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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 안의 지옥-북한 정치범 수용소

박승현 |2008.11.21 08:50
조회 262 |추천 0

최근 대북 전단 삐라 살포 사건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북한 상황.

그곳은 상상 이상의 지옥이었다..

 

정치범수용소는 북한의 공식적인 명칭은 아니다. 북한주민들은 '통제구역', '특별독재대상구역', '이주구역', '정치범 집단수용소', '유배소', '종파굴' 등으로 부르고 있다. 북한당국은 'OO관리소'라고 부른다. 예컨대 '요덕정치범수용소'는 '제15호관리소'로 불리는데 기록상으로는 조선인민경비대 예하부대처럼 위장되어 있다.

여기에는 이른바 반당·반혁명분자 등 체제위해분자 20여만 명을 재판절차없이 집단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래는 이른바 적대계층 가운데 체제위해분자 즉, 숙청된 종파분자, 반당·반혁명분자, 과거의 지주, 친일파, 종교인 및 월남자가족, 북송교포 가운데 북한체제를 비판하고 자유세계를 동경 찬양자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노동당의 간부로 있다가 나중에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정치인과 가족이 점차 주류를 이루었으며 특히 김일성우상화 강화과정에서 수용대상이 증가하였다.

정치범수용소는 수용인들의 탈주·소요방지를 위해 철저한 감시·통제체계를 갖춰 운영하는데 외곽 경계선에는 3~4m 높이의 4~6중 철책 울타리가 설치돼 있다. 탈주가 용이한 곳에는 전기철조망, 지뢰밭, 함정 등을 설치하고 외곽의 울타리를 2㎞간격으로 7미터 높이의 감시망루를 통해 감시하고 있다.

탈주를 기도하다 발각되면 경비원들에 의해 무차별 사살되며 체포될 경우에는 유격대 훈련장에서 살인훈련용으로 제공되는 경우도 다반사라고 전해진다.

일단 수용소에 수감되면 주민으로서의 권리는 물론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도 일체 박탈당한 채 생산력을 제공하는 도구로서 존재하게 된다.

입소 즉시 공민증을 박탈당하고 선거권·교육받을 권리 등도 제약받으며 식량·생필품 배급은 물론 결혼·출산 등도 금지시키고 있으며 면회 및 서신연락 금지 등 외부와 연락을 일체 차단 당하고 있다.

수용자 일과는 작업반별 성격 및 계절에 따라 다소 상이하나 농장 작업반의 경우 새벽 5~6시경 기상, 저녁 8시까지 작업을 실시하고 사상교양과 인원점검 후 밤 10시 잠자리에 든다. 탄광 작업반은 동·하절기 구분없이 1일 3교대로 작업하는 등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주식은 강냉이와 감자, 밀, 보리로서 수확기에 각 1회 배급하며 공급량은 종류에 관계없이 1인 1일 기준 탄광은 600g, 지역지구는 500g이나 최근에는 식량사정을 이유로 100~200g 정도 배급된다. 부식은 채소류는 거의 공급이 없고 소금이나 간장·된장 등을 소량 지급, 마늘·고춧가루 등은 텃밭에서 조달하는 실정이다.

따라서 수용자들은 먹을 것의 절대 부족으로 나물·풀뿌리 외에 쇠똥속의 콩이나 개구리알까지도 취식하는 형편이며 판자나 거적으로 만든 집의 나무껍질 바닥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로 인해 수용자 대다수가 영양실조로 펠라그라병, 결핵, 간염 등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수용소는 함경남북도와 평안남북도, 자강도 등 모두 지형과 산세가 험악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으며 지역별로 보면 함남의 요덕·단천·덕성, 함북의 화성·청진·회령, 평남 개천·북창, 평북 천마, 자강도 동신 등 10개로 파악되고 있다.

수용소는 수용자들의 죄상에 따라 완전통제구역과 혁명화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완전통제구역은 북한이 주장하는 이른바 반당·반혁명 종파분자나 해외로 도주하려다 잡힌 정치범들이 종신 수용된다. 혁명화구역은 상대적으로 죄질이 경미한 정치범들이 수용되며 3∼10년이 지나 김부자 체제에 충성할 만큼 사상개조가 되었다고 판단되면 심사를 거쳐 내보내기도 한다.

수용소의 관리는 이분화되어 총괄조정과 통제는 국가안전보위부 수용소관리국에서 담당하되 경비는 인민보안성 산하 인민경비대에서 맡고 있다.

