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리 스미스 씨 귀하
근계
금번 토론의 연구와 논제를 항목별로 분류하는 방법을 습득하였기에 그 형식을 이 편지에 응용코저 합니다. 필요한 것은 전부 기술되어 있사오며
필요 없는 말은 한 마디도 없사옵니다.
1. 이번 주의 필기 시험
A. 화학
B. 역사
2. 새 기숙사 건축중.
A. 재료
(a) 붉은 벽돌
(b) 회색 돌
B. 수용 인원
(a) 사감 1명, 교사 5명
(b) 여학생 2백 명
(c) 관리인 1명, 요리사 3명, 여급사 20명, 하녀 20명
3. 오늘 저녁의 디저트는 크림 치즈.
4. 저는 '셰익스피어 희곡의 역사 자료에 대해'라는 특별 논문을 집필중.
5. 루 맥마흔은 오늘 오후 농구를 하다가 미끄러져 넘어졌음.
(a) 어깨뼈가 어긋나고
(b) 무릎이 까짐.
6. 모자 하나 새로 샀음.
(a) 푸른 비로드 리본
(b) 푸른 새털깃 2개
(c) 빨간 방울솔 3개
7. 지금은 9시 30분
8. 안녕히 주무세요.
-끝 -
주디 애벗 드림
6월 2일
키다리 아저씨
아저씨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멋진 일이 생겼습니다.
맥브라이드 씨 집에서 저를 이번 여름에 애디론택스 산(뉴욕에 있는 산)에 있는 그분들의 산장에서 지내지 않겠느냐고 초대해 주셨습니다. 숲 속에 있는 아름다운 작은 호숫가에 클럽 같은 것이 있는데 맥브라이드 씨네도 거기에 속해 있다는군요. 모든 회원은 여기저기 나무 사이에 흩어져 있는 통나무 집에 살고 있어, 호수에 카누를 띄우기도 하고, 긴 오솔길을 걸어 다른 집을 방문하기도 하고, 일주일에 한 번 호수의 클럽에서 댄스 파티를 열기도 한다는군요. 지미 맥브라이드 씨는 여름 동안 잠시 초대한 대학 친구를 한 사람 데리고 온대요. 그러니까 함께 댄스할 남자도 많은 셈이지요. 저를 초대해 주시다니, 맥브라이드 부인은 정말 친절한 분이로군요. 크리스마스 때에 방문했을 때 제가 좋아지신 모양이에요.
이렇게 짧은 편지여서 죄송합니다. 이건 진짜 편지가 아니에요. 다만 이번 여름의 계획이 정해졌다는 걸 알려 드리는 것뿐입니다.
몹시 만족해 있는
주디 올림
6월 5일
키다리 아저씨께
방금 당신의 비서라는 분으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스미스 씨는 제가
맥브라이드 부인의 초대를 받지 말고, 작년 여름과 마찬가지로 록 윌로에 갈 것을 바란다는 거예요.
아저씨!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인가요?
아저씨는 이번 일에 대해 잘 이해하시지 못하는 것 같군요. 맥브라이드 부인은 진심으로 저를 필요로 하고 있는 거예요. 저는 결코 그 댁에 폐를 끼칠 염려는 없습니다. 오히려 도움이 되지요. 그 댁에서는 일할 사람을 그다지 많이 데리고 가지 않기 때문에 샐리와 제가 여러 가지로 도와 줘야 합니다. 저로서는 집안 일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여자는 누구든지 가정 살림을 해낼 줄 알아야 합니다만, 저는 고아원 살림밖에 몰라요.
산장에는 우리 나이 또래는 없습니다. 그래서 맥브라이드 부인은 제가 샐리의 친구로 와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거예요. 우리는 같이 많은 책을 읽을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둘이서 다음 학기에 배울 국어와 사회학 준비로 여러 가지 책을 읽기로 했습니다. 교수님은 여름 방학 동안에 참고서를 모두 읽어 놓으면 크게 도움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이서 같이 책도 읽고, 그것에 대해 얘기도 나누고 하면, 혼자서 하는 것보다 훨씬 쉽게 머리에 들어갑니다.
샐리의 어머님과 한 집에 산다는 일만으로도 좋은 교육이 될 거예요. 그분은 보기 드물게 유쾌하고 손님대접을 잘 할 줄 알고 사교성이 있고 매력있는 부인이에요. 그분은 무엇이든 잘 알고 계세요. 제가 리펫 원장님과 얼마나 많은 여름을 보냈는가를 생각해 보시고, 제가 그와 정반대되는 맥브라이드 부인을 얼마나 좋아하는가를 짐작해 주십시오.
제가 그 댁에 폐를 끼치리라고 염려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 하면 그 댁은 탄력 있는 고무와도 같습니다. 손님이 늘면 숲 속에 여기저기 텐트를 치고, 남자들을 밖으로 내쫓아 버립니다. 하루 종일 집 밖에서 운동할 수 있다니, 무척 건강한 여름을 보내게 될 거예요. 지미 맥브라이드 씨는 제게 승마와 카누 젓는 법과 엽총 쏘는 방법, 그 밖에 제가 당연히 알아두어야 할 일을 많이 가르쳐 주실 거예요.
저는 이제까지 경험한 적이 없을 만큼 유쾌하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겁니다. 어떤 처녀라도 평생에 한 번쯤은 그런 생활을 시켜도 좋을 거예요. 물론 저는 아저씨가 하라는 대로 행동할 작정입니다만, 제발, 제발 소원입니다. 꼭 허락해 주세요, 네? 저는 지금까지 이처럼 자기 희망대로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은 미래의 대작가 저루샤 애벗이 아니라 한 소녀인 주디 애벗입니다.
6월 9일
존 스미스 님
7일자로 보내주신 귀하의 편지를 비서를 통해 받았으며, 지시대로 록 윌로 농장에서 이번 여름을 보내기 위해, 오는 금요일 출발할 예정입니다.
언제나 당신의 뜻을 따르는 (미스)저루샤 애벗
8월 3일
록 윌로 농장에서
키다리 아저씨
두 달 가까이나 소식 전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사실은 이번
여름에는 아저씨를 그다지 좋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저는 정직해요.
맥브라이드 씨의 산장을 단념해야 했기 때문에 제가 얼마나 실망했는지 상상도 못 하실 거예요. 물론 아저씨는 저의 후견인이므로 무엇이든 아저씨의 의사를 따라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저는 도무지 반대하시는 까닭을 납득할 수 없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로서는 정말 좋은 기회였는데! 만약에 제가 아저씨이고 아저씨가 주디였다면, 저는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주디야, 잘됐구나, 가서 즐겁게 지내고 오너라. 새로운 사람을 많이 사귀고, 새로운 일도 많이 배우고, 야외에서 지내며 앞으로 1년 동안 열심히 할 공부에 대비하여, 충분히 쉬고 튼튼해져서 돌아오너라."
그런데 천만에 말씀. 아저씨는 비서를 통해 매정스럽게 록 윌로에 가라고 명령했을 뿐이에요.
제가 기분이 상한 것은 아저씨의 명령에 인간미가 조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아저씨를 생각하는 마음을 털끝만큼이라도
알아주신다면, 멋도 아무것도 없는 타이프라이터로 비서를 시켜 쓴 한 조각 통고장 대신에, 가끔 아저씨가 손수 쓰신 편지 한 장쯤 주셔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만약 아저씨가 털끝만큼이라도 저를 생각해 주신다는 것을 알면, 저는 아마 아저씨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할텐데 말이에요.
