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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이영주 |2008.11.18 17:09
조회 27 |추천 0

 

 

이리 (Iri, 2008)

감독 : 장률

 

 

 

이제, 그만좀 하자...

 

 

얼마 전 서울아트시네마에 갔다가 영화 찌라시를 발견하고는 고이 모시고 와서 사무실 벽에 붙여 두었다. 꼭 봐야지, 다짐하면서...

물론, 장률 감독은 이름만 들었지 영화로 만난 적 없었고, 이리역 폭파사고 역시 가수 하춘화가 어느 쇼프로그램에선가 故 이주일을 추억하는 에피소드로 이야기했을 때서야 맞아, 그런 사건이 있었어, 하고 기억했을 뿐 정확한 기억이라고는 가진 것이 없었고(미군공군기의 이리역 폭격사건 생존자 취재차 이리역에 간 적은 있으나 이 사건과는 무관하니 패쓰~), 이 영화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하등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포스터 속에서 오롯이 앉아 있던 윤진서와 엄태웅의 처연한 표정에 확 끌렸던 거지. 거기다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에 관한 영화라잖아. 워낙 '기억'에 대한 관심이 많았으니까.

 

국제노동영화제 출품작 중 하나로 글을 써야 할 일이 있는데 오늘이 영화제 마지막날이어서 후다닥 인디스페이스에 갔다가 인디스페이스와 한집살림을 하는 스폰지하우스에서 를 상영하길래 옳다구나, 예매를 하고, 영화제 폐막작을 본 후 곧바로 이어서 스폰지하우스로 이동, 를 만났다.

 

어이쿠야, 이 영화, 상당히 난해하다. ㅡㅡ;; 예술영화 체질이 아닌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카메라에 인물들의 느릿한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미동도 않고 피사체를 응시하는 정적인 카메라, 시끌벅적한 대사는커녕 표정 변화 하나도 읽어내기 어려운 정적인 인물들, 뭐 이런 것들 때문에 어려웠던 것은 아니다. 그런 것에 지루함을 느끼기에는 지방소도시 이리(지금은 익산)의 서늘하리만치 을씨년스러운 풍광의 강렬함이 너무나 매혹적이기까지 했으니까. 오히려 조용하고 느릿한 카메라의 시선은 마음 한구석을 자꾸만 끌어내려 끝도 없이 까라지게 만드는 힘이 있었으니까.

문제는 답답하리만치 짓밟히며 살고 있는 진서와 그런 동생을 먼 발치서, 혹은 문지방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며 역시나 답답하리만치 폭발 직전 분노를 끙끙 안고 사는 태웅이, 현재의 이리와 어떻게 조우하고 있는지 해석해내기가 어려웠다는 거다.

수천명의 사상자, 수만명의 이재민을 낳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사건이 남긴 상처라고? 30년이 지난 지금에야 떠들썩하게 추모제라는 이름으로 축제를 열고 젊은이들은 이리라는 지명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까맣게 잊어버렸으나 그 상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글쎄, 잘 모르겠다. 내 능력으로는 도무지 그 연결고리를 찾아내기 어려웠다.

역시 난 예술영화 체질이 아닌 게야. ㅠㅠ

 

차라리 "이리"를 빼고 이 영화를 보았다면 이렇게 힘들어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리'를 쏙 빼놓고 이 영화를 본다면, 마치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처럼, 극악무도한 악인들도 아닌 범인들이 한 인간을 어떻게 도륙하는지, 그러면서도 얼마나 천연덕스럽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척이 아닐 수 있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지도 모른다) 살아가고 있는지 통렬하게 보여준 영화(물론 만큼은 아니지만)로 기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이리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감독은 폭파 전의 도시 과 폭파 후의 도시 를 쌍으로 영화화할 계획이었고 계획대로 영화를 만들었다 하니, 나의 감상법은 감독의 의도와 한참 떨어진 '잘못된' 감상일 것이다. 장률 감독, 미안하오.

 

다만, 이리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강간당하는 성녀(聖女)' 진서의 존재였다.

많은 영화와 문학작품에서 인간의 악에 대한 속죄로 여성의 몸을 사용하는데, 그것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 어떻고 간에, 난 못 보겠다. 도저히. 진서가 강간당할 때마다 내 몸이 도륙당하는 듯한 끔찍함에 소름이 끼치고 구토가 치밀어오르는 걸 어쩌란 말이냐. 태웅이 동생 진서의 짓밟힘에 대한 보복으로 다른 여성을 강간하는 지경에 이르니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미는 거다. 야, 여자 몸이 무슨 쓰레기통이냐? 변기냐?

예술하는 것 다 좋고 어려운 영화 만드는 것도 다 좋다. 하지만 이제 여자 몸 가지고 속죄하고 배설하는 것, 그만좀 하자.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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