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최고의 컴퓨터 BESM6(베슴식스) 소련에서 계획경제가 실패한 것에 대한 소회는 사람마다 제각각이겠지만 필자에게는 1960년대 초 사회주의 실현의 문턱에서 무너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소련은 고스플란이라는 중앙계획기구에 칸토로비치와 같은 천재수학자를 가지고 있었고, 한편 레베제프라는 컴퓨터의 천재를 갖고 있었다. 이 두사람이 상징하는 것은 계획경제를 위한 수학적 기법과 컴퓨터라는 계산기구를 동시에 보유하고 있는 잠재력이다. 알렉 노브는 그의 저서 "실현 가능한 사회주의"에서 시장을 대치할 수 있는 계획, 그 자체에 대해서 계속 회의를 한다. 그러나 알렉노브의 회의는 계획 그 자체의 복잡성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실패의 경험"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에 불과하다. 약간의 복잡한 계산도 그에게는 불가능으로 보인다. 심지어 노브의 논리대로라면 요즘 택배회사직원이 아침마다 다른 배달지에 다른 소화물을 배달하는 것을 "계획"하는 것도 불가능해야 한다. 알렉 노브에게는 섭섭한 일이겠지만 독점자본이 고도화되고 있는 현대자본주의에서 육고기에서 가전제품까지 유통과 생산을 통합한 '계획'의 기제(도구)는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반면에 계획경제를 실현할 "계획의 기술"이 구소련에서 이러타할 유산으로 남겨지지 않은 것은 의아한 일이다. 사실은 80년대 이후 유실되었다는 것이 정확하겠지만 말이다. 유실된 성과와 한계를 밝히는 것은 알렉 노브와 같은 회의론자들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노동해방의 전망을 보다 구체화하는 것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된다. 칸토로비치를 축으로 1920년대 패기 있게 시도되었던 고스플란의 계획화 이론과 이를 뒷받침할 수 있었던 1950년대 이후의 소련의 컴퓨터 기술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소련에서의 컴퓨터 발전 소련 컴퓨터의 아버지라면 레베제프를 든다. 1945년 소련에서 최초로 아날로그 컴퓨터를 만들었고, 침실에서 그의 안해가 의아해하는 가운데 1과 0을 가지고 씨름을 하며 디지털 컴퓨터의 기본개념을 확립해 나갔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49년에는 독창적으로 플립플롭이라는 컴퓨터 기술의 기본원리를 창안해 냈다. 1952년 진공관으로 만든 컴퓨터로서는 서구의 ENIAC에 필적하는 그러나 훨씬 성능이 좋은 MESM이라는 컴퓨터를 개발하는 데 주역을 맡은 그는 끊임없는 노력속에서 1962년 세계에서 가장 성능이 좋은 (더욱 놀라운 것은 외부의 도움 없이 거의 그의 독창적 이론에 입각해) 반도체를 이용한 BESM6을 개발해 냈다. 이 22만개의 반도체로 이루어진 BESM6덕에 소련은 화성으로 우주선을 보낼 수 있었으며, 76대에 이르는 BESM6를 병렬 연결하여 한쪽 길이만 수천km에 이르는 소련전역방공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 BESM6에 기초해 발전해 온 소련방공망의 우수한 기술력은 북한의 인공위성발사 해프닝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대륙간 탄도탄이라고 난리를 치던 미국을 머쓱하게 만든 것이 바로 소련방공센터의 북한 인공위성 발사궤적 발표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련의 서방사회에 대한 컴퓨터기술 우위는 컴퓨터기술 전 분야에 걸친 것은 아니었고 1950년대부터 한가지에서만큼은 미국에게 확실히 밀린 부분이 있었다. 이른바 휴먼인터페이스, 즉 사람과 컴퓨터간의 대화를 가능케 하는 장치에서 미국은 한 천재 덕분에 일찍부터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MIT교수였던 포리스터는 미공군의 방공망(SAGE)을 구축하는 프로젝트를 맡아 1950년대 말에 거의 독창적인 노력으로, 요즘 우리가 흔히 보는 컴퓨터의 인터페이스 기본얼개를 만들었다. SAGE에는 그 전 세대 컴퓨터에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장치들이 등장했다. 