저는 답장을 받으리란 기대는 조금도 하지 않고, 재미있고 긴, 자세한 편지를 아저씨에게 써야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아저씨 쪽에서는 그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다. 이렇게 저를 교육시켜 주시니까요. 그래서 아마도 아저씨는 제가 오히려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하지만 아저씨, 이건 저로서는 매우 괴로운 약속입니다. 정말이에요. 저는 매우 쓸쓸해요. 제가 이 세상에서 친근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단지 아저씨 한 분인걸요. 그러나 아저씨마저도 그늘의 인물입니다. 아저씨는 저의 공상이 만들어 낸 인물로, 어쩌면 사실은 제가 상상하고 있는 분과 전혀 다를지도 모르거든요.
그러나 아저씨는 단 한 번 제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편지를 주셨지요. 지금도 저는 제가 몹시 잊혀진 듯한 기분이 들 때 그 편지를 꺼내 다시 읽어본답니다.
저는 아저씨에게 말씀드리려고 생각하던 것을 조금도 쓰지 않았어요. 그건 이런 것이에요. 저는 지금까지도 기분이 상해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거만하고 독단적이고 비합리적인 눈에 보이지 않는 신에게 붙들려서 그 사람 마음대로 아무 곳에나 옮겨지다니, 이보다 더한 굴욕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돌이켜 보면, 제게 그렇게도 친절하고 관대하고 이해심을 보인 분이었으니까, 때로는 거만하고 독재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 될 권리가 있는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저는 아저씨를 용서해 드리고, 다시 또 쾌활한 주디가 되겠습니다.
그렇지만 샐리로부터 산장에서 즐겁게 지내고 있다는 편지를 받을 때마다 저는 아무래도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앞으로 이 문제는 땅 속 깊숙이 숨겨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해요.
올 여름에 저는 계속 많이 썼습니다. 단편소설을 4개 완성하여 각각 다른 잡지사에 보냈습니다. 이것으로 아저씨도 제가 작가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아셨겠지요? 저는 옛날 저비 도련님이 비오는 날에 놀이터로 삼았던 다락방 한쪽 구석을 작업장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 곳에는 두 개의 창문이 있고, 단풍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통풍이 잘 되어 아주 시원합니다.
4, 5일 안으로 좀더 좋은 편지를 써서 농장 소식을 여러 가지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비가 한 차례 왔으면 좋겠어요.
변함 없는 당신의
주디 올림
8월 10일
저는 지금 목장의 연못가에 있는 버드나무의 둘째 줄기에 걸터앉아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발 밑에서 개구리가 울고, 머리 위에서는 매미가 노래하고 장난꾸러기 아기다람쥐 두 마리가 날쌔게 나무 줄기 위로 올라왔다 뛰어내려갔다 하고 있습니다.
저는 벌써 한 시간 동안이나 여기에 있습니다. 매우 편한 나무 줄기인데 소파의 쿠션을 두 개 가져다가 깔았더니 더욱 편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후세에 길이 남을 명작을 쓸 생각으로 펜과 종이를 가지고 여기에 왔습니다만, 저는 그 작품 안의 여주인공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습니다. 도무지 제 생각대로 잘 움직여 주지를 않는군요. 그래서 그 쪽은 잠시 팽개쳐 두고 아저씨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어요(이것도 그다지 제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지는 않습니다. 아저씨 역시 제 생각해도 움직일 수가 없는걸요).
만약 아저씨가 저 무서운 뉴욕에 계신다면, 바람 향기롭고 햇빛 반짝이는 이 아름다운 경치의 한 부분이나마 보내 드리고 싶습니다. 일주일 동안이나 내린 비로 말끔히 씻겨진 전원은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이라고 하니 생각나는데요. 작년 여름에 말씀드린 켈로그 씨를
기억하고 계신지요? 모퉁이에 있는 작은 흰 교회의 목사님 말예요. 가엾게도 그 노인은 지난 해 겨울, 폐렴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대여섯 번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기 때문에 그분의 신학론에 대해서는 정통해졌었지요. 그 노인은 처음 출발할 때 얻은 신앙을 끝까지 바꾸지 않고 그대로 지키셨어요.
제 생각으로는 한 번 믿은 것을 47년 동안이나 조금의 변화도 없이 그대로 간직할 수 있는 사람이란, 골동품으로서 진열장 안에 넣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황금 면류관과 하프를 손에 넣고 기뻐하신다면 좋겠어요. 그분은 천국에서 그 두 가지를 얻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번에 켈로그 씨의 후임으로 현대적인 젊은 분이 오셨습니다. 신도들은 이 새로 오신 목사님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입니다. 특히 커밍스 집사를 둘러싼 몇몇이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교회는 무서운 분열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근처 사람들은 종교상의 혁신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비가 오는 일 주일 동안 저는 다락방에 틀어박혀 독서에 열중하였습니다. 주로 스티븐슨을 읽었어요. 이 작가 자신이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그 누구보다도 재미있습니다. 스티븐슨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면 멋지게 될 거예요. 아버지 유산으로 받은 1만 달러를 전부 요트에다 투자하여 남양 제도를 항해하다니, 과연 스티븐슨답지요? 그분은 자기의 신조이던 모험을 몸소 실천했던 거예요.
만약에 우리 아버지가 1만 달러를 남겨 주셨더라면 저 역시 똑같은 짓을 할 거예요. 바일리마(스티븐슨이 남양의 사모아 섬에다 지은 집의 이름)을 생각만 해도 저는 몹시 흥분을 느낍니다. 저도 열대 지방을 보고 싶어 죽겠어요. 저는 온 세계를 다 보고 싶어요. 저는 언젠가 꼭 가볼 작정입니다.
아저씨, 정말이에요. 대작가가 되거나 화가가 되거나 아니면 여배우건 극작가건 유명한 인물이 되면 실행할 생각입니다. 저는 굉장한 방랑벽을 갖고 있습니다. 지도만 보아도 곧 모자를 쓰고 우산을 들고 떠나고 싶어집니다.
'남양의 종려나무와 사원을 죽기 전에 찾아가 보리라.'
목요일 저녁
황혼 무렵 문간의 돌층계에 앉아서
이 편지에 알리기에는 매우 곤란합니다. 주디는 요즘 매우 철학적이
되어서, 일상 생활의 시시하고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늘어놓기보다는 주로 사회 전반에 걸쳐 논하고 싶거든요. 하지만 아저씨가 꼭 알기를 원하신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농장의 새끼돼지 아홉 마리가 지난 화요일에 시내를 건너 도망하여 여덟 마리밖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함부로 남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다우드 미망인 댁에 한 마리 더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위버 씨는 자기네 헛간과 건초 창고에 호반 같은 화려한 노랑색을
칠했습니다. 매우 보기 싫은 색입니다. 하지만 위버 씨는 오래 가니까 좋다는 거예요.
브루어 씨 댁에는 이번 주에 손님이 오신답니다. 아주머니 여동생과 두 조카딸이 오하이오 주에서 온대요.
로드아일랜드 레드 종의 암탉이 달걀을 50개 품었는데, 겨우 병아리 세마리를 깠습니다.
무엇이 원인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요. 생각건대 로드 아일랜드 레드라는 건 아주 열등한 종류인가봐요. 저는 비프오핑턴 종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보니리그 네거리 모퉁이에 있는 우체국에 새로 온 직원이, 저장해 두었던 자메이카 생강주- 값 7달러- 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신 것을 아내에게 들켰대요.
아이러 해취 할아버지는 류머티즘으로 일을 못 하게 되었습니다. 급료를 많이 받았을 때 조금도 저금해 두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마을 사람들의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다음 주 토요일 밤에 마을 학교에서 아이스크림 친목회가 열립니다.
아무쪼록 가족 동반으로 참석해 주십시오.
