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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을 향한 세 가지 기도

박민진 |2008.11.26 09:34
조회 61 |추천 0

 

에베소서(10): 성도들을 향한 세 가지 기도(엡3:14~21)

오늘은 에베소서 3장의 마지막시간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바울의 에베소 교회를 향한 기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3장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는 교회가 하나님의 각종 지혜가 선포되는 곳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여러분에게 주어진 일들 앞에 최선을 다해서 탁월해져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지혜는 한계를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힘입어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엡3:14~16)

 

바울은 성도들로 하여금 가장 먼저 강건할 것에 대하여 말합니다. 당시에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핍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숨을 잃기도 했으며 가족이나 형제로부터 버림을 받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도 많은 이단사상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가르침으로 믿음이 굳세지 못한 성도들이 미혹되기도 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어땠습니까?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던 상태였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것처럼 로마의 네로황제는 도시에 불을 지르고 난 뒤에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누명을 덮어씌워서 수많은 믿는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특별히 믿는자라고 해서 심각한 핍박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우울합니다. 요즘에는 뉴스를 봐도 온통 어두운 이야기들뿐입니다. 세계경제의 몰락과 원․달러 환율 하락, 내수침체, 기업들의 줄도산, 자영업자의 몰락, 자살, 방화, 납치 같은 어두운 소식들이 연일 우리 주변에서 들리고 있습니다. 최근의 위기가 갖는 특징은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경제위기가 시작되자 그 아래 있는 우리나라가 큰 피해를 입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나라에서 달러를 많이 갖고 있어도 미국의 휘청거리니까 그 많은 달러를 한 번에 시장에 풀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년 전만해도 펀드투자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추앙받았습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대출까지 받아가며 금융시장에 돈을 맡겼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코스닥이 1,000포인트 대를 간신히 넘고 있습니다. 2,000포인트 대의 시장을 보고 투자를 시작한 사람들이 같은 비율의 수익을 원한다면 4,000포인트가 되어야 하겠지만 지금으로써는 아무리 봐도 먼 미래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초대교회와 비교해서 그 사안에는 차이가 있지만 여전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둡고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은 몇 가지 다른 말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먼저 바울은 하나님을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름을 주셨다는 말은 아신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말하면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부를 때 “저기요.” 또는 “실례합니다.”와 같은 어색한 표현들을 사용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상대방이 나에게 어떻게 나올지 반응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름을 주신다는 말씀은 너와 내가 아주 특별한 관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새로운 시작을 기념하며 사람의 이름을 종종 바꾸셨습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셨습니다. 아브람은 높은 아비라는 뜻이며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라는 뜻입니다. 즉 이제 아브라함은 몇 사람의 아비가 아닌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이라는 깊은 의미가 그 이름 속에 담겨있던 것입니다. 또 야곱을 보면 야곱 자체의 의미는 “속이는 자”, “빼앗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십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자”라는 뜻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 있어서 이름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억 속에 우리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섬들아 내게 들으라 먼 곳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사49:1)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태에서부터 우리를 부르셨고 이미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께 기억되었음을 인하여 안심할 수 있습니다. 버림받을까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며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도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영광의 풍성하신 하나님을 이야기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부르시는 하나님께서 풍성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것이 참 간교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풀어져도 세상의 것들을 바라보면서 삽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분명히 있는데 아무 문제없이 잘 살 때는 그것을 거역합니다. 그리고 온통 세상의 자랑과 정욕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문제가 닥치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두 모습의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비유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탕자의 비유입니다. 작은 아들은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아버지에게 이름이 불린바 된 자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비유 속의 아버지는 소유가 풍성했습니다. 그러나 자식은 오만하게도 아버지의 재산을 반이나 가져다가 먼 나라에서 탕진해버립니다. 그리고 거지가 되어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얻지 못하자 아버지에게 종살이 할 것을 다짐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때 아버지는 그 목에 입을 맞추고 좋은 옷과 금가락지로 치장을 하고 큰 잔치를 엽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세상이 주는 만족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와 같다는 것입니다. 쥐엄 열매가 주어지면 그것이라도 먹고 살 수 있으니 사람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쥐엄 열매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일 줄 알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들에게는 쥐엄 열매조차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소유가 풍성한 아버지를 찾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이 주는 쥐엄 열매에 만족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어두운 소식에 인생을 맡기지 마십시오. 그리고 우리 각 사람의 이름을 아시고 부르시는 하나님께 모든 짐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영광의 풍성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것들은 다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변하시지 않습니다. 저는 변함없으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야고보서 1장 17절 말씀을 참 사랑합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이 말씀은 하나님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부르시며 우리를 향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 하더라고 우리는 반드시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께 돌이켜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죄를 짓고 용서받는 행위를 회개라고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말로 “슈브”인 회개의 뜻은 가던 길을 돌이킨다는 의미입니다. 즉 무엇이 죄입니까?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을 등지고 다른 길로 가는 것이 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풍성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슈브해야 합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늘 그분의 풍성에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풍성한 아버지께서는 탕자의 아버지와 같이 우리를 맞아주실 것입니다. 이렇듯 성경이 말하는 강건함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약할 때 더욱 강해진다는 말씀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시고 늘 하나님을 의지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7~19)

