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환은 죽지 않았다
1. 죽음과 자살
철학적인 의미이든 일상적인 의미이든 '죽음'은 특별하고 예외적인 무엇이다. 당장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그레고르의 죽음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베르터의 그것과는 다르고, 앞으로 언제일지 모를 나의 그것과도 다를 것이다. 다만 카뮈에 따르면, 그 죽음의 공통적인 근원은-그것을 인지할 수 있건 없건 간에-'부조리'일 것이지만 말이다.
태양을 사랑했던 카뮈가 자신의 정신을 밤(夜)과 대면시키고자 했던 이유도 바로 이 부조리 때문이었다. 자신이 대면해야만 할 밤, 그것은 자신에 의해 고의적으로 탄생된 밤이다. 이로써 부조리는 모습을 드러낸다. 그 속에서라면 누구나 절망할 수밖에 없다. 항시 '페스트'가 창궐해 있을, 절망스런 밤일 것이기에. 하지만 그러한 절망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호히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
카뮈가 자살을 거부하게 된 계기는, 우연히 맞이하게 되는 죽음과는 달리 '자살' 뒤에는 부조리가 없을 것이라는 그의 확신 때문이었을 게다. "내일은 없다"던 그에게 내일이 있었다면, 그의 명징한 정신은 부조리 너머로 부단히 비약하기를 멈추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기에 그에게서 부조리가 사라지려던 마지막 순간-카뮈 자신의 때이른 그 죽음의 순간-까지 그는 계속 부조리를 응시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2. 실존을 위한 변신
서두에서 언급한 카프카의 <변신>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그레고르들을 비춰주는 카뮈의 거울이자, 병듦이라는 운명을 타고난 현대인들의 귀로 향하는 창창한 실존의 경고이다. 일상이 있는 곳에 병이 있고, 병이 있는 곳에 '지금-병듦'에 저항하는 '나'가 있다. 그렇기에 '실존하는 나'도 있게 된다. 그레고르에게 이러한 실존은 선택의 문제이면서도 선택할 수 없는 부조리한 그 무엇이었을까?
그가 선택했던 반항 또한 결국은 언젠가 물질의 노예, 즉 일상적 병듦으로 귀결될 것이다. 이러한 선택 불가능한 부조리가 여전히 남는다. 그는 그냥 죽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자살'하지 않았다. "나도 먹고는 싶"지만, "그러나 저런 것들을 먹고 싶지는 않"게 된 계기는 바로 그의 '변신'이었다. '지금-병듦'에서 건강함을 발견해내려는 명징한 정신의 활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벌레가 된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좌절을 거듭하며 '처음부터 그 순서를 밟아가는 것 뿐'이었는데도 말이다.
3. 페스트, 성실성, 존재미학
그렇다,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성실함'. 이것이 주제로 형상화된 카뮈의 텍스트, <페스트>에서도 역시 '죽음'은 일상적이다. 그곳은 한 치도 자살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죽음을 향한 뜨거운 입김을 내리꽂는 알제의 태양에 도시는 '활동'을 멈춘다. 그것은 곧 '정신'의 멈춤을 뜻하고, 돌이킬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부조리로의 투신(投身)을 의미한다. 하지만 어쨋든 그곳은 '나'를 포함한 여러 가능성의 인간들이 삶을, 사랑을 영위해가야만 하는 터전이다.
<페스트>의 주인공 리유의 말처럼, 일상화된 "페스트와 유일하게 싸우는 방법은 성실성"뿐이다. 페스트가 연출하는 절망스러운 데자뷰에 맞서 묵묵히 자신만의 그것을 창조해가는 존재미학. 죽음 이외의 모든 예외적인 것, 병적인 것들은 이 일상적 행위 속에서 재발하기 마련이고, 개인은 이 끊없는 욕창에 절망하면서도 또다시 반항하게 되는 것이다. 일상적 '죽음'을 앞에 둔 인간의 '자살'은 이런 점에서 형용모순이고, 욕창 속에서 성실한 사랑이 꽃핀다는 니체의 말은 타당하다.
4. 현대인의 죽음
이제 한국의 현실로 돌아와, 삭막한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으로 화제를 돌려 보자. 미학자 진중권은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을 자주 언급하면서 두 가지 죽음을 예로 든다. '이기적 죽음'과 '이타적 죽음'. 그리고 이타적 죽음의 예로서 미시마 유키오와 전태일의 죽음을 든다. 하지만 그의 분석과는 다르게도, 카프카의 소설 <변신> 속 그레고르의 죽음뿐만이 아니라 이들의 죽음 역시 이러한 이분법을 뫼비우스의 띠를 걷듯 사뿐히 피해간다.