저는 우체국에서 25센트를 주고 모자를 새로 구입했습니다. 뒤의 그림은 저의 요즘 모습으로 건초를 긁으로 가는 그림입니다.
벌써 어두워졌군요. 마을의 뉴스 거리도 이제는 바닥이 나고 말았어요.
안녕히 주무십시오.
주디
그림 설명: 치마 입은 여자 아이가 모자를 쓰고 쟁기를 들고 있는 모습
금요일
안녕하십니까?
뉴스가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시겠어요? 누가 록 윌로에 오는지
아저씨께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 하실 거예요. 셈플 아주머니에게 팬들턴 씨의 편지가 온 거예요. 펜들턴 씨는 버크셔 지방으로 자동차 여행을 하고 계셨는데, 피로해서 어디 기분 좋은 조용한 농장에서 휴식하고 싶다나요. 만약 어느 날 밤 갑자기 현관에 자동차를 들이대더라도 곧 재워 줄 수 있도록 방을 마련해 주겠느냐는 거예요. 머무는 기간은 1주일이 될지 2주일, 아니면 3주일이 될지 모르지만, 하여간 이 곳에 와 보시고 여기가 휴양하기에 적합한지 어떤지 보아서 결정하시겠답니다.
우리는 야단 법석을 떨고 있습니다. 온 집 안을 대청소하고 커튼은 있는 대로 다 빨았습니다. 저는 지금 모퉁이의 가게에까지 마차로 달려가서 현관에 깔 깔개(기름 먹인 것)와 현관과 뒷계단에 칠할 갈색 페인트 두 통을 사러 가는 중입니다. 다우드 미망인이 내일 아침 창문을 닦으러 옵니다(급한 때이므로 돼지새끼에 대한 의심은 그만두기로 하였어요).
이런 말을 들으시면 아저씨는 이 집이 여태까지는 깨끗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설사 셈플 아주머니에게 모자라는 점이 있다 할지라도 어쨌든 가정부로서는 완전 무결합니다.
그런데 아저씨, 남자분의 하는 짓이란 다 그런가 봐요. 펜들턴 씨는 현관 층계에 오늘 내려설 것인지 아니면 지금부터 2주일 뒤에 올 것인지 한 마디도 언급이 없지 뭡니까! 정작 도착하실 때까지 우리는 늘 조마조마해서 가슴을 죄어야 한단 말이에요. 빨리 오시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한 번 대청소를 해야 됩니다.
아래층에서 애머사이가 그로버를 마차에 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혼자서 마차를 몰고 갈 겁니다. 하지만 아저씨가 늙은 그로버를 보신다면, 제 몸의 안부 같은 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가슴에 손을 얹고 안녕!
주디로부터
추신
이 마지막 인사말 참 멋있지요? 이긴 스티븐슨의 편지에서 옮겨 적은 것입니다.
그림 설명: 말이 서 있음. 늙은 그로버는 아주 안전합니다.
토요일
또 한 번 안부를 여쭙겠습니다. 어제 우편 배달부가 왔을 때에는 아직 이 편지를 봉투에 넣지 않았으므로 좀더 쓰기로 하겠습니다. 이 곳에서는 매일 정오에 한 번 우편물이 배달될 뿐입니다. 시골의 우편 배달부는 농부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 배달부는 편지를 배달해 줄 뿐만 아니라, 한 번에 5센트의 삯을 받고 여러 가지 시내의 볼일도 보아 줍니다.
어제는 10센트로 구두끈과 콜드 크림(모자를 새로 사기 전에 이미 햇볕에 타서 콧잔등이 벗겨졌으므로) 한 통과 하늘색 넥타이와 구두약 등을 시내에서 사다 주었습니다. 이렇게 여러가지 주문에 대해 10센트란 터무니없이 싼 거래였어요.
그리고 또 우체부 아저씨는 넓은 세상 일을 이야기해 줍니다. 배달
구역에는 일간 신문을 보는 집이 몇 집 있으므로, 우체부 아저씨는 터벅터벅 걸으면서 그것을 읽고, 신문을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뉴스를 들려 줍니다.
그러므로 미합중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거나, 대통령이
암살당하거나 아니면 록펠러(미국의 대부호)가 존 그리어 고아원에 백만달러를 주었다는 따위의 일이 있었다 해도, 일부러 아저씨께서 알려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그런 식으로 제 귀에 들어 오고 마니까요.
저비 도련님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집이 얼마나 청결한지, 우리가 집 안에 드나들 때 얼마나 깨끗이 신바닥을 닦는지, 보여 드리고 싶을 정도예요. 빨리 오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말 상대가 그리워 못 견디겠어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셈플
아주머니에게 약간 싫증을 느끼고 있는 중이거든요.
그분은 쉴새없이 지껄일 뿐 절대로 도중에 생각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 점이 이 집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여기 사람들의 세계는 이 언덕배기 위뿐인걸요. 그래서 전혀 사회성이 없습니다. 제가 말하는 뜻을 아저씨께서는 아시겠지요. 그 점은 존 그리어 고아원과 꼭 같습니다. 우리 고아들의 생각은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철책으로 제한되어 있었어요.
다만 그 때 저는 아직 어린아이였고 게다가 너무 바빴으므로,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던 거예요. 내가 맡은 침대를 전부 정돈하고, 아기의 얼굴을 씻어 주고, 학교에 다녀와서는 꼬마들의 얼굴을 또 한 번 씻겨 주고, 애들의 양말을 꿰메고, 프레디 퍼킨스의 바지를 기워 주고(그 아이는 1년 내내 바지를 찢어 가지고 다녔거든요), 그 틈틈이 학교 숙제를 하다보면, 그 동안에 저는 벌써 침대에 들어가 눕고 싶어지고 마니까요. 바깥 세상이 부족하다는 것 따위는 느끼지도 못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2년 동안이나 화제가 풍부한 대학 생활을 한 오늘에 와서는 참된 의미의 이야기 상대가 없는 것을 쓸쓸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누구든 제 이야기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기쁠 거예요.
아저씨, 이 편지도 이쯤으로 마치겠습니다. 이젠 더 생각나는 것도
없으니까요. 이 다음에는 좀더 긴 편지를 쓰겠어요.
당신의 변함 없는
주디
추신
올해는 상추가 잘 되지 않았어요. 파종을 할 무렵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8월 25일
아저씨, 저비 도련님이 와 계세요. 우린 매우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말이에요. 그분도 역시 그럴 거예요. 왜냐 하면 벌써 열흘이나 머무르면서 아직 떠날 기색도 보이지 않거든요. 셈플 아주머니가 그분을 얼마나 아끼는지 정말 보기 민망할 정도예요. 그분이 어렸을 때 그렇게 응석받이로 자랐다면,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어른이 되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분과 저는 식사 때 작은 테이블을 베란다나 나무 밑에 가져다 놓을 때도 있고, 비가 오는 날엔 식사를 제일 좋은 객실에서 할 때도 있습니다.
저비 도련님은 마음 내키는 대로 식사하고 싶은 장소를 정하기만 하면, 캐리가 그 뒤에서 테이블을 정중하게 두 손으로 들고 따라갑니다. 그러나 그 장소가 매우 귀찮은 곳이어서 멀리까지 그릇들을 날라야 할 때에는, 캐리는 언제나 설탕 그릇 밑에서 1달러의 팁을 발견하게 된답니다.
저비스 씨는 매우 호감이 가는 분입니다. 얼핏 보아서는 아저씨는 믿지 않으실 거예요. 처음 만났을 때에는 펜들턴 집안의 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조금도 그런 점이 없습니다. 깔끔하고 겸손하고 그리고 매우 다정하신 분이에요. 남자분을 이렇게 표현하는 건 우스울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그런걸요.
