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에 있는 도카치다케(十勝岳, 2077m)
정상 모습
제 별명은 개코(犬の鼻)입니다
월간 [MOUNTAIN]의 취재건으로 홋카이도(北海道)의 도카치다케(十勝岳, 2077m)에 올랐을 때의 일이다. 그 산은 1990년까지 입산
자체가 전면금지되었던 활화산이라 산행초입에는 정상의 유황가스
분출량을 조사하는 감시카메라가 지역의 방재센터와 연결되어 있
다. 그걸 보고 있자니 약간 걱정이 되어 현지 산악가이드에게 질문
을 던졌다.
"정상에 유황(硫黃)가스 냄새가 지독한 편인가요?"
"(?).. 글쎄요. 지독하지는 않지만 간혹 싫다는 분들은 있는 것
같더군요."
"그것 참! 걱정되네요."
"....?..."
"제 별명이 개코(犬の鼻)라서.."
"하하하하하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올랐지만 1600m를 넘어서면서부터는
날씨 탓에 10m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계가 불량했다. 정상을
상당히 앞둔 지점에서 혼자서 중얼거린 말을 가이드가 들었다.
"역시 개코라니깐..(やっぱり犬の鼻..)"
"에..? 진짜요? 김상! 진짜 여기서 유황 냄새가 나나요?"
"예, 유황냄새(硫黃のにおい)는 정면에서 오는데 바람 방향을
감안하면 2시 방향이 정상인 것 같습니다."
"앗! 맞아요. 정말이지 놀랄 노짜네요. 아까는 그냥 농담인 줄
알았어요.."
정상의 유황냄새가 조금씩 나는 곳, 즉 설계(雪界)가 시작되는 지점
에서 모여있던 일행들 사이에서도 그 일이 단연 화제가 되었다.
"김상은 6km 전부터 이 냄새를 맡았데요. 한 치 앞도 안보이는
이 날씨에 정상위치를 정확히 말해서 깜짝 놀랐다니까요.."
"이 지점에서는 1시 방향이 정상이네요. (냄새의 강도로 보아) 앞으
로 40분 정도만 더 가면 정상이 나올 것 같습니다."
".......쩝....."
이런저런 이유로 인정했으니 내가 홋카이도의 "바람 냄새(風のにおい)"가 좋다고 해도 믿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홋카이도(北海道)는 자주 오셨나요?"
"처음입니다. 이 산이 정말 마음에 드는데 날씨 탓에 아쉽네요. 꼭
다시 오고 싶은 산입니다."
"그렇군요. 홋카이도의 첫인상이 어떻든가요?"
"치토세(千歲)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바람의 냄새가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군요.."
"우리나라에서도 대관령에 가면 이런 바람이 있죠.
아름다운 바람이.. "
▲ 활화산인 도카치다케의 정상을 감시하는 감시카메라.
정상 근처에서는 유황 냄새가 제법 많이 나는 편이다.
바람의 냄새(風のにおい)
10대, 20대 시절에는 유난히 가을을 많이 탔다.
나는 계절이 바뀌는 것을 바람의 냄새가 달라짐으로 가장 먼저 느낄
수가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냄새가 모두 다르지만 특히, 여
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그 시점에는 바람 속에 무언가 사람을 미치
게 만드는 것이 들어있는 것만 같았다.
발정난 호랑이는 유전자의 명령을 충실히 따라 사방 60km 이상을
이동하며 짝을 찾는다지만, 가을을 느낄 때 내 유전자는 나더러 미
친듯이 술을 퍼마시고 무작정 여행을 하라고 명령했다.
어느 시점부터 '질풍노도'와 같았던 나의 청춘은 종언을 맺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때문인지는 아직 정확히 모른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
는 내 감각이 예전만 못해져서인 지, 방황하지 않아도 될만큼 좋은
사람을 만난 탓 인지.. 그 이유는 아직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어렴풋
이 짐작만 할 따름이다.