 

바울의 성도들을 향한 다음 기도는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그냥 계신 것이 아니라 그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깊게 박힐 것을 바울은 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연애하는 감정을 생각하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을 마음속에 담습니다. 그리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그 사랑하는 마음이 가슴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 사람으로 큐티하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늘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잘 합니다. 그리고 혹시나 편지라도 받는 날이면 그것을 수십 번 읽습니다. 그리고 각 문단과 문장별로 장, 절을 나누고 각 절마다 주석을 답니다. 그리고 단어 하나하나에까지 의미를 두어 해석합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생깁니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상대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8절에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일은 괴로운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지식만을 공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일”은 행복한 순례의 여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삶의 상당한 시간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일에 드려야 합니다. 가령 세상 속에서 만족할만한 성과와 안정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은 허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세상의 어떤 만족으로 채워져 있다 해도 그들은 말할 수 없는 큰 공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마음속에 오직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공간을 다른 그 어떤 것으로 채워도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여전히 허전함이 있지는 않습니까? 말할 수 없는 공허함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곳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바울은 그곳이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일로 채워질 때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9)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한자가 누리게 될 만족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우주보다 더 큰 공간이 있습니다. 그곳은 우주의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그곳은 오직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만으로 채울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러므로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일에 힘쓰고 그 사랑의 충만함을 삶 속에서 경험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의 풍성한 삶을 위함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이 사실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풍성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3:20,21)

 

바울의 마지막 기도에 주목합시다. 바울은 성도들을 향한 간결하고도 사랑이 듬뿍 담긴 기도를 마치면서 하나님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보입니다. 그것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는 그의 고백에서 정확히 드러납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바울과 같은 확신을 늘 마음속에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다가 응답이 이루어지면 “어? 진짜 됐네?”하면서 되레 놀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바로 전적인 믿음의 확신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누군가에게 일을 맡긴 후에는 믿어주라고 조언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불신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예전에 어떤 집사님께서 딸의 수능시험을 위해 많은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회에서 나오면서 한다는 소리가 “솔직히 하나님이 어디 있어? 그냥 마음의 위안으로 하는 거지.”였습니다. 여러분 불신으로 기도하는 것은 허공에 울려 퍼지는 메아리이며 땅에 떨어지는 소리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얼마나 귀중히 여기셨던지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적을 보이시기 전에 반드시 그 사람의 마음에 있는 믿음을 보셨습니다.

 

한 가지 이야기만 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한창 안수집사직을 놓고 기도하시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당시 구체적으로 기도하라는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수능을 앞둔 저를 위해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제 시험 볼 자리를 놓고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교탁 바로 옆 두 번째 줄” 이것이 저희 아버지의 기도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시험 보기 전날 시험장에 가서 자리를 확인했을 때 아버지가 기도하셨던 바로 그 자리가 제 시험좌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인도하심에 제가 얼마나 큰마음의 위안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이렇듯 믿음으로 하는 기도는 주변사람들에게까지도 큰 위안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분명히 신뢰함으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의 에베소 교인들을 향한 기도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이름을 아시는 풍성하신 하나님을 늘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하나님을 늘 마음 중심에 두고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일로 마음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참 만족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간구할 때는 반드시 믿음으로 기도하십시오. 믿음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을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큰 위로가 됨을 기억하시고 삶 속에서 늘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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