그분은 이 곳의 농부들에게도 매우 잘 해주십니다. 누구든지 다 똑같게 대해 주기 때문에 곧 상대방이 경계심을 풀게 됩니다. 처음에는 모두들 그분을 수상쩍게 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옷차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예요.
그러고 보니 분명히 그분의 옷차림을 보면 누구나 놀라고 말지요.
니커보커즈(무릎까지 오는 헐렁한 반바지) 나 주름 잡힌 윗저고리. 흰 플란넬 옷과 바지가랑이가 불룩한 승마복 따위를 입기도 하거든요. 언제나 그분이 무엇이건 새로운 것을 입고 내려오시면 셈플 아주머니는 자랑스러운 듯이 얼굴을 빛내면서, 그분의 둘레를 빙빙 돌며 이쪽 저쪽으로 바라보고는, 먼지라도 묻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앉는 자리에 조심하라고 거듭거듭 잔소리를 한답니다.
그것이 또 그분을 귀찮게 만듭니다. 그럴 때마다 그분은 언제나 "리지, 가서 자기 일이나 해요. 언제까지나 나를 마음대로 하려고 해도 그건 안 돼. 난 이제 어른이니까."
하고 말씀하신답니다.
저렇게 키가 크고(그분은 아저씨와 같을 정도로 키다리예요) 훌륭한 분이 셈플 아주머니 무릎에 안겨서 얼굴을 씻었겠지 생각하면 여간 우습지가 않아요. 아주머니 무릎을 보면 더욱 우스워져요. 아주머니는 이제는 무릎이 2단계로 부풀어오르고 턱도 3단으로 잘룩해져 있거든요. 그러나 저비 씨 이야기로는 그 아주머니도 옛날에는 날씬하고 민첩해서 도련님보다 빨리 달렸다는 거예요.
우리는 온갖 모험을 다 하고 있습니다. 이 부근 일대 몇 군데를
답사하였습니다. 저는 새의 깃으로 만든 기묘한 제물 낚시로 고기를 낚는 법도 배웠어요. 그리고 또 총과 피스톤 사격도 배웠습니다. 그리고 승마도, 저 늙어빠진 그로버는 놀라운 기운을 갖고 있더군요. 사흘 동안 보리만 먹였더니 송아지한테 놀라서 저를 태운 채 도망해 버릴 뻔했어요.
수요일
우리는 월요일 오후에 스카이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것은 이 근처에 있는 산이에요. 그리 높은 산은 아닌 것 같습니다. 꼭대기에 눈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산꼭대기에 이르렀을 때에는 상당히 숨이 찼어요. 기슭의 사면은 숲으로 싸여 있었으나, 꼭대기는 바위만 겹겹이 쌓인 넓은 황무지였습니다. 우리는 해가 지기를 기다려, 모닥불을 지펴 저녁 식사를 만들었습니다. 저비 도련님이 요리를 맡아 주었습니다. 그분이 저보다 더 요리를 잘 할 줄 알아요. 정말이에요. 그분은 늘 캠핑을 다녔기 때문이래요. 그리고 나서 우리 두 사람은 달빛을 의지하여 산을 내려왔는데, 숲 속의 오솔길로 들어갔을 때, 캄캄했지만 그분이 주머니에 준비해 두었던 손전등으로 비춰 주었습니다. 아주 유쾌했어요. 내려오면서 내내 그분은 우스갯말을 해서 웃기기도 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분은 제가 지금까지 읽은 책은 물론이거니와 그 밖에도 많은 책을 읽고 계셨어요. 그분이 그렇게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데는 정말 놀랐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소풍을 갔다가 폭풍을 만났습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 다 물에 빠진 생쥐가 되었습니다만, 우리의 기분은 조금도 우울하지 않았어요.
두 사람이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부엌으로 들어갔을 때의 셈플 아주머니의 표정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
"아이구, 저비 도련님, 주디 아가씨도, 두 분 다 흠뻑 젖으셨군요. 글쎄 이걸 어쩐담! 새로 맞춘 코트가 못쓰게 되었으니!"
아주머니는 정말 우스웠습니다. 마치 우리가 열 살 먹은 아이들이고, 아주머니는 기가 막혀 있는 어머니 같았어요. 저는 잠깐 동안 이래서는 간식시간에 잼을 얻어 먹지 못하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했을 정도였어요.
토요일
이 편지는 훨씬 전에 쓰기 시작한 것인데, 마칠 틈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건 스티븐슨의 시의 한 구절인데 매우 멋진 생각인 것 같아요.
이 세상엔 이렇게도 많은 것이 넘쳐 있으니
우리는 모두 왕자처럼 행복할지이다
정말 그래요. 세상에는 행복이 넘쳐 있어, 자기 앞에 온 것을 무엇이든 받아들일 마음만 있다면, 행복은 누구에게나 고루 돌아갈 만큼 충분히 있는 거예요. 다만 그것을 받는 비결은, 구김살없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특히 시골에는 즐거운 일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누구의 땅이건 자유로이 걸을 수 있고, 어느 집에서나 마음대로 경치를 즐길 수 있으며 누구의 시내든 물놀이를 할 수가 있어요. 그리고 마치 지주가 된 듯한 기분을 맛볼 수 있지요. 세금은 한 푼도 내지 않고 말이에요!
지금은 일요일 밤 11시경입니다. 지금 저는 미인을 만들어 주는 잠에 빠져 있어야 할 때예요. 그런데 저녁 식사 때 프림을 타지 않은 진한 커피를 마셨기 때문에, 제게는 미인의 잠이 찾아오질 않는군요.
오늘 아침 셈플 아주머니가 매우 결연한 태도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11시까지 교회에 닿도록 10시 15분에는 떠나야 합니다."
"응. 알았어. 리지. 마차 준비를 해두어요. 그리고 내가 옷 갈아입는
시간이 오래 걸리거든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요."
하고 저비 도련님이 말했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어요."
아주머니가 말했습니다.
"좋도록 해요. 하지만 말을 너무 오래 세워 두지는 말아요."
라고 말하면서, 저비 도련님은 셈플 아주머니가 옷을 갈아입고 있는 동안 캐리에게 도시락을 싸게 하고, 저에게는 산책 옷을 걸치고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뒷문으로 빠져 나가서 낚시를 갔습니다.
이것은 집안 일에 심한 차질을 가져왔습니다. 왜냐하면 록윌로 농장에서는 일요일 만찬은 2시로 정해져 있는데, 도련님은 7시에 하도록 명령했어요. 그분은 언제나 자기 마음대로 식사를 가져오라고 하지요. 마치 여기를 음식점으로 생각하고 있나 봐요. 그 때문에 캐리와 애머사이는 드라이브를 못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비 도련님은 그 젊은이들이 보호자도 없이 단 둘이서 드라이브를 가는 건 좋지 않으니까, 오히려 잘 되었다나요? 어쨋든 그분은 저를 데리고 가기 위해 말을 독점하고 싶었던 거예요. 이런 억지가 어디 있겠어요?
가엾게도 셈플 아주머니는 일요일에 낚시질을 가는 따위의 사람은, 죽은 다음 활활 불을 뿜는 지옥에 떨어진다고 믿고 있지 뭐예요. 또 아주머니는 도련님이 아직 어려서 뜻대로 길들일 수 있었을 때, 좀더 잘 가르치지 못한 것을 몹시 후회하고 계신답니다. 게다가 아주머니는 저비 도련님을 교회에 데리고 가서 여러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겁니다.
어쨌든 우리는 낚시질을 하여(그분은 작은 것을 네 마리 낚았어요), 그것을 점심때 모닥불로 요리했습니다. 물고기가 굽는 꼬챙이에서 자꾸 떨어져서, 조금 재 냄새가 났습니다만 둘이서 모조리 먹어치웠습니다.