냄새에 관한 몇가지 생각들
냄새의 메커니즘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
가장 간단히 말하자면, 모든 냄새는 그 냄새의 원물질을 구성하던
분자가 내 코의 점막에 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서,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어디선가 똥냄새가 난다는 것은 내 코에 그 똥이 닿았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평생 좋은 냄새만 맡고 사는 편이 이롭다는 말은 이런 냄새의 메커
니즘 때문에라도 사실에 어느 정도 부합되는 말이다.
사람은 감각기관을 통해 현상과 사물의 실재감(實在感)을
느끼게 된다.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을 믿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직
접 손으로 만져보고서야 믿는 사람도 있다. 가장 위험한 방법이지
만, 모든 것을 입 속에 넣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물론 있다.
내 경우에는 여러 감각 중에서도 냄새가 어떤 현상의 실재감을 강하
게 규정짓는다.
내가 공포영화나 끔찍한 처형장면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볼 수
있는 것은 담이 커서도 아니고, 그런 것들에 잘 단련이 되어서도 아
니다. 어차피 화면 속의 저 장면은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독립
적인 사실일 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화면 속의 그 피비린내가 내게 '훅~'하고 끼친다면 그
때 내가 보이는 반응은 엄청나게 다를 것이 틀림없다.
내 경우 어떤 냄새가 난다는 것은
(1) 그 사실이 내 앞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어디서 불이 났는데..?")
(2) 내가 처한 환경을 극명하게 인식시킨다.
("제길, 여기 완전히 똥밭이네..!!")
(3) 무엇보다 그러한 사실이 어떤 식으로든지 나에게 영향을 미치리라는 의미한다.
("어째.. 냄새가 안 좋아. 나가자.")
냄새를 기억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단순히 텍스트
의 형태로 냄새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어떤 입체적인 유
형으로 냄새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데 굳이 구분하자면 나는 후자
에 속한다.
특정 냄새는 그것이 좋은 것이든, 끔찍한 것이건 간에 내 머리 속에
서는 3D 모형과 같은 형태로 저장되어 있다. 그 냄새는 '장기보
관'을 위해 평상시에는 얇은 막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어떤 계기로
촉발되면 때때로 그 막이 벗겨져 상당히 사실에 근접한 '재현'이 가
능하다.
'똥냄새 모형''유황냄새 모형''내 딸 냄새 모형''소나무숲 향기 모
형'이 내 머리 속의 냄새창고에 잘 쟁여져 있다가 때때로 정확한 원
형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실제와 비슷한 형태로 '재현(물론
머리 속에서의 재구성일 따름이다)'된다.
군대시절(軍隊時節)의 이야기다.
사단에서 작업병을 보내라고 단위부대로 통보를 하면 보통 쉬운 일
은 고참이, 힘든 일은 졸병이 하기로 하고 출발한다. 우리의 경우는
고참은 10분 정도의 시간을 투자해 "짬(음식물 쓰레기)"을 치우고
나머지 시간 내내 담배만 줄창 피우면 되고, 졸병의 경우는 2~3시
간 가량 삽질, 곡괭이질을 해 사단 전체가 먹을 무를 겨우내 저장할
무구덩이를 파야 했다.
그럴 때 나는 졸병을 꽤나 생각해주는 척 하며 기꺼이 삽질과 곡괭
이질을 맡았다. 후임병이야 희희낙락하고 때로 감격까지 했겠지만
나에게는 무 구덩이를 파는 일이 훨씬 '편한' 일이었기에 그런 선택
을 한 셈이다.
그 지독한 냄새야 10분만 꾹 참으면 되지만..
진짜 문제는 그 냄새가 내 머리속에 거의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기
억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게 때때로 내 머리
속에서 '재구성'되어 욕지기를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다.
실제로 제대한 지 얼마 안된 시점에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그 냄
새가 떠올라 몰래 화장실로 달려간 적도 많다.
