다운 면을 알아보는 인격이다. 이 본격적인 전쟁 서사라기보다는 전쟁을 준비하는 예고편 혹은 번외라는 이미지를 주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등장인물이 지닌 인격의 고아함을 강조하는 부분은 주유가 자신의 병사들 가운데서 범인을 색출하는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절영지회의 고사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장면에서 주유는 자신의 부하를 보호하기 위해 모두가 다 범인이고 모두 다 범인이 되지 않을 대책을 마련해낸다. 발목에 진흙을 묻힌 자가 범인이라는 제보에 모든 병사들로 하여금 진흙밭을 건너게 한 것이다. 제갈량은 주유의 전법이 낡은 것이라 비난하지만 이 장면에서만큼은 그의 인격에 대해 공감과 존경을 표하게 된다.
그러니까 은 제갈량이라는 인물과 주유라는 인물의 남자다운 연합, 의리를 전제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굳이 소교라는 여인이 이 거대한 전투의 원인이 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소교는 매우 아름다운 여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에서는 제갈량이 동오를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부러 소교를 탐하는 조조의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우삼은 이 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여 이 거대한 전쟁의 원인을 남의 아내를 탐하는 조조의 도착적 욕망에 두고 있다.
남의 아내를 탐하는 조조의 욕망은 그 어떤 욕망보다 소인배적인 것이며 도착적일 뿐만 아니라 비겁하다. 이는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지략을 짜내고 돈으로 용병을 사들여 징집하는 것 이상의 패륜이며 비겁함인 셈이다. 도덕적이나 인격적인 면에서 이미 오우삼은 조조를 패자로 설정하고 있다. 비록 역사의 기록은 다를지언정 오우삼에게 있어 조조는 남자로서 갖춰야 할 필연적 의리를 망각하고 있는 소인배에 불과한 것이다.
주유와 제갈량의 만남이 진짜 남자들의 신뢰를 보여준다면 주유와 소교의 사랑은 오우삼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낭만적 원본성의 변주라고 할 수 있다. 다소 뜬금없이 느껴지는 소교와 주유의 러브신 역시 마찬가지이다. 적벽 앞 진지로 날아 들어오는 흰 비둘기처럼 이러한 장면들은 오우삼 특유의 인장으로 받아들여지긴 하지만 시공을 초월해 등장한 박래품처럼 낯설기도 하다. 한 여자에 대한 사랑을 지키는 것과 그 아름다운 사랑의 실체야말로 남자들 간의 의리 안에 자리 잡은 뜨거운 진심이라는 태도 말이다. 아름다운 여자를 전쟁의 원인이자 진짜 남성의 필수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은 중국 영웅호걸을 다루는 무협지의 관습이기도 하지만 한편 오우삼의 남자들 세계에도 깊숙이 배어 있는 낭만적 마초근성이기도 하다. 치명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과 진짜 남자라는 대입도 마찬가지다.
에서 눈에 띄는 것은 무엇보다 아날로그 전투의 묘미일 것이다. 전략이나 전술이라는 개념보다는 어떤 기계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관건이 된 현대의 전쟁, 그리고 전쟁 모델의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지략의 개념이 흥미를 끄는 것이다. 마치 가 여러 가지 전형을 감각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남성미를 전경화했듯이 역시 구궁팔괘진이나 연안법과 같은 전략을 시각적으로 제시하는 데 집중한다. 글로 읽고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전략과 전법을 시각적으로 재현하고 그것을 감각하는 흥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어차피 은 10만과 100만이라는 전략상이나 수치상으로 말도 안 되는 규모의 전투를 다루고 있다. 2부에서 펼쳐지게 되겠지만 승리의 비결이 제갈량의 지혜를 넘어서, 주술적 행위에 기대고 있다는 것만 해도 그렇다. 누군가는 엄밀히 말해 100만의 대군이라는 숫자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 마침 동남풍이 불었느냐 혹은 100만 대군이 가능했느냐가 아니다.
불가능한 동남풍을 불게 하는 것은 사실상 오나라와 촉나라의 군대가 승리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일반 대중들의 희망이며 그들의 관계야말로 의리의 결정체라고 믿는 범인들의 믿음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야기는 다음 2편에서 오우삼이 또 어떻게 역사를 배반하고 자신만의 을 완성하느냐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야기는 힘이 세서,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결국 또 다른 원전이 되기도 한다. 영원한 원전이 없다는 뜻이다. 어쩌면 오우삼은 을 새로운 ‘적벽대전’의 원전으로 제시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진짜 의리를 아는 명장들의 빛나는 전투, 결국 아름답게 빛날 패배자들의 승리담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