우리는 4시에 집에 돌아와서 5시에 드라이브를 하고, 7시에 저녁을 먹은 뒤 10시에 저는 침실로 돌아와서, 이렇게 아저씨에게 편지를 쓰는 중이에요.
그런데 조금 잠이 오기 시작하는군요. 안녕히 주무세요.
제가 한 마리밖에 못 낚은 것을 여기에 보여 드립니다.
어어이 그 배의 키다리 선장!
기다려! 멈춰! 어기여차! 럼 주 한 병!
제가 지금 무얼 읽고 있는지 아시겠어요? 이틀 동안 우리들의 대화는 항해와 해적 이야기뿐이었어요. '보물섬'은 정말 재미있군요. 아저씨도 읽어 보셨어요? 아니면 아저씨가 어렸을 때엔 아직 이 책이 나오지 않았었나요? 스티븐슨 씨는 이 연속물의 판권으로 겨우 30달러밖에 못 받았다는군요. 대작가가 되어도 그다지 많은 돈을 벌지는 못하는군요.
저는 학교 선생님이 될까 봐요.
이 편지에 스티븐슨의 이야기만 늘어놓아 미안합니다. 지금 제 머리는 이 작가로 가득 찼어요. 록 위로 농장의 도서실은 이 작가가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편지를 2주일이나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정도면 충분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저씨 부디 제가 상세하게 쓰지 않았다고는 말씀하지 마세요. 저는 진심으로 아저씨도 여기에 오셔서 우리들과 함께 이 유쾌한 기분을 맛보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의 완전히 다른 두 친구가 서로 사귀어 주었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저는 펜들턴 씨에게 뉴욕에서 아저씨를 아시는지 여쭈어 보고 싶었습니다. 아마 알고 계실 거예요.
아저씨는 분명히 그분과 같은 상류 사회에서 생활하고 계실테고, 두 분 다 사회 개선이니 뭐니 하는데 흥미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아저씨의 본명을 모르는걸요. 그분에게 아무것도 물어볼 수가 없었어요.
제가 아저씨의 이름을 모르다니, 이런 이상한 이야기가 또 있을까요? 리펫 원장님으로부터 아저씨가 괴짜라는 이야긴 들었습니다만, 저 역시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애정이 담긴 마음으로
주디
추신
이 편지를 다시 읽어 보고 스티븐슨에 대해서만 씌어 있지는 않다는 걸 알았어요. 두서너 가지 저비 도련님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 쓰여졌으니까요.
9월 10일
아저씨
그분이 이제 돌아가 버려 몹시 쓸쓸해졌습니다. 사람이든 장소든 또는 생활 양식이든 모처럼 정이 들었는데, 갑자기 사라진 뒤에는 심한 공허감과 뼈에 스미는 고통이 남는 것입니다. 셈플 아주머니와의 대화는 마치 간이 맞지 않는 음식처럼 싱거워졌어요.
앞으로 2주일 뒤에는 학교 수업이 시작됩니다. 또다시 공부를 시작한다는 건 고마운 일이에요. 하기야 이번 여름에 저는 아주 아주 많은 일을 했어요. 단편 소설 6편과 시를 7편이나 썼습니다.
그것들을 여러 잡지사에 보냈더니, 모두 예의바른 신속함으로
되돌려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좋은 연습이 되었거든요. 저비 도련님은 저의 원고를 읽어보시고- 그분이 우편물을 받아 가지고 오셨으므로 숨겨둘 수가 없었어요- 어느 작품이나 모두 형편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자신이 무얼 쓰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그분은 진실을 이야기할 때는 실례 같은 것을 염두에 두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지막 한 편- 대학 생활에서 취재한 스케치 형식의 것- 은 괜찮다고 하시면서 타이프로 고쳐 주셨으므로 그것을 어떤 잡지사에 부쳤습니다.
그 회사에서 원고를 받은 지가 벌써 2주일이나 되었을 것이므로, 지금은 아마 고려중인가 봐요.
저 하늘을 아저씨께 보여 드리고 싶어요! 매우 이상한 오렌지빛 광선이 모든 걸 물들이고 있습니다. 아마 폭풍우가 될 모양이에요.
그러는 사이, 벌써 25센트짜리 은전만한 굵은 빗방울과, 덧문을 쾅쾅 후려치는 바람과 함께 폭풍우가 닥쳤습니다. 캐리가 비 새는 곳에 놓을 우유 냄비를 몇 개나 양팔에 안고 다락방으로 뛰어 올라오는 동안, 저는 창문을 모두 닫으려고 뛰어다녔습니다.
그리고 다시 펜을 든 순간, 저는 과수원 나무 밑에 방석과 담요와 모자와 매튜 아널드의 시집을 두고 온 것을 생각해 내고, 허둥지둥 가지러 달려갔습니다만 모두 흠뻑 젖고 말았어요. 시집의 빨간 표지가 안쪽으로 흘러들어갔으므로 이후 도버해안은 핑크빛 물결로 씻길 거예요.
시골에서의 폭풍우란 참으로 귀찮기 짝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 때마다 집 밖에 내놓은 온갖 것을 생각해야 되고, 또한 그것들이 언제나 손해를 입기 때문입니다.
목요일
아저씨, 아저씨!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방금 우체부가 두 통의 편지를 갖고 왔어요.
첫째, 저의 소설이 팔렸어요. 50달러로.
오오, 저는 드디어 작가가 되었습니다.
둘째, 또 한 통은 대학의 서무과로부터 온 것인데 앞으로 2년 동안 제가 기숙사비와 수업료를 포함한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는 통지서예요. 이건 우리 학교 동문 한 분이 일반 학과의 성적이 좋으며, 특히 국어에 뛰어난 자를 위해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것을 따낸 거예요! 올 여름 이 곳으로 떠나오기 전에 신청해 두었는데, 1학년 때 수학과 라틴 어가 나빴기 때문에 행여 받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그러나 저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저는 몹시 기쁩니다. 왜냐하면 아저씨, 앞으로는 아저씨께 폐를 덜 끼쳐 드리게 되었거든요. 매달 용돈만 주시면 충분합니다. 그것도 차츰 가정교사를 하거나 좀더 창작을 하여 스스로 마련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빨리 학교로 돌아가서 공부를 시작하고 싶어요.
언제나 당신의 벗인
저류샤 애벗
'2학년생이 우승했을 때'의 책자. 전국 서점에서 판매중. 정가 10센트.
9월 26일
키다리 아저씨
또 대학에 돌아왔습니다. 이젠 상급생이에요. 올해의 우리 서재는 이제까지 보다 훨씬 좋습니다. 남쭉으로 난 큰 창문이 둘, 게다가 훌륭한 가구까지 있어요! 용돈이 얼마든지 있는 줄리아가 저보다 이틀 먼저 도착하여 방을 꾸미느라고 정신이 없더군요.
벽지를 새로 바르고, 동양식 융단을 깔고, 마호가니 의자를 놓고, 그건 지난 해까지 우리가 자랑스럽게 쓰던 마호가니 빛으로 칠한 가짜가 아닌 진짜예요. 매우 호화로운 것입니다만, 어쩐지 저는 이 방에서는 마음이 차분해지지 않아요. 늘 어디다 잉크칠이나 하지 않을까 하고 조마조마해야 되니까요.
그리고 아저씨의 편지- 실례했습니다- 비서 되시는 분의 편지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저씨, 어째서 장학금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까닭을, 제가 납득이 가도록 설명해 주시지 않으시나요? 아저씨께서 무슨 이유로 반대하시는지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하지만 아무리 항의하신다 해도 아무 소용없어요. 왜냐 하면 저는 이미 그걸 승낙했고, 결심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요. 이런 말씀을 드리면 몹시 건방지게 들리시겠지만, 저는 결코 그런 마음은 없습니다.