내게 냄새라는 것은 언제든지 구체화될 수 있는 입체적인 모형으로
머리 속에 늘 존재한다.
▲ 꼭 잡고 놓지 않는 어느 아름다운 손..
내 딸아이의 냄새
냄새를 잘 맡고 잘 기억한다는 것은 편리한 점도 없지 않다. 예를 들
어, 다른 감각기관이 역할을 못하는 상황... 어둡고 시끄러운 공간에
서도 냄새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해 닥쳐올 위험에 대처할 수 있다.
단지 코의 힘으로 내 몸을 건사한 적도 있고, 개코에 얽힌 재미있는
사연들도 많았지만 그런 것들을 일일이 나열하고 싶지는 않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냄새를 잘 맡는다는 것은
큰 불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성비염으로 냄새를 전혀 못 맡는 것은 심히 불행한 일이지만
냄새를 잘 맡는 사람의 경우도 불행하기는 마찬가지다.
'사람을 좋아해서 그 사람의 냄새까지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향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어디 가면 저런 말이 있다는데 내 경우에는 저 말이
살짝 공감이 간다.
개코를 가진 사람들은 헤어진 여인의 냄새를 잊지 못한다.
남들보다 지독한 실연의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 괴로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은 그 여자보다 좋은 냄새(포괄적인 의미로)를 가진 사람을 만나는
수 밖에 없다.
이전 냄새의 기억을 완전히 덮어 버릴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만
이 유일한 해결책이고 나 역시 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굳이
감각의 피로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전 냄새가 전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좋은 사람을 만난게다.
좋은 냄새를 지닌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과의 사이에서
역시 달콤한 향기를 지닌 딸아이를 낳았다.
출장이나 산행이 있을 때마다, 딸아이 특유의 젖비린내,
비릿하면서도 달콤하기 그지없는 그 체취를 맡지 못한다는 것은
큰 괴로움이다.
보고 싶고, 만지고 싶지만 나같은 사람은 무엇보다 그 아이의 체취를 접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된다.
어디에 있건간에 내 머리 속에는 딸아이의 냄새가 원형과 상당히
근접한 형태로 저장되어 있다. 해서 아쉬움이 없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모르는 사람의 생각일 뿐, 상상을 초월하는 큰 괴로
움이다.
불을 붙여 빨지 못하면서 '럭키 스트라이크' 한 보루만을 안고
있는 사람을 상상해 보라.
차라리 손에 담배가 없다면 뭉뚱그려진 '담배에 대한 그리움'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약해지는 금단현상'이 존재하겠지만, 생담배만
을 손에 든 사람은 성에 안차는 그 내음 때문에라도 금단현상이 지
워지지 않는다.
에스키모에게 눈의 상태를 표현하는 용어가 70여 가지이고, 아일랜드 사람에게 초록색을 표현하는 말이 40개가 넘듯이 나 역시 우리
딸의 냄새를 대략 수 백가지 정도로 구분할 수 있다.
땀 냄새 열 서너 가지, 트림 냄새 7~8가지.. 수십 가지의 기저귀 안
냄새.. 아플 때의 내 딸 냄새.. 배고플 때의 내 딸 냄새 등..
문제는 내 예민한 감각을 내 정신이 한정시켜버린다는 것이다. 그저
내게는 '달콤한 냄새' '지금 미치도록 맡고 싶은 냄새'일 따름이다.
그 냄새를 직접 맡으면 모르겠거니와,
'알듯 말듯'한 상태로 버티어야 한다는 것은 정말 큰 괴로움이다.
남들보다 그 냄새를 '근접하게'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은
그 괴로움에 기름을 붓고 부채질까지 함에 다름 아니다.
코가 좋으면 그리움의 농도 또한 깊어지기 마련이기에..
그리운 대상과 떨어져 지내는 것이 쉽지 않다.
20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