이타적이면서도 이기적인 죽음. 이는 곧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한 죽음과도 맞닿아 있다. 전태일은 죽었으면서도 죽지 않았다. 형이상학적인 관점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겐 그가 살아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죽음의 원인이 약간의 이기적 동기에 있더라도, 그것은 노동자들의 생(生)과 사(死) 사이를 거침 없이 변주해 줄 이타적 공명(共鳴)이다. 그 공명은 깨어있으면서도 정신이 깨어있지 않는 자들을 위해 '무식했던' 전태일이 들려주는 일종의 경적인 셈이다.
하지만 이기적 죽음과 이타적 죽음의 혼용은 현대인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물론 단순한 형식론적인 혼용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이 엄격히 분리된 곳일수록 부조리하게도 이러한 죽음의 양태는 쉽게 왜곡되고 이용된다. 또한 수단으로서의 물질적 가치나 이데올로기가 전(全) 가치를 지배하려는 음모를 지니고 출몰할 때, 그 윤곽은 더욱 흐려지고 만다. 이 때 미디어는 메시지message가 아니라 죽a mess of pottage(값비싼 희생을 담보한 물질적 쾌락을 비유, 창세기 25장)이다.
5. 죽음 이후, 진리
촛불이 타오르는 순간 그것이 언젠가 꺼질 것을 알듯이, 누군가가 태어나는 순간 그가 언젠가 죽을 것-그것이 자살일 수도 있다-을 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다. 이 죽은 혼이 죽은 자의 육체를 강탈당한 채 유령이 되어 무덤 위를 떠돌고 있다. 죽은 자의 주인은 그 누구도 아닌 죽은 자일 진데……. 반 세기 전 발터 벤야민이 '죽음'을 통해 유물론적 역사 속에 세우고자 했던 무엇은 어디로 갔는가? 그리고 우리는 지금의 이 믿을 수 없는 광경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만은 명심하자. 절대적 빈곤과 같은 극심한 생활고 속에서 모두가 카뮈가 될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이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누군가 '문득, 자살하는 것'은 분명히 가치를 지니고, 어떤 진리를 세울 수 있다는 것. 탐욕을 위해 무덤 속에서 시신을 파헤치고 이용하려는 관음증적 도착자들이나 선동가들의 사적인 그것이 아닌, '그래, 반드시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면서 죽은 자를 위로하는 평범한 이들의 '공적 진리'를 말이다. 이 진리는 내일이 되면 이들을 다시 부조리한 삶으로 돌려보낼 것이고, 무엇에 반항해야 하는지를 알려줄 것이다.
6. 우로보로스, 그는 죽지 않았다.
두 가지 일상적 죽음. 하나,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자살할 겨를도 없이 이루어지는 제3세계 인민들의 죽음. 이들의 일상적 죽음은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다. 이 운명에 대항하는 해방 활동가들 역시 가끔은 이들의 부조리한 죽음 이후를 목도하곤 좌절한다. 그리곤 함께 새로운 운명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것에 의해 또다시 이들에게 찾아오는 것은 '뒤바뀐 운명' 뿐이다. 이들은 살인자가 된다.
둘, 한국에서 최근에 일어났던, 사업에 실패한 한 젊은 연예인의 죽음. 그 죽음은 사회적 안전망이 부실한 한국의 천민자본주의에서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프랙털 구조 내부에 머문다. 그러나 이 연예인의 죽음은 불행하게도 실패를 운명처럼 떠안고 살아가는 수많은 약자들의 슬픔과 분노로 모자이크되지 못한다. 단지 소비될 뿐이다. 촛불 이데올로그들의 만행? 자본주의에서 소비는 소외를 낳고, 소외는 이렇듯 피해자와 가해자를 뒤바꿔 버린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되살아나야 하고, 반성하는 촛불과 함께 우로보로스가 되어야만 한다.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윤회의 뱀, 우로보로스. 그것은 신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진기한 무엇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자신을 파괴하면서도 생성을 거듭해나가는 모든 평범한 이들을 대변한다. 자신의 몸에서 '타인의 죽음'이 야만적으로 소비되려 할 때, 문득 그는 자신의 꼬리를 더 강렬히 삼킨다.
우로보로스는 반성하는 불멸의 주체. 그리고 반성의 시작은 소외돼버린 역사적 현재를 파괴적으로 재조직해서, 생성 중인 자신에게 새로이 기입시키는 것. 우로보로스는 그 자체로 시민이자, 부조리의 존재미학이다. 혹시 그는 고통스럽게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으면서도 매서운 두 눈으로는 자신의 적을 또렷이 응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반항하는 우로보로스, 시민은 죽지 않는다. 안재환은 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