아마도 아저씨께서는 제게 교육을 시키겠다는 일에 손을 대신 이상은, 마지막으로 졸업 증서라는 형식의 종지부를 찍어, 깨끗이 마무리 짓고 싶은 심정이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의 입장도 좀 생각해 주세요. 물론 저는 아저씨께서 학비 전액을 대주신 것과 똑같이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될 수 있는 한 아저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아저씨가 제게서 돈을 돌려 받으려고는 생각지 않으신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갚아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래서 그 경우 장학금을 받아 두면 저의 부담이 그만큼 가벼워지는
셈이죠. 저는 아저씨께서 대주신 학비를 모조리 갚는 일에 나머지 온 생애를 바쳐야 한다고 각오하고 있었는데, 이로써 저의 생애의 절반만 바칠 수 있게 된 거예요.
아저씨, 부디 저의 입장도 이해해 주시고, 그렇게 기분 언짢게 생각지 마세요. 용돈은 전과 다름없이 깊은 감사로써 받겠습니다. 저는 줄리아나 이 방에 어울리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아저씨로부터 받는 돈이 필요합니다. 생각할수록 줄리아가 좀더 검소하게 자랐거나 아니면 줄리아가 저와 한방이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그다지 대수로운 편지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좀더 여러 가지 말을 할 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창문의 커튼 넉 장과 문에 걸 두터운 커튼 석 장의 가장자리를 꿰매고 있는 중입니다(이 거친 바느질 솜씨를 아저씨께서 못 보셔서 다행이에요).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을 놋쇠 잉크스탠드와 펜꽂이를 치약으로 닦아야 합니다(이건 몹시 힘이 드는 일이에요).
그리고 매니큐어 용 가위로 액자를 걸 철사를 자르고, 네 상자에 가득 든 책을 꺼내고, 두 개의 트렁크에 가득 들어 있는 옷을 정리해야 합니다(저루샤 애벗이 두 개의 트렁크에 가득 옷을 가지고 있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죠. 그러나 사실이 그런걸요!). 그 사이사이에 돌아온 그리운 친구들 50명과 인사도 나누어야 합니다.
개학날은 정말 즐거운 것이에요!
안녕히 주무세요, 아저씨. 병아리가 스스로 모이를 찾기 시작했다고 해서 그렇게 당혹해 하진 마세요. 이 병아리는 힘찬 작은 암탉으로 자라가고 있습니다. 매우 또랑또랑한 소리로 울기도 하고, 아름다운 것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이것도 모두 아저씨의 덕택이에요).
애정을 담아서
주디 올림
9월 30일
아저씨께
아저씨는 아직도 장학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고 계시나요? 저는 아직까지 아저씨처럼 완고하고 고집스럽고 이해심이 없고 끈질기고 불독처럼 콧대가 세어, 남의 입장을 몰라주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아저씨는 제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으로부터 은혜 같은 건 받지 말라는 거죠? 알지도 못하는 남! 그럼 그렇게 말씀하시는 아저씨 자신은 도대체 뭐란 말예요? 이 세상에 아저씨만큼 제게 있어 알지도 못하는 남인 사람이 또 있을까요? 길에서 만나도 저는 아저씨인 줄 모르고 있을 거예요.
아시겠어요? 아저씨. 만일 아저씨께서 분별 있고 상식 있는 분이어서 어린 주디를 격려할 만한 아버지다운 편지를 주시거나, 때로는 학교에 찾아오셔서 주디가 착한 처녀가 되어 기쁘다면서 머리라도 한 번 쓰다듬어 주셨더라면, 아마 주디는 나이 드신 아저씨를 모욕하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고, 기대하시는 대로 효녀가 되어 아저씨의 아무리 작은 소망이라도 복종하였을 거예요.
알지도 못하는 남이라니, 말씀 참 잘 하셨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우리 스미스 씨께서는 저 유리로 된 집에 살고 계시나 보지요! (속담에 유리 집에 사는 이는 돌을 던지지 말라는 것이 있다. 즉 자기 허물이 있으면서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뜻임.)
그리고 이건 남의 은혜와는 다른 것이에요. 제가 열심히 공부해서 획득한 것이에요. 위원회에서는 국어 성적이 우수한 사람이 아니면 장학금을 주지 않아요. 장학금을 전혀 주지 않는 해도 있을 정도에요! 게다가 또- 하지만 남자를 상대로 이치를 따진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특히 우리 스미스씨께서는 이론 관념이 거의 없는 남성 가운데 한 분이시죠. 남성을 동의하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비위를 맞추거나 아니면 자기가 토라져 버리거나. 저는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남성의 비위를 맞추는 따위는 경멸합니다. 그래서 저는 토라지기로 했어요.
저는 장학금을 단념할 것을 거절합니다. 만일 아저씨께서 더 이상
반대하신다면 저는 매달 보내 주시는 용돈을 받지 않기로 하고, 앞으로는 머리 나쁜 1학년생의 개인 교수를 하여, 너무 지친 나머지 신경쇠약에 걸리게 하겠어요.
이건 저의 마지막 통첩입니다.
그리고 저는 좀더 생각하는 바가 있습니다. 아저씨께서 걱정하시는 것과 같이 제가 이 장학금을 받음으로써, 누군가 다른 사람의 교육비를 가로채는 것이 된다면 그런 걱정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저씨께서 저에게 쓸 작정으로 가지고 계신 돈을 존 그리어 고아원의 누구든 다른 여자아이에게 주면 되지 않겠어요. 이건 좋은 생각이 아닐까요? 그러나 아저씨, 그 새 여자아이를 어떻게든 마음대로 교육하시는 건 좋지만, 부디 그 아이를 저보다 더 좋아하지는 말아 주세요, 네?
아저씨의 비서가 자기가 써 보낸 걸 제가 무시했다고 언짢게 생각지 않기를 빕니다. 그러나 만일 언짢아하더라도 도리가 없어요. 아저씨의 비서는 고집쟁이인걸요, 뭐. 저는 이제까지는 그분의 고집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이번만은 단호히 물리칠 작정입니다.
절대로 번복하지 않고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결심을 가진
저루샤 애벗 올림
11월 9일
키다리 아저씨
오늘 저는 구두약 하나, 칼라 두세 개, 새로 맞출 블라우스 옷감, 향료가 든 크림 한 병, 그리고 카스틸 비누 한 개를 사려고 시내에 갔습니다. 저에게는 모두 매우 필요한 물건으로 이것 없이는 하루도 못 견딥니다. 그런데 차비를 내려고 할 때에서야 지갑을 다른 외투 주머니에 넣어 두고 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간에 내려서 다음 전차로 되돌아 가야 했으므로, 체조 시간에 늦고 말았어요.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것도, 외투를 두 개 갖고 있다는 것도 매우 귀찮은 일이에요.
줄리아 펜들턴이 크리스마스 휴가에 저를 초대해 주었습니다. 아저씨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존 그리어 고아원 출신의 저루샤 애벗이 그 부잣집 사람들과 한 식탁에 앉다니요! 어째서 줄리아가 저더러 오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줄리아는 요즘 저를 매우 좋아하는가 봐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샐리네 집에 가는 편이 훨씬 좋지만 줄리아가 먼저 초대해 주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번 휴가에 어디든 가게 된다면, 우스터가 아니라 뉴욕으로 가게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펜들턴 집안의 사람들과 만날 것을 생각하니 저는 조금 겁이
납니다. 게다가 드레스도 많이 만들어야 되겠고 말예요. 그러니까 만일 제가 기숙사에 남아서 조용히 보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신다면, 그 뜻을 편지로 알려 주십시오. 그러면 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사랑스럽고 얌전하게 아저씨의 희망을 따르겠습니다.
