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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이지영 |2008.10.13 15:19
조회 32 |추천 0

 

어딘가로 가야만 할 것 같던 공휴일 낮이었다.

음악을 들으며 자전거를 타고 달려야 할 것만 같았다.

가는 길이 수원이었기 때문에 여행 떠나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내 아파트 생활이 시작되었다.

88 올릭픽 불꽃놀이를 아파트 베란다에서 바라보고 있었을 때

내 부모님이 가장 치열하게 살던 한 때였다.

우리는 상계동에 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를 왔고,

모든 걸 새롭게 시작했다.

 

흙먼지가 나부끼던 골목이 시커먼 아스팔트 주자창으로 바뀌고

하얀 왁스를 칠해 반질반질 윤이 나게 닦아야 했던 교실 바닥은 점박이 시멘트 바닥으로 바뀌었다.

난로가 가스 스토브로 나뭇가지 새총 대신 내 손에 BB 탄이 쥐어졌다.

 

이사 오지 않았다면 홍제동에 살아서 옥수동에 살아서 동네 친구가 많다는 그녀들보다

친구가 더 많았을지 모른다.

 

이제 아파트가 아닌 마당이 있는 주택에 살고 싶다.

 

 수원까지 시간을 단축해보겠다고 용산행과 천안행 급행을 두 번이나 기다렸는데,결과적으로 그냥 가는 것보다 한 시간이 늦게 수원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나는 그렇게 급행만 타다 늦게 왔는지 모르겠다. 

 

버스를 타지 않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철이 좋다.

 

버스 안에서 볼 수 있는 거리 풍경과도 바꿀 수 있을 만큼.

 

 

당신과 갔었던 기억이 있나요.

당신과 가지 않았습니다.

확실해요. 나는 단 한 번 당신과 헤어지고 나서

당신이 너무 그리워 또, 다른 이별을 경험한 친구와 이곳을 갔습니다.

 

가슴이 터질 뻔 했었죠.

대천 해수욕장에서 살갗이 따가울 만큼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울었고,

이곳에서 웃어보려고 웃었는데,

사진 속에 나는 여전히 울고 있었습니다.

 

그립냐구요?

당신은 나를 그리워하나요?

 

이렇게 서로 그리워하는지 조차 모르는 사이가 되어버렸는데,

이런 그리움이 무슨 소용 있나요.

 

그저 창밖을 보는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그런 생각뿐이었죠.

당신과 헤어지고 난 후

이곳을 자주 지나쳐야 했을 때 나는 다른 누군가를 보고 싶은 마음에 벅찼더랬죠.

 

우리 서로 그랬던 겁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헤어진겁니다.

 

 

수원역에 도착했습니다.

역사에 큰 쇼핑센터가 있지요. 애경 백화점도 있고, 갖가지 음식점과 CGV도 리브로라는 서점도.

나는 과외를 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에서 쇼핑하고 책을 읽고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막차가 빨리 끊기는 점 말고는 별로 싫을 게 없는 곳이죠.

서울을 벗어나 어딘가로 여행 온 느낌.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을 것 같은 곳.

기차표를 끊어 어딘가로 훌쩍 떠나기도 쉬울 곳 같은 곳.

 

아직 기차표를 끊어 이곳에서 갑자기 어딘가로 떠나보진 않았지만,

나는 잘 압니다. 꼭 한 번쯤은 그러겠죠.

 

 

영화를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수원까지 과외를 하러 1시에 집을 나섰는데, 4시쯤에 도착해서 과외는 7시가 다 되어서야 끝났어요.

4시부터 한 시간 동안은 앞에서 네 번째 줄 가운데 자리 영화표 한 장을 예약했고,

유디트 헤르만의 못다 읽은 단편의 마지막 부분을 마저 읽었고,

검은색 니트 모자와 CK 가죽 가방을 살까 말까 고민하다 내려놓았죠.

 

 

공휴일 영화관은 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그러나 사진처럼 나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저 내 마음만 들어왔을 뿐입니다.

 

 

박해일을 좋아하는 관계로 모던보이를 선택했습니다.공휴일 7시 10분 영화를 혼자 본다는 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걸 새삼스럽게 알았습니다. 나는 혼자 영화를 보러 온 것보다 부랴부랴 나오느라 머리를 감지 못하고 나온 게 걸렸습니다.내가 불편했거든요. 영화는 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니었습니다.군데군데 아쉬웠어요.아쉬운 마음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는데,해명의 '시부럴'이라는 대사에서 한참을 웃었더랬죠. 차가운 밤 공기, 지상 전철역만의 운치, 노르스름한 불빛 아니 따스할 것만 같은 불빛이곳에서나 팔 것 같은 천 원짜리 아메리카노 한 잔영화의 여운. 소설책. 즐겨듣는 음악. 전화가 왔습니다.듣기에도 외로움이 묻어나 있는 목소리.나는 그런 외로움 따위 전철을 타고, 책을 읽고, 그곳을 보고, 과외를 하고, 영화를 보고, 생각을 하고,느낄 수 조차 없었는데, 온종일 누워 있었다고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고 그럽니다. 용산행 급행을 탔고 용산에 내렸다가 다시 대학로로 갔습니다.저녁을 먹었고 소주 반 병 정도를 먹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주절주절 대다가영화 두 편을 더 보고 제로 코크 하나 마시고4호선을 타고 창동역에서 다시 1호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와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일어나고 나니 또, 다른 하루가 시작이더군요.당신도 그럴 거라 생각해요.아무렇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내가 잘못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나쁜 말이지만, 사랑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미안하다는 말도 이런 말도 하지 않는 게 더 좋다는 걸 알지만,바보같이 솔직해서 탈입니다. 이런 하루 그저 보내면 될 것을 그날은 그 사람이 무척 그리웠나 봅니다. 그렇게 잊나 보다 했습니다.성격이 맞지 않다는 말 거짓말인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당신도 그저 그렇게 지나갈 수도많은 의미를 두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랬어요. 잊어주세요. 슬픈 일입니다. 당신을 보며 마음이 아프지 않다는 거.나쁜 사람이 말합니다. 당신 편지 잘 읽었어요. 좋은 사람 만나길.나는 이렇게 못난 사람입니다.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전혀 되지 않는 그런 사람입니다.마음이 따라주지 않아서 그렇게 못되게 굴었습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충분히 벌 받고 있습니다.그건 아마도 시간이 흐른 후 당신도 알게 될 날이 있을 거예요.약속 지켜줘서 정말 고마워요.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참 하루 길었다.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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