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실법의 부당성을 굳이 말로 풀어 설명하는 것은 1+1이 왜 2가 되는지를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너무나 명약관화한 사실을 두고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다그치면, 우리 같은 평범한 소시민은 그저 가슴을 치며 흥분할 뿐 상대를 논리적으로 설득할 만한 별다른 말이 떠오르질 않는다. 우리한테는 너무나 뻔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천연덕스럽게 전혀 정반대의 결론을 내리는 것을 보면 그저 말문이 막힐 뿐이다. 최진실법을 만들겠다고 공언하는 “나 뭐시기 의원”의 불순한 의도가 눈에 들어오는 데는 0.001초밖에 안 걸리는데, 그 부당함을 설명하자면 참으로 난감하다.
그런데 이런 류의 말도 안 되는 일이 우리 주변에서 아주 많이 일어난다. “유능하지만 부패한 정치인과 언론인들”이 우리 사회의 권력의 핵심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앉아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무도 뻔한 사실을 기막히게 비틀어서 사람들의 판단력을 흐려놓는 참으로 신묘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것들을 하나로 보이게 만드는 술수”와 “대중의 정의심에 호소해서 더 심각한 부조리를 만들어 내는 기만술”을 즐겨 사용하는 듯 하다.
인터넷상에서의 악플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다. 악플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받는 이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악플 자체가 사람을 자살로 몰아갈 확률은 극히 미미하다. 사실상 “0”이라고 봐도 된다. 언론의 폐해 가운데 인터넷상의 악플 보다 심각한 것은 저질 황색 언론이며. 그들이 제공하는 왜곡되고 거짓된 기사로 인해 만들어지는 악플이야 말로 그 당사자에게 심한 마음의 상처를 준다. 그러나 유명인이 개인적인 문제로 자살을 하면 저들은 어김없이 악플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들고 나온다. 저들은 어떻게든 인터넷 언론을 통제할 악법을 만들어야만 한다고 믿고 있는데, 악플은 그러한 악법을 만들 구실을 제공하는 데 더없이 좋은 재료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하는데 악플은 “악”이다. 최진실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악성루머 유포자들은 그에 상응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사이버 모욕죄 도입”은 악플에 대한 방지책이 아니다. 악플을 때려잡아야 한다며 “사이버 모욕제”를 도입하자는 주장을 받아들이면 무슨 일이 생길까? 사이버 모욕제는 피해자의 고소 없이도 수사가 가능하도록 한 법이기 때문에, 정치지향적인 검사들이 마음 먹고 나서면 얼마든지 언론 탄압을 합법적으로 자행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돼 있다. 다시 말해 최진실법을 통과 시키면 정작 인터넷에서 사라지는 것은 악플이 아니고 사회비판적인 정의의 목소리가 될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최진실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악플러 옹호자도 아니고, 악플의 폐해에 대해 무심한 사람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최진실법을 반대한다!’고 말하면 ‘그럼 너는 악플을 방지하지 말자는 말이냐?’라고 되묻는다. 사실 동문서답인데 불구하고 이게 대중에게 효과가 있다. 자본주의의 문제점이나 이명박 정부의 무능함을 지적하면 이미 아무도 신봉하지 않는 ‘빨갱이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우는 것이 보수를 자처하는 무지한 부류들에게는 여전히 제법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부패한 정치인들과 황색 언론의 숨겨진 악마성을 제대로 봐야 한다. “인터넷 악플은 가장 비겁한 집단들이나 하는 짓으로 헌법상·법률상 보호받을 가치가 없다”는 말 속에는 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반대파의 입을 완전하게 봉쇄하고 싶은 독재자의 욕망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히틀러도 정권을 잡기 위해 사회정의를 부르짖었고, 부패한 정치인을 척결해야 한다고 외쳤으며, 그 히틀러의 이중성과 야욕을 보지 못하고 입으로 내 뱉는 말만 듣고 열광한 청년들에 의해 초법적인 폭력이 자행돼서 양심과 정의를 수호하려던 사람들이 무고한 피를 흘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신이 진정으로 최진실이라는 한 유명 연예인을 사랑했고, 그녀의 죽음에 진심으로 애도를 표한다면, 그 불쌍한 죽음을 이용해 언론탄압을 하려는 자들에게 돌을 던져라.
그럴 용기가 없다면 최소한 그들의 더러운 권력욕을 채워주는 도구가 되는 어리석은 대열에 끼어들지는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