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필리핀] 8대 불가사의, 바나우에를 가다 - 1st day 마닐라 / 코닥출사단

김보미 |2008.09.17 09:55
조회 711 |추천 0

 

 

 

 사소한 결정 

 한 달 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거기걸스의 일원으로 코닥 출사단에 임하게 되었다는 소식과 나의 출사 지역은 바나우에로 예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한 전화였다. 바나우에, 마닐라에서 버스로 10시간을 달려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는 지역, 필리핀에서 몇 안되는 고산 지역… 간단한 지역 정보를 전하더니 대뜸 괜찮겠냐고 물어왔고 정 힘들다면 지역을 바꿔주겠다는(내용은 그랬으나 어지간해서는 바꾸지 말라는 어투였다) 귀 번뜩이는 제안도 해왔다.

 

 평소의 나라면 당연히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꿔주세요! 라고 외쳤겠지만, 그날의 나는 무엇에라도 홀렸는지 바꾸지 않겠노라고 대답을 전했다. 전화를 끊고 난 후 미묘한 두려움과 후회가 나를 거세게 덥쳤지만 마음 한 켠에는 알 수 없는 기대가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4박 5일간의 오지 탐험. 그 것은 이처럼 사소한 결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총 이동시간 50시간의 시작 

 

 나는 대구 밑에 붙어있는 작은 동네, 경산에 살고 있다. 이 동네에서 오전 8시 30분에 마닐라로 떠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는 야간 버스를 타고 5시간을 달려야 한다. 덕분에 나의 무모하고도 무리한 여정은 25일 0시 30분부터 시작되었다. 5시간, 그건 그저 이동시간 50시간의 십분의 일에 불과했다.

 

 

 

 

 

 별조차 모습을 감춘, 가로등만이 반짝이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또 달리고, 떠오르는 태양을 조우할 때쯤 버스는 인천공항 출국장에 도착한다. 시간은 5시 30분. 모임시간인 6시까지 30분 가량 남았고 모임장소인 G구역에는 나처럼 먼 곳을 향해 떠나는 불특정 다수들이 각자의 여정만큼의 짐을 손에 든 채 몰려 있을 뿐, 함께 바나우에로 떠나기로 한 팀원들은 아직 눈에 띄지 않았다.

 

 20여년을 살아오면서 코리안 타임korean time의 존재를 여실히 깨달아왔기 때문에 일찌감치 책 한 권 손에 들고 벤치에 몸을 묻었다. 어째서일까, 설렘도 기대도 심지어 떠나기 전부터 나를 집요히 괴롭히던 미묘한 두려움 마저 지금 이 순간만큼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내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 있었고 박민규의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들려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하나 둘씩 모인 팀원들. 놀라운 사실은 5명 모두 정시 전에 도착해서 G구역 도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인솔자인 야후!코리아의 이훈 대리님은 새벽 4시에 도착했다고. 지금껏 수많은 모임에 참석해 봤고 무수히 많은 지각생들을 봤고 나 역시 가끔 코리안 타임을 적용시켜왔다. 이처럼 단 한 명도 늦지 않은 모임은 처음이었다. 출발이 좋다. 잠시 잊고 있었던 기대감이 새싹처럼 돋아났다.

 


 

 

 


 소심하고 예민한 나는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까지 몹시 불안해 하는 편이다. 중요한 무언가를 집에 두고 온 것은 아닐까, 같이 소소한 것부터 무사히 다녀올 수 있을까, 같은 총체적인 것까지 대수롭지 않은 사항마저 나의 불안을 가중시킨다. 그리고 무사히 궤도에 오른 그 순간 조금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어 불안감을 떨어내고 여행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만 뇌 주름 속에 새겨 넣는 것이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린다. 잠시간 온 몸으로 압력을 느낀 후 찾아온 평안함. 나의 뇌는 부지런히 기대감과 설렘을 주름 속에 새기기 시작했다. 나는 바나우에Banaue로 간다.