 

북한은 정치사상범의 개념과 범위를 '반혁명분자', '불건전한 사상을 가진자', '적대분자' 등으로 모호하게 표현하여 정치적으로 숙청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동 죄목을 붙여 제거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김일성 주석은 "사회주의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혁명의 사상과 열기를 반대하고 방해하는 온갖 반혁명적 요소들이나 불건전한 사상과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자본주의를 되살리려는 온갖 반혁명적 요소들에 대해서는 강한 독재를 실시합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김일성·김정일체제에 도전하는 모든 정적들이나 사회주의 건설에 비협조적인 자들을 정치사상범으로 몰아 처형하거나 특별독재대상구역에 수용하여 강제노동시키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현행 형법상 정치범을 처벌하기 위한 죄명으로는 '국가전복음모죄', '반동선동선전죄', '조국반역죄' 등이 있다.

제44조의 국가전복음모죄는 "공화국을 전복하려는 음모에 가담하였거나 폭동에 참가한 자"에게 부과되며, 주로 반당 반김일성 분자들이 이 죄목에 해당되어 처형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유배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김정일이 자신의 비판자나 정적제거시 동 조항을 적용하여 처형하거나 특별독재대상구역으로 수감한 인원은 1만5000여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제46조의 반동선동선전죄는 "공화국을 전복, 문란, 약화시키거나 그 밖의 반국가적인 범죄행위를 감행하도록 선전선동한 자"를 징계하기 위한 법으로서, 이는 주로 해외정보유입을 차단하고 내부동요를 막기 위해서 제정되었다.

초기에는 북송교포 및 월북자와 납북억류자들 중 불평분자들을 처벌하는데 활용되었으나, 동구 및 소련 붕괴 이후 내부 단속을 위하여 해외유학생 및 해외근무자나 출장자 중 해외실정을 주위에 유포한 자들을 처벌하는 데 주로 적용되고 있다.

제47조의 조국반역죄는 "조국과 인민을 배반하고 다른 나라 또는 적의 편으로 도망치거나 간첩행위를 하거나 적을 도와주는 일과 같은 조국반역행위를 한 경우"를 처벌하기 위한 조항으로서, 최근 극심한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국외 탈주자가 늘게 됨에 따라 이 조항에 의해 처형되거나 혹은 특별독재대상구역으로 수용되는 인원이 크게 늘고 있는 실정이다.

이같이 북한은 정치사상범을 가혹하게 처벌하기 위하여 형법 제44조로부터 55조까지 12개 조항에 처벌규정을 명문화하고 있다. 일반 형사범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심의와 재판절차를 밟아서 교화소에 보내고 있으나, 정치사상범에 대해서는 사법기관인 검찰소나 재판소에서의 재판과정을 거치지 않고 국가안전보위부가 비공개, 단심제로 형벌을 결정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범에 대한 처벌에는 본인뿐만 아니라 본인의 가족,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친척까지도 연계해서 처벌하는 연좌제를 적용하고 있다

 

정치범수용소내 인권탄압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사항은 집단학살이 있었다는 점이다. 안명철씨 증언에 의하면, 1986년 10월 함북 온성의 12호관리소에서는 정치범들이 인권탄압에 대한 항의를 하는 과정에서 수용소내 보위원 가족마을을 습격하여 보위원 가족 수백 명을 살상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국가안전보위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경비대 1개 대대병력을 출동시켜 봉기가담자를 포함하여 청장년 약 5000여 명 이상을 사살하였다.

수용소의 열악한 환경과 고통 등을 이기지 못하고 탈출하다가 체포된 자, 보위부원에게 반항하거나 보위부원을 구타한 자는 반드시 수용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수형에 처하거나 총살한다.

강철환·안혁·안명철의 증언에 의하면, 이같은 처형과 작업중 사고 등으로 인해 사망하는 인원은 1개 소당 매년 수백 명에 달한다. 강철환의 증언에 의하면, 폐쇄된 승호리수용소에서는 1개월에 300여 명 이상이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공개처형 대상자가 발생하면 통상 1∼2일 감금해 두었다가 처형 당일 아침 10시경 작업장에 있는 수용자들을 전원 집합시킨 뒤 처형하고 시체는 인근 야산에 매장한다.

