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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가 사는 법
김희수(전도연)와 조병운(하정우)은 연인 사이였지만 1년 전에 헤어졌다. 당시에 잘 나가던 펀드 매니저와 결혼하기로 결심한 희수가 병운과 헤어지기를 원해서였다. 결혼을 결정한 희수는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었다. 그런데 그만 결혼은 깨어졌고 희수는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백수가 되고 말았다.
1년 동안 병운과 전혀 만나지 않고 지내던 희수는 그가 빌려가고는 갚지 않은 돈 350만원을 돌려받기 위해 병운을 만나러 나선다. 아직은 햇볕에 온기가 남아있는 어느 초겨울 날. 희수가 뚱하게 부은 얼굴로 병운을 만난 곳은 경마장.
병운은 그동안 희수로부터 빌린돈에 대해서, 아니 희수에 대해서 마치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듯 반색을 하며 그녀를 맞이한다. 희수는 그러나 그가 전혀 반갑지 않다. 그녀는 인사대신 다짜고짜 돈 갚으라는 말을 건넨다.
병운에게는 당장 갚아 줄 여력이 없다. 처음에는 통장 계좌번호를 남기고 가라, 그러면 다음에 입금해주겠다며 이 위기를 슬쩍 넘기려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희수도 만만치 않다. 그의 그러한 버릇을 익히 아는 듯, 아니, 오늘 당장 받아야겠다고 버티는 것이다.
병운은 그래서 희수 차에 동승하여 그가 알고 지내는 여성들을 하나 하나 방문, 손을 내민다. 희수는 내키지 않았지만 병운과 동행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어서 피할 수 없이 그와 가깝게 지내는 여성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병운이 만나려고 애쓰는 여성들 사이에 그가 연락하지 않았던 여성도 우연히 만나고 또 정학을 당한 딸애를 데려와 달라는 어떤 여성의 부탁을 받기도 하면서.
결국 우여곡절 끝에 희수는 원했던 돈을 손에 넣는다. 그리고 그 돈을 돌려받으려고 그악스럽게 병운을 따라다녔던 하루 해가 질 무렵, 그녀는 애초에 병운이라는 인간에 대해 가졌던 빚쟁이의 태도에서 조금 비켜난다.
영화 [멋진 하루]의 줄거리는 이렇게 간단히 요약할 수 있지만 전도연과 하정우라는 두 배우의 연기는 몇 줄의 글로 요약하기가 어렵다. 캐스팅도 좋았지만 두 배우의 능청스러운 연기는 각 캐릭터에게 싱싱한 생명력을 불어 넣어 스크린 위에서 살아 움직이게 한다.
관록 붙은 전도연의 연기는 과연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고 훌륭하다. 그런데 그에 못지 않은 하정우의 연기란!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조병운이라는 캐릭터를 액션으로 표현하게 하려면 도대체 지문을 어떻게 써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런데 그러한 캐릭터를 하정우라는 배우는 썩 잘 소화해냈다.
'편한게 좋잖아'라는 병운의 대사에서 드러나듯, 그는 인생의 무게가 그에게 실리는 걸 거부하는 인간이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어려운 것이 없어 보인다. 객관적으로 보기에 그에게 닥친 인생은 매우 불편하고 고통스럽우며 앞날이 내다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울한 것이 틀림 없는데도 그는 그에게 달려드는 불유쾌한 사람과 상황들을 능숙하게 비켜 나간다.
그렇다고 뻔뻔해서 그런가하면 절대 그것은 아니다. 어려운 상황에 닥쳐도 주변 사람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으려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부탁을 하나도 거절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서는 기품마저 우러난다. 귀공자스런 분위기를 풍기는 하정우라는 배우의 외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이러한 성격은 그의 옷차림에서도 잘 드러난다. 언제든, 어떠한 행동으로도 곧장 옮길 수 있는 가벼운 운동화, 좀 우아한 분위기도 너끈히 감당해 낼 수 있는 세련된 디자인의 세미 캐주얼 코트, 그리고 카멜레온처럼 어떠한 상황에도 잘 적응하는 그의 면모를 단적으로 잘 드러내는 전천후 의상, 후디(hoodie).