모니터, 라이트 펜(마우스와 같다고 보면 됨), RAM(자기코어로 만들었다), 보조기억장치로서 자기테이프(하드디스크의 아버지뻘), 모뎀, 이 모든 것은 요즘 컴퓨터에도 그대로 쓰이고 있는 장치들이다. 놀랍게도 이 수많은 장치를 한사람-포리스터가 고안하고, 개발을 주도하였다. 휴먼인터페이스에서의 미국 컴퓨터 기술의 우위는 1980년대 애플컴퓨터에서 90년대 말 넥스트 컴퓨터까지 미국컴퓨터 기술의 세계우위를 보장하는 확실한 강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 혹은 상호대화를 중요시하는 기술개발의 방향은 인터넷, 그리고 웹으로 꽃을 피우게 되었다. 2. 연구실에서 암시장으로 우주과학에서의 경쟁은 결국 컴퓨터 기술에서 결판이 났는데, 마침내 미국은 1969년 3대의 미니컴퓨터를 탑재한 아폴로 우주선과 언제 고장날 줄 모르는 1대의 미니컴퓨터를 탑재한 달착륙선으로 달에 인간을 날려보냈고, 경쟁에서 승리했다. 60년대 수상이던 코시킨은 미국의 아폴로 계획이 소련을 점점 추월할 기세를 보이자 소련 컴퓨터 과학자들을 향해 길길이 화를 냈는데, 그로서는 미국의 컴퓨터 기술 우위가 소련을 우주개발에서 결정적으로 제친 요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코시킨은 소련 컴퓨터 과학자들을 불신했고, 먼저 앞서간 미국 컴퓨터의 복사기종(요즘으로 치자면 호환기종)을 생산하는 방향으로 소련컴퓨터 산업을 개조할 것을 명령하였다. 뒤꽁무니를 따라가는 사람이 추월하는 경우는 절대 없는 법, 결국 소련은 컴퓨터산업에서 서방에 시종일관 밀리기 시작했다. 사실 전자산업 전체가 미국에게 밀린 것은 아니었으나 컴퓨터 산업은 비참한 수준으로 밀리게 되었다. 80년대부터 소련의 컴퓨터 산업은 경쟁에서 완전히 뒤쳐지고 암시장을 뒤져 미국컴퓨터를 구매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슬라브족 특유의 너스레는 잃지 않았는데, 소련은 미국컴퓨터를 밀수하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목을 매달 밧줄을 우리에게 팔고 있는 것이다." 3. BESM6는 왜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했는가?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되는 것은 1962년 2세대(트랜지스터로 만든 컴퓨터)컴퓨터의 최선두였던 BESM6가 (BESM6는 실제 당시 서방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컴퓨터의 표준으로 나서지 못한 점이다. BESM6의 존재는 군사상의 필요에 의해서 베일에 쌓여있었으나, 실제 베일이 더 가중된 것은 BESM6가 실제 양산된 해가 1967년으로 거의 5년의 세월이 걸렸기 때문이다. 결과 1962년에는 최신기종이었던 BESM6가 1967년에 와서는 평범한 컴퓨터가 되었다. 게다가 컴퓨터는 이미 개발된 품종이 양산되며 새로운 모델 개발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상식인데도 양산 기간동안 새로운 기종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은 많은 사람에게 의문을 주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결과의 원인 중의 하나는 참으로 엉뚱하게도 사이버네틱스 논쟁에 소련과학계가 휩쓸려 간 것이다. 사이버네틱스 논쟁을 촉발한 것은 당시 러시아어로 번역된 수학자 위너(Norbert Wiener)의 "사이버네틱스 혹은 생물과 기계와의 대화와 제어"≪Cybernetics or control and communication in the animal and the machine≫라는 책이었다. 위너는 앞서 등장한 포리스터의 연구에도 많은 영향을 준 당시에는 선도적인 컴퓨터 과학의 이론가였다. 위너는 이책에서 요즘은 흔히 사용하는 인풋, 아웃풋, 피드백이라는 단어를 처음 제안하였고, 인공지능, 제어기술, 컴퓨터 통신 등의 기초개념을 창안하였다. 