안명철은 공개처형이 공포심을 조장하여 수용자들을 순종케 하기 위한 제도였는데, 처형이 너무 잦아 정치범들이 '면역'이 생긴 데다 정치범들의 반발심과 분노를 유발함에 따라 1984년부터는 공개 처형보다는 비밀처형을 많이 실시하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한편 탈북자 안명철씨는 국가안전보위부 3국 관할의 정치범수용소에서는 비밀처형과 함께 수용소 의사들에 의해 일본의 731부대나 나치 수용소에서 자행되었던 것과 유사한 생체실험이 행해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같은 증언은 확인할 길이 없는 상태이다.

 

귀순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정치범수용소는 크게 두 개의 부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완전통제구역'이고, 다른 하나는 '혁명화구역'이다. 완전통제구역은 종신수용소로서 여기에 한 번 수용되면 다시는 일반사회로 돌아갈 수 없다.

수용자는 광산, 벌목장 등에서 처참한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결국은 수용소 내에서 죽게 된다. 따라서 완전통제구역의 수용자들에게는 사상교육을 시키지 않고 채광 및 영농기술 등 생산에 필요한 지식만을 교육시킨다.

혁명화구역은 다시 '가족구역'과 '독신자구역'으로 나뉜다. 여기에 수감되는 정치사상범은 일정기간(1년 내지 10년) 경과 후 심사결과에 따라 출소가 가능하다. 출소시에는 수용소 내의 생활상을 일체 누설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쓰고 나오는 데 이를 위반하면 재수감된다.

이들은 강제수용소에서 출소된다고 해도 적대계층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최하층 생활을 면치 못하게 되며, 국가안전보위부의 최우선 감시대상이 되어 직장배치, 이동 등 모든 부문에서 제약을 받는다. 그리고 이들이 출소 후 일반 형사범죄를 저지를 경우 형량이 10년 가중된다.

안명철씨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중 함남 요덕의 '15호관리소'만이 유일하게 혁명화구역과 완전통제구역으로 이분화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완전통제구역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살아서 사회로 복귀할 수 있는 수용소는 15호관리소 내의 혁명화구역뿐인 셈이다.

혁명화구역에는 대체로 북한의 엘리트와 재일조총련 간부와 인연이 깊은 북송교포나 그 가족들이 수용된다. 북한당국은 이들을 수용소에 수용하여 육체적 고통을 가한 뒤 사회에 복귀시킴으로써 김일성 김정일 체제에 순응케 하고 있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정치사상범들은 모두 종신수용소에 수감된다.

귀순자인 안명철과 강철환의 증언에 의하면, 종신수용소에 수감된 사람 중 극히 일부는 종신수용소에서 혁명화구역으로 이감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며, 대부분은 완전통제구역에 수감되어 다시는 일반사회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1999년 입국한 탈북자 김용씨는 완전통제구역 14호 관리소에서 생환한 최초의 북한인으로 알려졌는데 완전통제구역내의 생활 및 동료 수감자들, 그리고 전쟁포로로 추정되는 서양인이 존재했다는 증언을 했다

 

정치사상범이 수용소에 들어가면 우선 공민증을 압류당하고 선거권 및 피선거권 등의 기본권을 박탈당하는 것은 물론이다. 정상적인 배급이나 의료혜택 등도 중지되며 결혼 및 출산도 금지된다. 뿐만 아니라 친지들의 면회나 서신연락도 금지되며, 외부와의 접촉도 철저히 차단된다.

일상적으로 수용자들은 새벽 5시 반까지 아침식사와 작업준비를 완료한 후 보위부원과 작업감독으로부터 인원점검을 받는다. 작업은 5명 1조 단위로 할당량이 주어지는데 저녁 9시까지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점심시간은 12시부터 2시간 정도이다. 각자 지참한 강냉이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운다. 저녁 6시경에 담당 보위부원이나 감독, 인민반장 등이 당일 할당된 작업목표를 중간 점검하고 목표에 미달된 경우 작업연장 여부를 결정한다.

식량난 이전 북한의 일반노동자는 600g의 양을 기준으로 노동의 강도에 따라 쌀과 잡곡이 섞인 배급을 받았으나, 수용소에 수감된 정치범들은 더 강도 높은 노동을 하면서도 이보다 적은 양의 배급을 받았다.