저는 틈틈이 토머스 헉슬리(영국의 생물학자이며 저술가- 현대 영국 문단에 활약한 올더스 헉슬리의 할아버지)의 전기와 서간집을 읽고 있습니다. 이건 잠깐 틈을 내서 읽기에 가볍고 좋은 책이에요. 아저씨는 아르케오프테릭스(시조새)가 무엇인지 아세요? 이건 새입니다. 그리고 스테레오그나투스가 무엇인지 아세요? 저도 확실한 건 모르지만 이건 유인원과 사람의 중간에 있었던 것으로 상상되는 동물인데, 이빨이 있는 새나 아니면 날개가 있는 도마뱀 같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니에요. 틀렸어요. 지금 잠깐 책을 들여다보았더니 중생대에 살던 포유 동물입니다.
올해는 경제학을 선택했습니다. 경제학은 대단히 많은 성장을 가져다 주는 학과입니다. 이것이 끝나면 자선 사업과 감화사업을 택할 작정입니다. 그렇게 하면 평의원님, 저는 고아원을 어떻게 경영할 것인가를 분명히 터득하게 되겠지요.
만일 저에게 투표권이 있다면 훌륭한 유권자가 될 거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저는 지난 주일에 만 21세가 되었습니다. 저처럼 정직하고 학식 있고 양심적이고 총명한 시민에게 선거권을 주지 않다니, 이 나라는 정말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군요.
변함 없는
주디 올림
그림 설명: 이것이 스테레오그나투스의 단 하나뿐인 그림입니다.
머리는 뱀 같고 귀는 개 같고 꼬리는 도마뱀 같고 날개는 백조 같으며 털은 고양이처럼 부드럽고 깨끗합니다.
12월 7일
키다리 아저씨께
줄리아를 방문하도록 허락- 아저씨의 침묵을 저는 동의하시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린 사교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개교 기념일 댄스 파티가 있었습니다. 이 무도회에는
상급생밖에 참석이 허락되지 않으므로, 우리는 올해 처음으로 참석하게 된 겁니다.
저는 샐리의 오빠인 지미 맥브라이드를 초대했습니다. 샐리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오빠와 룸메이트이며 이번 여름캠프에 찾아왔던 사람을 초대했습니다. 머리털이 붉은 아주 인상이 좋은 사람이에요. 줄리아는 뉴욕에서 어떤 남성을 불렀습니다. 사교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지만, 그다지 흥미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치체스터 집안의 친척이라나 봐요. 이 사실은 아마도 아저씨에게는 의미심장한 것일지는 모르지만, 저에게는 의미 없는 사실입니다.
어쨋든 우리 손님들은 금요일 오후 4학년 복도에서 있는 다과 시간에 맞게 도착했다가, 만찬 시간에 맞춰 호텔로 달려갔습니다. 호텔을 초만원이어서 그 사람들은 당구대를 늘어놓고 잤다는군요. 지미 맥브라이드는 다음에 이 대학의 사교적 모임에 초대받아 올 때에는 애디론댁스의 캠프용 천막을 가져와 교정에 치겠대요.
7시 반에 남자 손님들은 학장이 주최하는 환영회와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되돌아왔습니다. 우리의 축제는 그 전에 벌써 시작되고 있었어요. 우린 남자분을 위해 카드를 준비해 두었다가 댄스가 한 곡 끝날 때마다 파트너를, 저마다의 머리 글자를 표시한 밑에 남겨 두고 오기로 했어요. 그렇게 해두면 다음 파트너를 금방 찾을 수가 있는 거예요. 이를테면 지미 맥브라이드는 다음 파트너가 올 때까지 참을성 있게 M자 밑에 서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맥브라이드 씨는 금방 자기의 자리를 떠나 A나 S자가 있는 곳에 섞여 버리곤 했어요.
매우 신경이 쓰이는 손님이었어요. 그분은 저와 세 번밖에 못 추었다면서 기분이 좋지 않더군요. 모르는 여자와 춤 추는 것이 쑥스럽다나 봐요.
다음 날 오전에는 글리 클럽(합창대)의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합창하기 위해 특별히 작곡된 노래의 재미있는 가사는 도대체 누가 썼다고 생각하세요? 바로 저예요. 정말입니다. 아저씨가 돌봐 주신 조그만 고아아이는 지금은 상당한 인물이 되어 있다구요.
어쨌든 우리들은 이틀 동안 매우 유쾌하게 보냈어요. 남자분들도
유쾌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가운데는 천 명이나 되는 여학생과 만날 것을 생각하고 주눅이 든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도 금방 익숙해져서 예사로워졌어요. 우리가 초대한 두 프린스턴 대학생도 몹시 즐겁게 지냈습니다. 적어도 두 사람은 예의바르게 즐거웠다고 인사를 하고, 내년 봄의 댄스 파티에 우리를 초대해 주었어요. 저는 그걸 승낙했습니다. 아저씨 반대하지는 마세요. 네?
줄리아와 샐리 그리고 저는 새 드레스를 맞춰 입었어요. 어떤 것인지 아저씨는 물어 보고 싶으시죠? 줄리아 것은 크림빛 새틴에 금실로 수를 놓은 것으로 가슴에 보랏빛 난초를 달았습니다. 그것은 파리에서 부쳐 온 것으로 백만 달러짜리라나요. 정말 꿈같이 아름다웠어요. 샐리는 엷은 청색에 페르시아 자수를 놓은 것으로 붉은 머리와 잘 어울렸어요. 그건 백만달러짜린 되지 않았지만 줄리아에 못지않게 보기 좋았어요.
저는 연한 분홍빛 비단옷으로 갈색 레이스와 장미빛 공단 장식이 달려 있었어요. 그리고 저는 지미 맥브라이드 씨가 선사해 준 진홍빛 장미꽃다발을 들었어요(샐리가 저의 드레스색을 지미 씨에게 알렸던 거예요).
우리 셋 다 비단 양말에 공단 무도화를 신고 저마다 드레스에 조화되는 얇은 비단 스카프를 맸어요. 이런 여자의 장신구에 대해 자세하게 들으시고 아저씨는 감탄하시겠죠.
그런데 아저씨, 얇은 비단이니 베니스 레이스니 수직 레이스니 아일랜드의 크로스뜨기니 해도, 남자 분들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니, 남자들의 생활이란 정말 무미건조한 것 같습니다.
여자라는 것은 그 관심이 아기에게 있든 병균에 있든 남편에게 있든, 시에 있든 평행 사변형에 있든 정원에 있든 플라톤의 철학에 있든 또는 카드놀이에 있든, 근본적인 흥미는 언제나 옷에 있습니다.
이 자연적인 천성 때문에 온 세계가 동포가 되는 것입니다. 이건 저의 말이 아닙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따온 말이랍니다.
그건 그렇다치고 요즘에 제가 발견한 것을 아저씨는 듣고 싶지 않으세요? 그러나 저를 허영심이 많은 아이로 생각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아름다워요.
정말이에요. 방에 삼면 거울이 있는데 그것도 모른다면 저는 정말
바보게요.
한 친구로부터
추신
이건 소설 같은 데 잘 나오는 고약한 익명의 편지입니다.
12월 20일
키다리 아저씨
조금밖에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두 과목의 강의를 듣고, 트렁크와 슈트케이스를 챙겨서 4시 기차를 타야 하거든요. 보내주신 크리스마스 선물에 대해 제가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아저씨에게 한 마디 인사도 없이 떠날 수는 없습니다.