 


 

 

 

 파사이Pasay공항에 도착하자 훅 하고 불어오는 더운 바람이 얼굴에 닿았고 동남아 특유의 찬란한 태양이 우리를 반겼다. 거품 낸 계란 흰자처럼 풍부하고 두리뭉실한 구름이 손에 잡힐 듯 넘실거렸고 여기가 바로 필리핀Philippines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이곳에서 팀장님이라고 불리는 가이드님과 합류했다. 이로써 팀원은 6명이 되었다.

 

 


 

 

 점심은 마닐라베이 근처에 있는 팬케이크 하우스pancake house에서 해결했다. 이름답게 팬케이크와 와플waffle을 비롯한 브런치brunch 종류와 다양한 식사 종류가 구비되어 있었고 이름답지 않게 필리핀 식의 요리도 준비되어있었다. 내가 선택한 메뉴는 필리핀 식 돈가스인 포크비엔나pork vienna(P198). 기름 속에서 춤이라도 춘 것처럼 반듯하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그 맛은 꽤 괜찮았다.

 

 필리핀 식당치고 음식도 빨리 나왔고(이것은 나중 가서야 실감했다.) 구색도 풍부하고 음식도 좋았다. 디저트로 주문한 망고 파르페mango parfait가 기침이 날 정도로 단 점만 제외한다면 그것도 맛있었다. 이 정도면 한국 음식이 그리 생각나지 않겠는걸? 공항에서 컵라면을 살지 말지 고민하다 그냥 현지음식과 부닥치자는 마음으로 빈 손으로 떠나온 우리의 결정에 뿌듯함을 느꼈다. 그러나 한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우리가 갈 곳은 산골, 오지라는 사실이었다.

 

 

 

 

 

 

 흡족한 마음을 안고 다음에 들른 곳은 인트라무로스Intramuros. 리잘 공원Rizal park 이 리잘이 처형된 것으로 유명하다면 그 근처에 위치한 인트라무로스는 리잘이 처형되기 전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사진에 보이는 성벽은 포트 산티아고로 전략상 요지이기도 하고 스페인과 미국이 식민지로 다스렸던 곳이기도 하다. 스페인 시절에는 수감소 역할을 했고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좋아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는 것은 예전과 다르다고 했던가. 아쉽고도 부끄럽게도 필리핀 역사에 무지했던 나는 가이드가 알려준 최소한의 지식에 해당하는 것만 볼 수 있었다. 필리핀 독립의 아버지라 불리는 리잘이 수감되었던 지하 감옥, 처형 당하던 날의 행로를 기록한 발자국, 그리고 박물관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이 곳에서 현지인 윤언니와 합류, 최종 팀원 7명 완성.)

 

 익숙하지 못한 뜨거운 태양 빛이 넘실거린다. 어깨에 짊어 진 카메라의 무게가 곱절로 느껴질 때쯤 더위를 쉴만한 장소로 이동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는 레스토랑에서 차 한잔하며 여유를 만끽하려 했지만 아쉽게도 영업 준비 중이었고 그 근처 눈에 띄는 카페에 자리 잡았다.

 

 

 

 

 목적했던 곳은 아니었지만 자리 잡은 카페가 위치한 골목이 소박하고 아기자기했기 때문에 아쉽지는 않았다. 야외라 조금 덥긴 했지만 그늘이 있었고 바람이 있었기 때문에 견딜 만 했다. 도리어 필리피노의 모습을 찬찬히 둘러볼 수 있어 꽤 쏠쏠했다.

 

 필리핀에 가면 산미구엘San Miguel을 죽도록 먹어주겠다는 각오로 왔기 때문에 냉큼 산미구엘을 주문했다. 다른 팀원들은 할로할로(halo-halo; 필리핀식 팥빙수), 커피, 망고 주스를 주문했는데 음료는 주문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하나하나씩 천천히 나오기 시작했다. 점심을 먹었던 팬케이크 하우스의 식사보다 더 늦게 나온 음료였지만 누구 하나 짜증내지 않았다. 그렇다, 이 기다림이 필리핀이고, 이 여유로움이 여행이다.