가족단위의 경우 성인 1인은 주식으로 1일 강냉이 550g과 부식물로는 약간의 소금과 주 1회 정도 도토리로 만든 된장을 한 숟가락 정도 배급받았다. 그러나 최근 식량난으로 인해 정치범에 대한 배급량도 수시로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독신자구역에 수감된 수용자에 대한 주부식은 더욱 열악해서 1일 강냉이 360g과 소금만이 제공된다. 작업 태만시에는 90g을 더 공제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수용자들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돼지나 소 구유통 속에 남아 있는 사료찌꺼기를 먹기도 하며, 심한 경우 쇠똥 속에 박혀 있는 강냉이나 콩 등을 씻어 먹기도 한다.

강철환과 안혁의 증언에 따르면, 정치범들이 1년 정도 수용소생활을 하고 나면 영양실조로 인해 몸무게가 평균 15kg 이상씩 줄어든다고 한다. 안혁의 경우도 입소 전 75kg이었던 몸무게가 2년만에 38kg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독신자들은 주로 막사에서 집단생활을 하고 있으며, 가족단위는 흙벽돌, 판자, 거적 등을 이용하여 자체적으로 집을 지어 살고 있다. 방바닥과 벽은 흙을 이겨 만들기 때문에 실내에는 먼지가 많다. 지붕은 판자위에 거적을 덮어 만들고, 방바닥은 피나무 껍질로 다다미를 깔아 만든다. 따라서 대부분의 경우 비가 오면 지붕이 새고 겨울에는 보온이 제대로 안된다.

수용소 내에서는 자가발전한 전기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발전용량이 미미하여 각 가정마다 전구 한 개만 달게 하고 있다. 그나마 저녁 7시부터 12시까지, 새벽 2시부터 5시까지 두 차례만 전기가 공급되며, 전력은 불을 켜도 글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약하다. 그러나 전기를 공급받는 수용소는 상급에 속하며, 어떤 수용소는 전혀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 식사시간에만 관솔로 불을 밝히기도 한다.

또한 연료공급도 충분치 않아 취사용 이외에 난방용 연료는 거의 공급되지 않는다. 따라서 겨울에는 온 가족이 한 데 모여 몸을 비비며 추위를 쫓느라고 잠을 설치는 경우가 많으며, 추운 날에는 동사자도 발생한다. 식수도 하천물을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수인성 전염병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

의복 공급 또한 충분하지 못하다. 가족단위에 대해서는 수용기간 중 담요 1장과 상하 누빈 동복 1벌만이 지급된다. 작업복은 3년에 한 벌씩 지급되나 독신자들에게는 이것마저도 공급되지 않기 때문에 수감당시 입고 갔던 옷을 출감될 때까지 기워가면서 입는다.

신발은 노동화가 1년 6개월에 1켤레 지급되고, 겨울신발인 솜동화는 5년에 1켤레 지급된다. 양말이나 속내의는 일체 지급되지 않는다. 겨울에는 천조각으로 얼굴 팔 다리를 감아 생활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동상에 걸려 발가락을 절단하는 사람도 있다.

많은 수용자들은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서 영양실조와 심한 육체노동으로 폐렴, 결핵 감염 및 펠라그라병(영양실조) 등의 질병에 걸려 시달리고 있으나 모두 예외 없이 작업장에 동원되고 있다. 작업반장이 더 이상 일을 시킬 수 없다고 판정되는 수용자들은 중환자가 수감되는 요양소로 보내는데, 이들은 치료해 줄 의사나 약이 없기 때문에 격리 수용되어 방치된다. 이같이 방치되어 죽는 사람이 1개 수용소당 매년 약 40∼50명에 이른다.

 

구류장

 

수감대상
북한의 구류장은 남한의 구치소와 같은 형태라고 보면 된다. 구류장은 보위부 구류장과 보안부 구류장이 있다. 보위부 구류장은 정치범, 보안부 구류장은 경제범들이 수용된다. 탈북자들의 경우 단순 탈북자는 보안부 구류장에, 탈북 후 남한의 교인, NGO관계자, 기타 외국인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탈북자들은 정치범으로 보위부 구류장에 감금된다.

보위부 구류장에 감금된 정치범들은 예심을 거쳐 정치범 수용소로, 보안부 구류장에 감금된 수인들은 예심 후 재판을 거쳐 인민보안성에서 운영하는 교화소로 보낸다. 또한 재판까지 받을 필요가 없는 자들은 강제노동단련대나 집결소로 보낸다. 북한의 구류장은 각 도, 시, 군의 보위부, 보안부에 설치되어 있다.