모피 목도리도 목걸이도 비단 스카프도 장갑도 손수건도 책도 지갑도, 모두 제가 좋아하는 것뿐입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아저씨예요. 그러나 아저씨가 이런 선물로 저의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것은 잘못이에요. 저 역시 평범한 인간이며 더구나 젊은 처녀거든요. 아저씨가 이렇게 속된 것으로 저의 마음을 다른 데로 옮기게 하신다면, 어떻게 한눈 팔지 않고 공부에만 열중할 수 있겠어요.
저는 이제 와서야 존 그리어 고아원에 해마다 크리스마스에는 선물을 매단 아름다운 트리를, 그리고 일요일마다 아이스크림을 선물해 주신 분이 어느 평의원님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선물의 임자는 언제나 익명이었으나, 그 방법으로 보아 저는 알 수 있어요. 아저씨는 이런 갖가지 선행에 어울리는 큰 복을 받을 것이며 항상 행운이 따를 것입니다.
안녕.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맞으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당신의
주디 올림
추신
저도 자그마한 선물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아저씨께서 저를 만나게 된다면 저를 좋아해 주실지 모르겠어요.
1월 11일
뉴욕에서 편지를 드리려 했지만, 그 큰 도시는 사람의 혼을 빼 버리는 곳입니다.
저는 화려하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그러한 가정의 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저는 존 그리어 고아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편이 훨씬 낫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록 저의 태생에 커다란 열등의식을 갖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가문을 가지고 허세를 부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저는 이번에 처음으로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물질의 중압감에 신음한다는 말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가정의 물질적인 분위기에 심한 중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돌아오는 급행열차를 탈 때까지 마음 편히 숨도 쉴 수 없었습니다.
그 집의 가구는 모두 조각이 되어 있고, 호화롭게 꾸며진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만남 사람들은 모두 아름답게 차려입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저씨, 저는 그 집에 갔다가 돌아올 때까지, 그 사람들이 진정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들어 본 일이 없습니다. 일찍이 사상 따위는 한 번도 그 집 문턱을 넘어온 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펜들턴 부인은 보석과 드레스 메이커와 사교상의 약속 이외의 일은
아무것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사람 같습니다. 그 부인은 맥브라이드
부인과는 전혀 다른 형의 어머니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만일 제가 결혼하여 가족을 가지게 된다면, 맥브라이드 집안과 똑같은 가정을 만들 작정입니다. 저는 온 세계의 모든 돈을 쌓아 놓아도, 제 아이는 펜들턴 집안 사람처럼 만들진 않겠습니다.
제가 손님이 되어 간 집안 사람들을 이렇게 악평한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겠지요? 만일 그렇다면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이건 아저씨와 저만의 비밀로 해 두세요.
저비 도련님과는 단 한 번, 그분이 다과회에 오셨을 때 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분과 친하게 이야기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지난 해 여름에는 그렇게 즐겁게 지냈는데, 이번엔 매우 실망했습니다. 그분은 친척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또 그 집안 사람들도 확실히 그분을 좋아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았어요!
줄리아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저비스 씨는 괴짜이고 사회주의자랍니다. 머리를 길게 하거나 빨간 넥타이를 안 매는 것만도 다행이며, 펜들턴 집안은 대대로 영국 성공회의 신자였었는데, 도대체 어디서 저런 사상이 그 사람의 머릿속에 담기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분은 요트라든가 자동차라든가 폴로(말을 타고 공을 치는 경기)용의 당나귀라든가 하는 제대로 된 일에는 돈을 쓰지 않고, 온갖 엉뚱한 개혁에만 돈을 버리고 있다는군요.
하지만 그분은 자기 돈으로 초콜릿 같은 것을 사는 일도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때엔 줄리아와 저에게 초콜릿을 한 상자씩 선물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저씨, 저는 사회주의자가 될 작정이에요. 괜찮겠죠. 사회주의는 무정부주의 따위와는 전혀 다릅니다. 폭탄을 던져서 사람을 살상하는 것 같은, 그런 방법에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주의자의 일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무산계급이니까요. 그러나 아직 무슨주의자가 될지 확실히 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일요일에 깊이 생각하고 난 다음에, 편지로 저의 주의를 발표하겠습니다.
저는 극장, 호텔, 아름다운 저택을 많이 보았습니다. 제 머릿속은
줄마노라든가 금박이라든가, 쪽나무 마루라든가, 종려나무 따위로 혼란되어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정신이 없어 멍한 상태지만, 대학에 돌아와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근본부터 학생으로 되어 있는가 봐요. 이 곳의 차분하고 지성적인 분위기가 뉴욕보다 오히려 더 긴장감을 주니까요. 대학이란 곳은 매우 충족된 생활을 하게 합니다.
책이며 공부며 규칙적인 수업은 사람을 정신적으로 신선하고 활기 있게 해줍니다. 그리고 머리가 피로해졌을 때는 체조라든가 야외 경기를 하기도 하고, 게다가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쾌적한 친구가 언제나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밤새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실컷 지껄인 다음에, 의기양양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듭니다. 그리고 조금의 틈이라도 생기면 그것을 메꿀 웃음거리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시시한 우스갯소리지만 우리는 그런 재담에 우쭐해서 크게 만족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크고 멋진 기쁨이 아니라 조그마한 기쁨을 발견해 나가는 일입니다. 아저씨, 저는 행복해질 수 있는 진정한 비결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현재에 사는 일이랍니다. 언제나 과거의 일을 후회하거나 미래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으로부터 최대의 기쁨을 찾는 일입니다. 그것은 꼭 농사와 같은 것입니다. 자본과 노력을 적게 들여 경작하는 조방농업과 한정된 토지에 많은 자본과 노력을 들여서 생산증대를 꾀하는 집약 농업이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집약적 생활을 할 생각입니다.
저는 순간순간을 즐거워하고, 더구나 자신이 즐거워하고 있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생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경주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평선 저 멀리 있는 결승점에 한시바삐 도달하는 데에만 열중하여 헐떡거리며 달리고 있어서, 자신이 지나가고 있는 아름답고 고요한 전원 풍경 같은 것은 눈에 띄지도 않는 겁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자신이 너무 늙었고 피로에 지쳐 버려, 결승점에 도달하든 말든 아무래도 좋은 상태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는 비록 유명한 작가가 안 되어도 좋으니까, 인생의 길가에 앉아서 조그마한 행복을 많이 쌓아올리기로 했습니다. 아저씨는 저같이 사상의 발전을 이룩하고 있는 여자 철학자를 보신 일이 있으세요?
변함 없는
주디
추신
오늘밤은 억수같이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강아지 두 마리와 아기고양이 한 마리가 방금 창틀에 매달렸습니다. (우리 말에 억수같이 비가 내린다는 것을 영어로는 고양이와 개의 비라고 하기 때문에 빗발이 창에 붙는 것을 강아지 두 마리, 고양이 한 마리라고 표현한 것이다)
친애하는 동지여!
만세! 저는 페이비언 사회주의자입니다. 즉 느긋하게 기회가 성숙할 때까지 기다리는 사회주의자인 것입니다. 이 일파는 내일 아침 당장 사회혁명을 일으키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짓을 하면 사회의 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놀라지 않을 마음가짐이 될 때까지, 먼 앞날을 향해서 꾸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선은 산업, 교육, 고아원 등 여러 분야의 개혁에 착수함으로써 그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2월 11일
D.L.L.께
친애하는 그대여, 이 글이 너무 짧다고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것은 편지가 아니라, 이제 곧 시험이 끝나는 대로 편지를 올리겠다는 말을 전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다만 시험을 치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