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푸른밤>
2004년 10월 24일 KBS2 드라마시티

+ 남자 이야기 (기태 ; 엄태웅)
나는 나쁜 놈입니다. 아주 쓰레기보다 못한 상종못할 나쁜 놈입니다.
나는 나 밖에 모르고 내가 짜증을 내고 웃기만 하는 착하고 바보 같은 내 여자에게 상처만 주고 눈물만 흘리게 한 나쁜 남자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지은 죄가 많습니다. 여대생들을 데리고 희희낙락 제주도 가이드 일을 하면서 정작 내 여자인 그녀는 한 번도 데려가지 않고, 그렇게 나와 함께 제주도를 가고 싶어하는 그녀에게 대학 못 나온 그녀를 무시하기까지 했습니다. 내가 그래도 그녀는 웃습니다, 바보같이.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도 나는 매번 짜증을 내고 상처 주는 말만 합니다. 직장 잃고 백수로 빌빌대는 나를 위로하는 그녀에게 나는 자존심만 세 가지고는 돈 몇 푼 쥐어주며 마누라 행세 하냐며 얼굴에다가 돈을 내리치기도 했구요, 도박에까지 빠진 내 외상값을 갚으러 와준 그녀에게 나를 위한 말 몇 마디에 자존심이 상해 되레 화만 내곤 했습니다. 그리곤 그럴 때마다 오히려 그녀가 내게 사과하도록 만들어버리는 이상한 놈이었죠. 그리고 난 그녀가 임신을 했다고 말했을 때 당장 지우라고 화를 내고 뺨을 때리며 그녀를 바닥에 내팽겨치기까지 했습니다. 네. 저는 죽일 놈입니다. 정말 나쁜 놈입니다.
그래서 뒤늦게라도 그녀에게 용서를 빌려고 합니다.
남자는 여자를 울렸던 일만 기억한다. 그래서 남자의 기억 속 여자는 항상 힘이 없고 슬퍼 보인다. 남자의 기억 속에 둘의 사랑은 바보같은 여자의 일편단심으로 그려진다. 자기한테 못되게 구는 남자가 뭐가 그리 좋은지 여자는 매달리고 또 매달린다. 남자는 밥 해 주는 여자한테 발길질로 허리를 툭툭 치고, 취직을 걱정하는 여자에게 자존심을 내세우며 오히려 그녀를 무시하고 나무란다. 그녀가 남자를 생각해서 돈 준을 여자의 얼굴에 내려치기까지 한다. 그렇게 남자의 기억 속의 본인은 쓰레기보다 못한, 세상 제일의 나쁜 놈으로 남아있다.
+ 여자 이야기 (희숙 ; 김민주)
우리 오빠는 아주 아주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내 인생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그런 사람.
오늘도 오빠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하루하루를 버팁니다. 우리 오빠는 내가 배달해 준 자장면을 먹고 백일동안 그 젓가락 포장지를 하나하나 모아 꽃다발을 만들어 나에게 선물로 준 사람입니다. 그 백일동안 자장면을 먹으면서 얼마나 내 생각을 했을까요? 그 생각만하면 절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또 오빠는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내 손가락에 끼워줬습니다. 그렇게 오빠는 쑥스러운 듯 표현에 서툴지만 나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큰 남자였습니다. 근사한 레스토랑과 예쁜 반지 케이스는 필요 없습니다. 남들에겐 아무리 볼품 없어 보이는 반지더라도 오빠가 준 것이란 것만으로도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생애 가장 소중한 보물이니까요. 우리 오빠는 실수로 내게 잘못을 저질러도 우는 나를 보고 금방 내 곁으로 다가와 잘못했다며 나를 안아주는 남자였습니다.
나를 사랑해주고, 내 인생을 버틸 수 있는 행복한 추억을 안겨 준 오빠에게 언제나 고맙고 미안합니다.
여자는 폭력 남편에게 맞아도, 손님에게 성추행을 당해도 행복했던 남자와의 떠올리며 웃는다. 남자와 함께한 찬란했던 순간들이 지옥같은 여자의 삶에서 단비같은 존재였다. 남편의 행동 하나하나에 남자와의 추억이 떠오르기도 하다. 남편에게 맞아도 남자가 잘못했다고 다독이며 안아줬던 그 때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남편에게 원치 않은 성관계를 당해도 남자와의 설레고 행복했던 첫 날을 떠올리며 또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렇게 여자는 남자가 잘해줬던 일만 기억한다. 그래서 여자의 기억 속의 자신은 항상 남자 때문에 웃고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재회.
희숙
기억해야지. 그 힘으로 사는데.
여자는 남자가 옛날에 선물로 준 반지를 목걸이에 껴 여태까지도 목에 걸고 있다.
희숙
비 많이 오네. 도망갔음 좋겠다. 아주 멀리.
어디로 가면 좋을까. 어디로 가야...
제주도가 좋겠다. 거기 참 좋다며. 오빠랑 꼭 가 보고 싶었는데.