앞에서 남한의 구치소와 같은 형태라고 했지만 그 운영은 물론 하늘과 땅 차이다. 남한의 구치소에서는 책도 보고 운동도 한다는데 북한의 구류장에서 이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만약 북한의 구류장이 남한의 그것처럼 식사도 괜찮고 자유가 보장된다면 너도 나도 구류장에 가겠다고 할 것이다.

운영실태

탈북자가 구류장 대기실에 들어가면 계호원들은 구타를 하며 그들의 옷을 벗긴다. 옷에 붙은 단추, 지퍼, 팬티의 고무줄까지 다 떼어버리고 모든 물건을 회수한다. 심지어 여성들의 팬티나 브래지어까지 회수한다. 그 다음 수감번호를 알려주고 감방에 처넣는다. 감방은 지역별로 형태와 넓이가 모두 다르지만 보통 원형과 4각형에 넓이는 2~8㎡ 정도이다. 감방의 바닥은 나무마루로 되어 있고 한쪽 모서리에 변소구를 설치하고 있다.

뒤쪽에는 겨우 기어서나 들어갈 수 있는 철판 출입문이 있다. 한 감방에 적게는 9명, 많게는 15명씩 수감된다. 수감자는 바로 앉은 상태에서 두 손을 무릅에 올려놓고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다. 만약 꼼지락거리다가 계호원에게 발각되면 철창 사이로 손 또는 발목을 내밀고 각목세례를 받는다. 때로는 추운 날 감방 안에 찬물을 들이부어 추위에 떨도록 고통을 주기도 한다.

게다가 이, 벼룩, 빈대가 피부를 물어뜯어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쩌다 운동시간 30분을 주면 저마다 벌거벗고 이잡이에 여념이 없다. 보통 한 사람이 하루에 100여 마리의 이를 잡아 죽여도 감방안의 이, 벼룩, 빈대는 없어지질 않는다. 머리 서캐(이의 알)는 머리 카락이 희어질 정도로 내려앉아 젊은이도 늙은이로 보일 정도이다.

위생상태는 둘째치고 감방에서 주는 식사로는 몸을 유지할 수가 없다. 사람 몸이 소화할 수 없는 옥수수 껍질이 절반이나 섞인 가루 또는 삶은 통강냉이 70~80알, 계호원들이 먹다 남긴 멀건 국물 반그릇씩을 주는 것이 고작이다. 밖에 있다면 생풀이라도 뜯어먹으련만 여기서는 주는 음식 외엔 입에 넣을 것이 없다.

대소변도 계호원의 승인 하에서만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선생님! 4호 감방 222번 소변 볼 수 있습니까”하고 문의했을 때 “보지 말아”하고 계호원이 기분에 따라 명령하면 움직일 수 없다. 이런 상태에서 한달 정도면 누구나 영양실조에 걸린다. 계호원들은 수감자들의 항문 상태를 보고 영양실조를 확인한다. 항문이 심하게 열려 있으면 며칠 견디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 본다.

예심 중 피의자가 사망했을 경우는?

이곳에 수감된 사람들은 탈북자든 일반 범죄자든 모두가 예심을 받는다. 따라서 수인 자신이 지은 죄를 숨김없이 말하도록 잠시도 쉬지 않고 고통을 주는 것이 구류장의 사명이다. 감방에서는 계호원들에게 고통을 당하고, 취조에 불려나가서는 예심 담당자들에게 정신적·육제척 고문을 당한다.

수감자들은 너무도 지독한 고통을 견디다 못해 바늘을 먹고 빈침을 삼키는 등 모진 고통을 면해 보려고 자살을 괴하지만 죽는 것도 쉽지는 않다. 또한 모진 고문으로 인해 없는 일도 있다고 말하고 보안원, 보위원들의 요구에 순응하여 더 큰 죄를 뒤집어쓴다. 결국 2년형에 해당하는 죄가 4년형으로 가중된다. 보위원, 보안원들은 사업 성과를 쌓기 위해 수인들을 더욱 가혹하게 괴롭힌다.

한편 조사과정에서 고문에 시달리고 영양실조로 굶어 죽어도 그 죽음에 대해서는 누구도 책임이 없다. 죽고 싶으면 죽으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구류장 수감 기간은 1달 ~6달 또는 그 이상이다. 보위부 구류장은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비밀자료를 모두 들춰낼 때까지 몇 년 동안이고 계속 조사한다.