 

 

 

 

 바나우에 팀 일정표에는 유독 첫째 날에 마사지massage가 예정되어 있었다. 마사지! 마사지를 몹시 좋아하는 나로서는, (마사지를 받고 온 몸의 근육이 흐물흐물 되어 오지 탐험을 할 수 있거나 말거나,) 기대되는 일정이었다. 일전 세부에서 마사지 받았을 때, 아프면서도 노곤해지던 그 기분이 떠오르면서 더욱 기대감이 차올랐다.

 

 신선놀음이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마사지 가게 Hue는 고즈넉하고 편안한 느낌이었다. 최소한의 조명만 있는 마사지 실은 절로 심신이 풀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깨끗하고 편안했으며 마치 다실 같은 분위기였다. 정갈한 매트릭스, 그 위에 예쁘고 단정하게 개어진 담요와 수건, 목 베개. 이런 것들이 마사지를 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마사지를 받을 때 몸이 더욱 이완되도록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아, 너무 마음에 들어. 나도 모르게 감탄을 흘린다.

 

 마사지사 손에는 전류가 흐르는 게 분명해! 출발 직전까지 밤샘 작업을 하고 전날 인천공항 가는 리무진에서 새우잠을 잤으니 뭉친 근육이 죽을 만큼 아프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적당한 고통과 함께 몸이 노곤하게 풀리면서 스르륵 자꾸만 눈이 감겼다. 세부에서 마사지를 받았을 때는 아프지만 잠이 오는 느낌이었는데, 이곳에서의 마사지는 살짝 아프지만 계속 꾹꾹 매만져 줬으면 하는 마음이랄까. 1시간 반이 부쩍 흘렀다. 아쉽다아쉽다아쉽다. 따뜻한 차 한 잔으로 아쉬움을 달래보지만 그 아쉬움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바나우에 팀의 처음이자 마지막 해변. 이것도 해변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발가락을 간지럽히는 하얀 모래도 없고 참방 참방 소리나도록 물을 튀길 수도 없다. 없어도 될 법한 둑 덕분에 필리핀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석양의 아름다움도 구름 때문에 제대로 만끽할 수 없었다. 첫끗발 개끗발(아님)인생만사새옹지마人間萬事塞翁之馬라고 했던가, 출발이 좋은가 싶더니.

 

 

 

 

 

 대신 또 음식이 입에 맞더라. 시원한 맥주 한 잔에, 후덥지근한 마닐라 날씨가 확 날아갔다. 신기한 것은 이렇게 온통 섬인데 바닷가 마을 특유의 짠내가 안 난다는 것. 부산은 역에만 도착해도 짠내가 진동을 한다. 그렇게 그 동네는 바다가 온몸으로 존재를 표현하는데 이 곳 바다는, 거참, 신기하다.

 

 

 

 

 

 SM 내에 위치에 있는 왕마트에서 오지를 견디기 위한 컵라면 10개 득템. 오지에 대처하기 위한 우리의 자세는 번외편으로 상술하겠다. (귀찮지 않으면.)

 

 

 

 

 예약은 해두었지만 믿을 수 없는 필리피노들의 낙천적인 성격 때문에 출발 시간 10시보다 한시간 가량 일찍 터미널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속았다. 필리핀 관광청 직원은 우리가 탈 버스가 이 동네서 엄-청 좋은 버스라고 강조했더랬다. 10시간쯤 가뿐하다고 했더랬다. 심지어 차내에 화장실이 있다고도 했다!!!!!!!!

 

 그런데그런데그런데그런데!!! 이건 뭔가요. 나름 촌에 사는 장마양도 이런 버스는 정말 오랜만에 봤다. 얇은 좌석 시트, 낡은 차체, 언제 세탁했는지 알 수 없는 커튼, 다리 짧은 나조차 무릎이 닿는 좌석 간격… 이 버스도 10시간, 평균 수면 시간인 8시간 보다 긴 10시간을 달려가야 한다. 강탈하고 싶을 만큼 지윤언니가 챙겨온 목베개가 탐이 났다. 하지만 이걸 뺏으면 앞으로의 일정에 심적으로 차질이 있겠지. 찌질하고 원초적인 갈등을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고 잠을 청했다.

 

 그래 자자, 일어나면 바나우에일거야. 아니면 꿈에서 깨어나거나.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