제주도는 무슨, 돈도 없으면서. 거기 가려면 비행기표도 있어야지, 거기서 살려면 집도 있어야지.
집은 무슨, 그냥 방 한 칸이면 돼. 아 방 한 칸 얼마나 할까... 300만원? 보증금 300이면 월세 방 하나는 얻겠지?
아 월세는 뭘로 내나.. 귤농장에 다녀야 되겠다. 나 귤 무지 좋아하는데.
그러다가 전화를 받는다. 남자가 죽었다는.
그제야 여자는 눈물을 흘린다. 아니 소리도 안 나올 정도로. 소리없이 우는 여자의 모습이 더 슬퍼 보였다. 그랬다. 여자의 감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남자 뿐이었다. 남편에게 맞아도 손님에게 성추행을 당해도 울지 않던 여자가 남자의 소식을 듣고 운다. -9;너 두고 절대 어디 안 가-9; 약속 했던 남자가 가 버렸다.
남자의 마지막 선물.
남자의 장례식장에 간 여자에게 노숙자가 다가와 무언가를 전해준다. 수표 삼백만원과 제주도 티켓.
이 작품을 내 가슴 속에 들어오게 한 베스트 장면. 이 선물을 위해 남자는 아픈 몸을 이끌고 3개월 동안 죽어라고 일 했던 것이다. 여자가 혼잣말로 별 뜻 없이 중얼중얼 거린 그 말들 때문에, 남자는 죽기 전 죽을 힘을 다 해 여자를 위한 마지막 선물을 준비한다. 선물을 받고 소리 없는 울음을 내는 여자의 격한 슬픔이,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보는이를 슬프게 한다.
에필로그
남자의 집으로 배달 가면서 행복한 모습의 여자. 그리고 그녀를 기다리는 남자의 설레는 마음. 자장면 배달 오는데 집안을 치우고 옷을 갈아 입고. 여자 역시 배달 들어가기 전에 화장을 고치고 거울을 본다. 그 둘의 설레였던 감정들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둘의 소박했지만 아름다웠던 사랑. 배달을 마치고도 못내 아쉬워 쉽게 출발하지 못한다. 저기요. 고마워요. 너무 소소하고 사소한 것들에서 그들은 행복을 느꼈다. 그래서 슬프다.
감상
사랑이 끝난 후 남자는 자신이 잘못한 것만 기억하고, 여자는 행복했던 순간만 기억한다.
작품은 흑백으로 진행된다. 처음에는 이 것이 보기가 불편해 끌리지 않았지만 스터디 과제였기 때문에 억지로 봤다. 또
남자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것으로 시작한 이 작품은 보나마나한 신파에 불과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텁텁한 시선으로 보게됐다. 그러나 나는 곧 드라마에 빠졌고 흑백 화면 역시 전혀 불편하지 않게 됐다.
초반 남자의 행태를 보면 진짜 울화통이 치밀어서 봐주고 있을 수가 없다. 슬슬 화가 나면서 욕까지 나오게 될 정도다. 그리고 여자는 너무나도 답답하다. 진짜 여자가 너무 병신 같아 그 것도 또 울화통이 치민다. 이런 쓰레기 같은 자식이 뭐가 좋아서 이렇게 질질 매달리고 있는 걸까! 열받는다. 남자들에게 맞고 사는, 그리고도 매달리는 등신같은 여자들이 왜 이렇게 자주 드라마에 등장하는 것일까! 왜 꼭 이래야만 하는 것일까?
그러고 있을 때 그들의 사랑을 알게 된다.
회상과 현재를 번갈아 구성한 작품. 같은 상황 속에서도 서로 다른 것을 기억하는 여자와 남자.
절묘하게 회상되는 그 남자 그 여자의 사랑 이야기.
이 드라마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이야기,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소소한 이야기를 이렇게 뜨겁게, 마음 아프게, 가슴 저리게 그려냈다.
자고로 작가란 남들과는 다른 생각으로 그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한 기발한 소재, 낯선 스토리들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이렇게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스토리로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는 것이 더 어려운 것 같다. 기발한 소재와 낯선 스토리들을 찾다 보니 요즘 드라마들은 더 자극적이고 수위는 더 높아지고 있다. 덕분에 항상 자극적이고 검은 종이에 빨간 피가 튀는 듯한 분위기의 작품만을 고집하게 됐던 내게 정말 필요한 드라마였다. 나의 아주 사소한 이야기로 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 작품이었다.
내 글을 읽은 사람들은 꼭 이 작품을 찾아서 봤으면 좋겠다. 처음에는 흑백 화면이 익숙지 않아 지루할 지 모른다. 하지만 그 시간을 인내하고 끝까지 보는 참을성을 발휘한다면, 메말랐던 감정이 어느순간 가슴 속에 꿈틀꿈틀 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그 작은 행복이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보고 또 봐도 그들의 행복에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저린다.
P.S 이 리뷰는 내가 이 작품을 보고 느낀 그 감정의 30%도 못 따라간다.
그 마음을 글로써 다 담아낼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에 슬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