 

6.6제곱미터의 독방에서 생활해본 나로선 그 방도 엄청나게 좁았다. 아마 2인용 침대정도 되려나? 그런데 그곳보다 반평정도 넓은 곳에 9-16명을 몰아넣다니..경악스러울 따름이다.

 

수용소 출신 신동혁 씨

[수용소 출생 신동혁 국내최초인터뷰①] "이틀이 멀다하고 매맞아"



정치범수용소에서 태어나 22년간 수감생활을 했던 신동혁(26) 씨가 한국 언론으로는 최초로 28일 데일리NK와 인터뷰를 가졌다.

오랜 수감 생활로 인한 정신적 휴유증을 앓고 있는 신 씨는 인터뷰에 응하는 것조차 힘들어 했다. 일본 언론의 보도 이후, 정치범수용소에서 탈출했다는 그의 증언을 믿지 않는 일부 사람들의 시선도 부담이었다고 말했다.

신 씨는 평남 개천의 정치범수용소 출신이지만, 수용소의 구조나 규모 등 전체적인 사정에 대해서는 잘 설명하지 못했다. 태어나서 탈출할 때까지 폐쇄된 마을 안에서만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남들이 뭐라고 하던 나는 내가 아는 만큼만 얘기 하겠다”며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부모님이 무슨 죄목으로 수용소에 끌려 왔는지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이 어떻게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수용소 안에서는 전혀 궁금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일 잘하는 사람 뽑아 '표창결혼' 시켜

“수용소(북한에서는 관리소라고 불림) 내에는 일 잘하는 사람을 뽑아서 결혼을 시켜준다. 이를 ‘표창결혼’이라고 하는데, 수감자들의 사기를 돋궈주고 일을 많이 시키기 위해 상을 주는 것 같았다. 주변에서 이렇게 결혼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우리 부모님도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수용소 안의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 바로 이 ‘표창결혼’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5일 정도 같이 생활하다가 따로 떨어져 살아야 했다. 어머니는 허름하지만 독채에서 살 수 있었다. 신 씨에게는 형도 한 명 있는데, 그들 가족은 8작업반 마을에서 살았다고 한다.(특별히 마을 이름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고 작업반 명칭을 따서 부른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가 있는 곳이 ‘수용소’라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나 조상들이 죄를 지어서 그 때문에 여기에서 살게 됐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바깥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니까 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전혀 안 들었다. 수용소를 나오기 전까지는 마을 안에서만 살았다”

그는 10살이 될 때까지 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신년이나 특별한 날 ‘표창휴일’을 받아 아버지가 가끔씩 집에 들렀다고 한다.

신 씨는 10살 이후 남자들만 사는 단체 숙소에서 살아야 했다. 그때부터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 12시간씩 강제노동에 동원됐다. 7살이 되던 해에는 수용소 안에 있는 인민학교에 입학했다. 수용소 내에서도 학교를 운영했는데, 인민학교 5년, 고등중학교 6년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잔인한 일상의 연속…우리는 그렇게 취급받는 사람”

“오전에 4시간, 오후에 2시간 수업을 했다. 보위부원들이 선생님이었는데 교재는 따로 없었다. 국어와 수학, 체육을 배웠는데, 국어시간에는 글쓰기를 했고 수학은 더하기, 빼기까지 배웠다. 학년이란 것이 의미가 없다. 학교를 마치면 무조건 일을 하러 나가야 했다. 고등중학교 때부터는 아침부터 일하러 나가는 경우도 많았다.”

신 씨에게 펜과 종이를 주고 학교와 숙소의 위치를 그려달라고 했다. 그는 “걸어서 5분 정도 위치에 있었는데, 위치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했다.

“주로 농촌지원과 도로수리, 탄광 지원, 화목(나무) 수집 등의 일을 했다. 일이 힘들어서 하기 싫다고 생각도 했지만, 그냥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면 일하는 시간도 길어지고, 더 어려운 일을 하게 된다.”

인민학교 시절에는 간혹 여유 시간도 있어 같은 반 아이들과 술래잡기도 했다고 한다.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은 즐거웠었냐?”고 질문을 던지니 “친구라는 개념으로 가깝게 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누구를 친구로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즐겁다라는 말 자체도 몰랐다. 다만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수용소 안에서는 이들을 감시하는 보위부원들을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보위부원들과 마주치면 비켜서서 인사를 해야 했다. 수시로 매를 들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공포심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들이다’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특별히 반감도 들지 않았다.”

