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08. 12. 8 13:14
# 사례 1
작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영화 현장에 뛰어든 김계성 씨(가명. 29).
대학에서 영화 동아리 활동을 하며 '시네마 키드'를 꿈꾸던 그는
휴학 때에는 영화사 기획실에서 시나리오 개발과 캐스팅 제안서를 쓰면서
미래의 영화감독 꿈을 키웠다.
현장 스태프 일이 고되고 박봉이었지만
간간이 기업홍보물 촬영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꿈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해부터 불기 시작한 충무로 한파에 올 2월 이후 일거리를 찾지 못 하고 있다.
이력서만 30군데 이상을 썼지만 불러주는 곳이 없다.
나름대로 시나리오를 쓰면서 단편영화 길을 알아보고 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 사례 2
지난 해 11월 촬영을 마지막으로 현장에 돌아가지 못 하고 있는 이민성 씨(가명. 33).
예전과 같이 일하던 프로듀서 형님과 동료들에게 부탁해 일거리를 찾고 있지만
돌아오는 건 신세한탄의 차가운 소주잔 뿐이다.
생후 6개월 된 딸내미 얼굴이 밟혀 낮에는 편의점 알바,
밤에는 대리운전을 뛰지만 손에 쥐는 돈은 고작 3~4만원밖에 안 된다.
더구나 여기도 경쟁이 치열해 언제 그만둬야 할지 모른다.
현장에서 연락이 오면 금방이라도 달려갈 준비가 됐지만
이젠 그 시절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 할까 하는 걱정이 가장 무섭다.
# 사례 3
대학 졸업 후 촬영부 막내부터 시작해 퍼스트 자리까지 올라온 올해 경력 10년차인 김도형 씨(32).
영화현장 일에 CF, 뮤직 비디오, 기업홍보물 등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까지 해도 연봉 2000만원이 안 된다.
그나마 자신은 퍼스트이기에 이 정도라도 받지만
직급이 내려가면 1년에 두 작품을 해도 800만원이 채 안 된다.
영화 쪽에 일이 없어 계약서를 쓰고 드라마 현장에서 일을 했지만 지금까지도 돈을 못 받고 있다.
- "30만~50만원을 받아도 현장에서 일을 했으면" -
영화 현장의 일거리가 없다.
제작에 들어가는 영화 편수가 절대적으로 줄어듦에 따라
이직을 하거나 일자리를 찾지 못 하고 마냥 대기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현장에서 체감하는 열악함은 일거리가 80~90% 줄어들었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다.
한 충무로 제작자는
"호황 때는 100평, 평년에는 40~50개는 되던 영화 라인업이 올해는 30개,
내년에는 20개 안팎에 불과하다"며 최근 상황을 단적으로 말했다.
간간이 인력공고가 나와도
제작자나 감독의 인맥에 따라 채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더구나 촬영하다가 연기되거나 엎어지는 경우도 부지기수라서 현장에 들어가도 안심하기는 이르다.
언제 일을 잃을까 하는 불안감에 촬영이 끝난 뒤에 동료들과 소주잔을 기울이지만
뾰족한 대안이 없다.
그저 촬영이 오래갔으면 하는 소박함과 상황이 나아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불안한 고용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현장을 떠나지 못 하는 이유로는
노력의 결과물이 대중에게 보였을 때의 자기만족을 첫손에 꼽았다.
한 현장 스태프는
"자신의 땀과 열정을 쏟아낸 영화가 스크린으로 투영될 때의 기분은 주연배우 이상이다.
특히 마지막 자막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갈 때의 짜릿함은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말했다.
김도형 씨는 "호환, 마마보다 이쪽 중독성이 더 강하다.
고용과 복지에서 안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한 컷을 위해 밥도 안 먹고 뛰어다녀도 그 맛에 빠지면 좀처럼 헤어나오기 쉽지 않다"며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장면 하나마다 담긴 사연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고 말했다.
월 30만~50만원을 받아도
창작활동에 대한 매력을 떨쳐버릴 수 없어 현장을 지키는 스태프들이 많다.
심지어 해외 유학파 스태프들은 영어 과외를 하면서도 끈을 놓지 않으려 한다.
한 영화 스태프는
"아르바이트 수준의 돈을 받으면서도
5~10년 뒤에 메가폰을 쥔 감독이 되겠다는 꿈이라도 없으면 도저히 버텨낼 수가 없다"고 말했다.
- 스태프 인건비 지원 우선 선결돼야 -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이하 '영화노조')과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이하 '제협')은
지난 해 4월 영화산업 단체협약 조인식을 가졌다.