소련과학계에서는 위너가 이 책에서 언급한 한 마디가 화근이 되었다. "창조자가 그것도 전능하지 못한 창조자가 자신의 피조물과 어떻게 겨룰 수 있단 말인가? ' 이 말은 즉 기계가 종국에는 인간에 승리하는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소련은 지금으로 보면 386컴퓨터에 불과한 조잡한 기계를 앞에 두고, 정치와 계획경제, 그리고 인간의 역할을 주제로 해서 수년 동안 논쟁을 벌였고, 과학자들은 그들이 원치 않던, 원하든 이 논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65년이 거의 다되어 현명한 한 관료의 개입으로 논쟁은 마무리되고, 컴퓨터 개발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논쟁의 여파는 컴퓨터 기술을 사회전체로 확산시키기 위해 필요했던 과학자들의 집단적인 노력과 대규모 투자를 어렵게 하였다. 4. 사이버네틱스 논쟁과 계획경제 소련은 우수한 천재들의 노력으로 선도적인 컴퓨터 기술을 발전시키고 60년대 초에는 분명 최선두의 지위를 가졌지만 그 이후에는 내리막을 갈 수밖에 없었다. 책 한 권에 그 나라의 정보통신 기술이 주저앉았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비약일 수 있다. 그러나 사이버네틱스라는 개념이 소련의 과학자에게는 20세기 중엽 컴퓨터의 출현과 함께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사이버네틱스 논쟁을 자세히 소개한 글이 없기 때문에 논쟁의 실체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사이버네틱스가 포함하고 있는 내용에서 유추해보면 그 논쟁은 대략 대강을 그릴 수 있다. '키잡이를 뜻하는 그리스어 ‘퀴베르네테스’에서 나온 사이버네틱스는 생물과 기계를 포함하는 계(系)에서 제어와 통신 문제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위너 자신의 정의에 따르면 “어떤 체계에 포함되는 변량에는 제어할 수 없는 것이 있고,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이 때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제어할 수 없는 변량의 값을 바탕으로 제어할 수 있는 변량의 값을 적절히 정해, 이 체계를 가장 바람직스러운 상태로 만들기 위한 학문이 사이버네틱스다.” 이를 위하여 위너는 일반조화해석(一般調和解析), 예측(豫測)과 여파(濾波)의 이론, 비선형통계이론(非線形統計理論) 등 수학상의 새로운 이론을 많이 발전시켰다. 제어와 통신 문제에 관련된 종합적인 과학이므로 이와 관련된 학문의 분야는 매우 광범위하다. 계획경제이론과 관련된 것은 물론이다. 시장을 대신해서 계획을 도입하려던 소련에서 피드백(목표치에 계속 접근해 가는 과정)이라는 개념은 매우 신선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성장이론의 성격(어떻게 자본주의 선진국가를 따라잡을 것이냐?)을 가지고 있고 투자 효율성에 매달리고 있던 소련계획경제이론가들에게 제어와 조절에 초점을 두고 있는 사이버네틱스는 혼란스러운 것이었을 것이다. 한편 정책결정과정에서 정보소통을 중요시하는 사이버네틱스 이론에 따르면 경제관료들의 역할은 사실상 청산된다. 순수한 학문적 요소로부터 정치적 배경까지 사이버네틱스 논쟁은 복잡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일인독재체제하의 소련에서 정치적 논쟁이 과학, 혹은 문학적 논쟁의 탈을 쓰고 진행되는 것이 일쑤였기 때문에 이번에도 논쟁에는 인문, 사회분야의 참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덕분에 소련의 컴퓨터 산업은 논쟁을 하면서 4, 5년을 허송세월하며 보내야 했다. 만약 계획경제를 위한 유력한 조절시스템이 컴퓨터를 기반으로 해서 1960년대 소련에서 창출되었다면 세계의 역사는 분명 바뀌었을 것이다. "BESM6 사회주의"라고 명명할 수도 있었던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아쉽고도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