“보위부원에게 당했던 가장 큰 처벌은 무엇이냐”고 물으니 “하루하루가 잔인하니까 특별히 뽑을 수 없다”고 했다. 신 씨는 수용소 안에서 일어나는 인권침해 사례에 대한 질문에 구체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고문이나 구타 등은 그에게 있어 하나의 일상에 불과했다.

“말을 안 들으면 매 맞아서 죽을 수도 있다. 인민학교 때부터 맞아서 머리에 피가 터지고, 간혹 죽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도 이틀이 멀다 하고 맞았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옥수수밥과 염장(소금)국만 배급받았다. 수용소에서 탈출할 때까지 다른 음식은 구경도 못했다. “항상 배가 고팠다. 농장일을 나가면 몰래 벼이삭이나 오이, 가지 등을 따다 먹었다. 쥐를 잡아먹기도 했다. 수용소 안의 사람들은 다들 허기져 있었다.”(계속)

 

신동혁 씨가 14살 되던 해 어머니와 형이 수용소 탈출을 시도하다 공개처형을 당했다.

어머니는 교수형에 처해졌고, 형은 총살당했다. 신 씨는 맨 앞자리에서 그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 달라는 부탁에 신 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기가 힘든 것처럼 보였다. 수용소는 부모 자식간의 천륜의 정마저 허용하지 않는 곳이었다.

“엄마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지, 크게 엄마라고 느낀 적은 없었다. 엄마와 떨어져 살기 시작할 때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엄마와 형이 죽는 모습을 볼 때도 분하거나 슬프다는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도 그런 감정들은 느껴지지 않는다.”

신 씨가 거주하던 수용소에서는 1년에 4번 정도 수인들을 모아놓고 공개처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탈출을 기도했거나 도둑질 한 사람들이 처형 대상에 속했다.

신 씨 또한 어머니의 탈출 시도로 고문을 받았다. 보위부원들은 14살 소년의 손과 발을 묶어 천장에 매달고 등 밑에 화로를 놓았다. 그때 고문의 흔적이 신 씨의 등에 선명히 남아있다.

엄마 잃은 열네살 소년 화로 위에 매달아

“고문 받는 곳에서 풀려나올 때 같이 끌려왔던 아버지를 보게 됐다. 아버지와는 그 후에도 가끔 시간이 있을 때 만났다. 만나도 특별히 하는 얘기는 없었고, 안부를 묻는 정도였다. 아버지는 지금도 수용소 안에 계신다.” 정치범수용소는 가족간의 천륜마저 존재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수용소에서의 22년 동안 신 씨는 감정을 표현 할 줄 몰랐다. “감정이란 것이 없었다. 지금은 자유롭게 생활하지만 아직도 이해를 못하는 것이 많다. ‘슬프다’ ‘기쁘다’ ‘보고싶다’ ‘아프다’ 같은 단어 자체를 몰랐다.”

그에게 들은 수용소의 실상은 거대한 감옥, 그 자체였다. 죄수복 같은 단체복에 남자들은 머리를 모두 짧게 밀었고, 여자들은 단발로 잘렸다. 아침 5시 30분에 기상해 12시에 취침하고, 하루 종일 강제노동에 동원됐다. 점심식사를 하는 1시간이 유일한 휴식시간이었다.

한 방에는 적게는 5명에서 많게는 30명까지 수감됐다. 저녁에는 담당 보안원이 생활총화를 진행했다. 여기서도 말 한마디 잘못하면 매를 맞아야 했다. 남녀간의 연애는 전면 금지됐으며, 발각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갔다.

신 씨에게 완전통제구역인 14호 수용소에서 탈출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얘기를 꺼내니 “정치범수용소에서 오셨다는 분도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나도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 된다”고 말했다.

평생 수용소에 갇혀 있던 그가 바깥 세상에 대해 처음 듣게 된 것은 2004년 6월이었다.

“공장에서 한 조로 일하게 됐던 아저씨에게 바깥세상에 대해 처음 듣게 되었다. 원래는 그 아저씨가 이야기하는 것을 상부에 고발해야 하는데, 얘기를 듣다보니 너무 호기심이 생겨서 말하지 못했다. 그 분은 탈북 경험도 있었는데 평양에 대해서도 이때 처음 들었다. 이렇게 반년 정도 얘기를 듣다보니 어려서부터 당한 일이 억울해졌다. 이 곳이 지옥같이 느껴졌다.”