양측이 합의한 주요 내용은 '월 2회 이상 정기적 임금 지급', '4대 보험 가입 및 관리',
'주 1회 휴무', '4대 부서 직급별 최저임금 산정' 등이다.
그러나 이는 현장의 스태프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당시에도 영화노조는 '사즉필생'의 각오로 임금 체불을 없애기 위해 나서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임금체불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더구나 최근 한국영화의 위축으로 제작에 들어가는 편수가 줄어들면서
최소한의 단체협약을 지키는 제작사도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영화노조에 따르면 인건비 지급은 가장 선결순위가 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없어지거나, 제작사 대표가 도망치는 경우에는 딱히 대처가 없다고 토로했다.
보통 스태프는 인건비를 계약금과 잔금으로 받는데,
계약금만 받고 잔금을 못 받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 경우 법적,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만
노동부나 법원에서는 '계약금을 줬기에 주려고 하는 의지가 있다'고 판단해
실제로 스태프가 돈을 받기가 힘들다.
현장의 목소리는 지금보다 더 내려갈 곳이 없다는 '밑바닥 정서'가 대부분이다.
같은 비정규직이라도 일반 기업체 직군은 '무기계약직' 형태로라도 계속 일을 할 수 있지만,
영화는 한 작품이 끝나면 다른 작품을 찾아야 하는 '보따리 직군'의 성격이 강하다.
보통 6개월 이상을 일해야 4대 보험 가입이 가능하지만
스태프들은 그 전에 일이 끝나는 경우가 많아 이 혜택조차 받지 못 한다.
최진욱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은
"임금에 대한 최우선 변제를 위한 제도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며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라도 영진위가 지난 3월에 결성한 투자조합에서
임금체불한 제작사는 투자심사대상에서 투자 제한을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문봉환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한국영화진흥 1팀장은
"2009년부터 영진위 지원 펀드 투자에 대해서는
스태프 인건비는 별도 계정으로 우선 지급하는 것을 명문화 하기로 했으며
제작지원 사업의 경우에는 아직 협의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존 임금체불 제작사에 대해서는 소급적용해서 강제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임금지급을 권고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어 아쉽다고 밝혔다.
- 영화 스태프는 '예술가' ... 돈을 밝히면 안 된다 -
영화 촬영은 회차에 따라 보통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걸린다.
하지만 촬영 전 프리 단계를 2개월로 잡고, 후반 작업은 2개월로 잡으면
보통 1년에 한 작품 이상 참여하기가 힘든 실정이다.
이 때문에 싼 게 비지떡인 줄 알면서도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계약한 시급 외에 추가로 회차가 늘어날 경우에는 추가 경비를 받기로 계약서를 작성하지만
이대로 받는 스태프들은 거의 없다.
시급을 낮게 책정해 제작사와 감정 싸움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제작자가 거의 이긴다.
자칫 일거리가 떨어질까 두려운 스태프들이 대부분 손을 든다.
그러나 제작사 측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100% 투자가 완료된 상태에서 영화 제작에 들어가는 경우보다
70~80% 투자가 결정되고 찍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제작비의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제작비가 오버되거나 천재지변으로 회차가 늘어날 경우 추가비용을 마련해야 한다.
제작사는 스태프들도 고통 분담에 참여해 영화를 일단 만들고
흥행한 후에 보너스 정산할 것을 주장한다.
한 영화 제작자는 "영화는 투기성이 강하다.
아무리 톱스타를 데리고 찍어도 불확실성이 존재한다"며
"흥행한 작품이라도 차, 포 떼고 나면 남는 게 없다"고 하소연했다.
최 위원장은 "1년에 제작 편수가 40편이면 편당 50명, 총 2000명이 일하는 셈이다.
하지만 중복이 있기 때문에 1000명 정도가 일하는데 이들의 평균 임금이 1000만원이 안 된다"며
"주무부처에서 시장 변화에 따른
영화 시장의 고용과 인프라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문화산업의 에너지는 현장의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고,
이들을 보호하는 정책을 펴야 하지만 현실은 이를 담보하지 못 한다"며
"문화의 다양성처럼 노동의 다양성도 인정해 달라"고 주장했다.
현장에서 만난 한 스태프는 "처음 현장에 뛰어들어
6개월 동안 갖은 심부름과 밤샘 촬영 끝에 달랑 운동화 하나 건졌다.
영화하는 사람은 예술가이니 돈을 밝히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이 길로 잘못 들어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말했다.
장원수 기자 jang7445@kh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