병운이 모든 사람에게 그때 그때 진실하게 대하려 한다고 해서 그에게 생각이 없는 것도, 혹은 주변에 대한 인식능력이 없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는 주차해 놓은 차의 윈도우 브러쉬에 끼워진 광고 전단지를 한장 한장 신경질적으로 떼어내서 바닥에 팽개치는 희수와 달리 그것들을 한꺼번에 훑어내듯 쉽게 휙 쓸어서 툭 버린다. 그에게도 광고지는 성가신 것들인 것이다. 그리고 희수와, 정학 당한 얼추 조카뻘 여학생의 성격이 매우 비슷하다는 것쯤도 그는 정확하게 알고 있다. 나아가 희수가 흘리듯 결혼하지 못했다고 중얼거린 말도 놓치지 않고 있다가 희수의 감정이 좀 가라앉았을 때에 그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자 물을 줄도 안다.
하지만 그렇게 훌륭한 매너를 지녔다고 해서 그를 '완전체'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가치 판단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일 예로, 그가 맨먼저 돈을 빌렸던 한여사(김혜옥)에 대해서, '이제 한여사가 내게 도움을 주었으므로 나는 그녀의 어떠한 부탁이라도 들어줄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희수가 '잠자리까지도?'라고 묻자 그것을 포함한다는 것에 그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게 뭐 어때서, 생각에 따라 꼭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는 일이잖아하면서.
그는 어쩌면 지난 1년 동안 험한 세파에 시달렸는지 모른다. 짧다면 짧은 그동안에 조씨 가문의 재산을 거의 모두 탕진했고 결혼하고 두 달만인가에 이혼까지 했으니. 그 와중에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그가 받은 상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는 신념이나 가치 판단을 외면했을 것이다. 그것들을 지켜내려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므로... 오히려 그보다는 밀려오는 잽을 피하는 권투선수처럼 요령있게 세파를 휙휙 피해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만 그 에너지를 긁어다 부었을 것이다.
희수의 차가 병운과 희수에 대해 무관심한 듯한-마치 버추얼 리얼리티의 배경처럼-서울 구석구석을 하루 동안 미끄러져 다니는 것이 차갑게 느껴지거나 짜증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은 아마도 나르시시즘에 젖게하는 나른하면서도 매끄러운 재즈 선률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무심한 멜로디는 병운의 마음과도 닿아있다.
캐릭터와 미장센, 음악이 관객의 마음을 꼭 붙들고 영화의 끝까지 이르게 하는 [멋진 하루]에는 멋지게 허를 찌르는 대목이 간간이 등장한다. 그 중 기억에 남는 두 장면.
희수가 병운을 대면한 경마장에서 병운이 사무실에 들어갔다 나오자 어느 여직원이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따라나와 그를 배웅한다. 그녀와 헤어진 병운이 희수의 마음을 들여다 본듯 스윽 던지는 한 마디, 정말 친절한 아가씨네...뭐... 그런 대사. 그는 희수의 마음을 고스란히 읽고 있었다.
병운이 아쉬운 소리를 하러 마침 바베큐 파티를 열고 있던 사촌의 집에 들렀다. 그곳에서 민망한 상황이 벌어지자 희수가 병운을 잡아채듯 끌고 나오려는데 한 중년의 사내가 병운에게 소시지 좀 가져다 달라고 한다. 얼떨결에 희수에게 끌려 나오던 병운이 화면에 갑자기 frame in 하더니 소시지를 꼬챙이 끝에 찍어 힘 있게 내민다. 그것은 병운이 누구의 부탁도 외면하지 못해서였을까, 혹은 온 몸으로 욕을 하고 싶어서였을까.
암튼, 형체 없는 두려움에 쫓기듯,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며 가느다란 인간관계의 끈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병운의 고단한 삶 중 어느 하루를, 신중하고 타산적인 희수가 함께 보내면서 둘은 서로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연민을 쌓아간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은 다소 진부하나 영화에 잘 녹아들어간 이러저러한 클리셰들로 전달된다.
하긴, 병운의 사촌 집에서 희수를 척 본 사촌의 아내가 물병자리죠? 물병자리는 가끔 사람을 우습게 봐 하는 대사에 이 영화의 핵심이 실려있는 지도 모른다. 그녀의 진단이 타당했다는 것이 영화의 말미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디테일이 훌륭하게 잘 살려진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누가 썼을까라는 의문이 들어 찾아봤더니 나이 지긋한 일본 여성작가가 원작자라고 한다. 사람과 삶에 대한 통찰력을 이렇게 상큼하게 전달할 수 있는 한국의 작가도 어디엔가 있긴 있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