“한국에 와서도 수용소 안에 있는 듯한 착각 느껴”

결국 신 씨는 다음 해인 2005년 1월 2일 탈출을 실행에 옮긴다. 살아서는 나오지 못한다는 완전통제구역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 안에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 불가능한거지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도 없다”고 말했다.

“1월 2일 산에 화목(나무)하러간다고 들었다. 그러면 철조망 가까운 데로 갈 수 있었다. 그때까지는 바깥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만 있었다. 그 전 날 탈출하자고 내가 먼저 아저씨에게 말했다. 처음에는 아저씨도 탈출할 수 있겠느냐고 꺼려했었다.”

2일 아침. 두 사람은 긴장된 마음으로 산에 올랐다. 철조망을 지키는 경비병들과 이들을 감시하는 보안원들이 따로 있기 때문에 감시의 눈이 미치지 않는 지역도 있다고 한다.

“아침부터 기회를 봤지만 마음이 조급해서인지 막상 발길이 안 떨어졌다. 그러나 이번에 탈출 안하면 다신 이런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철조망을 향해 달렸다. 아저씨가 먼저 달려 나가다 철조망에 걸려 넘어졌다. 나는 그 위로 넘어서 철조망을 건넜다. 아저씨가 넘어진 것은 알았지만 돌아볼 여유가 없어서 뛰쳐 나왔다. 그 뒤로 그 아저씨가 어떻게 됐는지는 나도 모른다.”

신 씨도 당시 전기 철조망을 넘다 다리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렇지만 북한 사회를 전혀 모르는 그가 어떻게 국경을 넘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아저씨를 통해 북한 사회에 대해 들은 것이 큰 도움이 됐다. 그때 중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북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25일간 빈 집을 돌며 도둑질을 했다. 옷도 갈아입고 먹을 것도 훔쳐 먹었다. 북쪽으로 올라가기 위해 보따리 장사꾼들을 따라다녔다. 차잡이(히치하이킹)를 하면 나도 얻어 타고, 화차(기차)에 매달리면 같이 매달리고, 북쪽으로 계속 올라갔다.”

“억울하다는 말조차 몰랐다”

같이 다니던 장사꾼들이 의심스럽게 여기지 않았냐고 물으니 “나한테 크게 관심 갖는 사람은 없었다. 보위부원들도 피해 다녔었다. 나도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대흥단군 삼장리에서 국경을 넘었다. 하느님이 있다면 그때 나를 지켜준 것이 아닐까.”

중국에서 보낸 1년 6개월의 생활은 다른 탈북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골에 숨어 살면서 소 방목도 해주고 일을 도와줬다. 1년간 지내며 어느 정도 알게 되니깐 거기에 있는 것이 무서워졌다. 라디오를 들으며 한국에 대해 알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선 남방으로 내려가자는 생각에 길을 떠났다가 상해 영사관에 들어가게 돼 지난해 8월 한국까지 올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도 수용소의 악몽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하나원에서 한 달 생활하는 동안 계속 악몽을 꾸고 잠도 잘 못 잤다. 기분도 계속 안 좋아졌다. 병원에 입원하게 됐는데 우울증이라고 진단 받았다. 두 달 정도 입원하면서 약물치료를 받았다. 지금은 많이 나아진 상태이긴 하지만, 인터뷰 중간에 힘들어 질 때도 많다.”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게 된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다. “특별히 기분이 좋거나 하지는 않는다. 내가 관리소를 벗어 난 것인지 믿기지 않았다. 북한에 있을 때도 관리소에서 살아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국에서도 그런 착각을 할 때가 많다.”

평생 자신을 가둔 김정일 정권이 원망스럽지 않으냐고 물으니 “억울하다는 말조차 몰랐기 때문에 그 사람이 나쁘다고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은 그 사회가 나쁘다는 생각은 든다”고 답했다.

갑작스럽게 자유를 찾은 그는 아직도 세상이 어렵고 낯설기만 하다. “지금으로써는 정확히 무엇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안 생긴다. 아무것도 접해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목적도 정하지 못했다.”

초점을 잃은 그의 눈빛 속에서 아직도 수용소 안에 갇혀 있을 수많은 북한 주민들의 모습이 오버랩 됐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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