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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여성, 지혜롭고 신중한 현실주의자.
여성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을 뒤집고, 실력 하나로 한 나라를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4개 국어를 구사하는 등 폭넓은 지식과 정치, 외교술에 탁월한 감각을 갖고 있었으며,
국가에 대한 헌신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오늘날까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들 중 첫손에 꼽히는 'Good Queen'.
두 번째 여성, 정열적이고 경솔한 낭만주의자.
주어진 의무를 다하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좇는 데 충실했고, 타인의 이목 따위는 신경쓰지 않았다.
세상이 그녀에게서 'Queen'이란 이름을 거두어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사랑 때문에 저지른 범죄로 20여 년을 감금된 신세로 살아가다
결국 단두대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런데, 첫 번째 여성이 두 번째 여성을 질투했다면,
그것도 평생 동안 병적으로 집착하여 질투했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Queen Elizabeth I. (1533-1603)
첫 번째 여성인 잉글랜드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
16세기까지만 해도 작은 섬나라에 불과했던 영국을 유럽 제1의 국가로 도약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나라 안으로는 종교적,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고,
밖으로는 스페인 무적 함대를 격파해 유럽 해상권을 재패하였다.
얌전히 결혼해서 후계자나 낳으라는 의회와 귀족들의 요구에 콧방귀를 뀌며
"나는 잉글랜드와 결혼했다"고 당당하게 고개를 세운 처녀 왕.
당대에 이미 국내외적으로 실력을 인정받고 사랑받는 군주였던 그녀가
단 한 사람, 한편으로는 동경하고 한편으로는 무섭게 질시했던 여성이 있었으니,
바로 사촌동생이었던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였다.
Mary, Queen of Scots. (1542-1587)
유럽 역사상 최초로 단두대에서 처형된 비운의 여왕.
불륜의 사랑에 눈이 멀어 정부가 남편을 살해하도록 도왔으며,
자신의 신하들에게 '나라의 수치'라는 말을 들으며 강제 폐위당했다.
어리석은 대담함으로 불행의 불구덩이를 향해 스스로 뛰어든 낭만주의적 캐럭티로 소개되곤 한다.
엘리자베스 1세의 위대한 업적과 비교하면 하잘 것 없이 느껴지는 인물이지만,
엘리자베스가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들'을 소유하고 있었으니,
바로 정통 왕족으로서의 혈통과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헨리 8세의 두 번째 아내, 앤 볼린(Anne Boleyn)의 딸로 태어났다.
헨리 8세는 여섯 번이나 결혼을 하고 두 아내를 사형시킨 왕으로 유명하다.
그 비운의 왕비 중 한 명이 '천 일의 앤', 앤 볼린이었다.
교황청의 반대 때문에 국교회를 설립하면서까지 첫 왕비와 이혼하고 앤을 맞아들였지만,
고대하던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헨리 8세는 간통과 반역죄를 저질렀다는 누명의 씌워 앤 볼린을 사형시킨다.
그리고 그녀와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 엘리자베스는 공주이면서도 사생아 취급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운명은 그녀를 왕으로 만들 작정이었던지
배 다른 남동생 에드워드, 그리고 첫 왕비의 딸인 메리 1세가 연이어 왕좌에 오르지만
두 사람 모두 젊은 나이에 병사한다.
결국, 헨리 8세가 털끝만큼도 후계자로 여기지 않았던 엘리자베스가 잉글랜드를 다스리게 된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대관식 초상화
반면, 메리 스튜어트는 스코트랜드의 왕 제임스 5세(헨리 8세의 누이 마가렛의 아들)와
프랑스 왕가 출신인 마리 드 귀스(Mary de Guise) 왕비 사이에서 정통성을 인정받으며 태어났다.
제임스 5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생후 일 주일이 되지 않은 외동딸 메리가 왕좌를 물려받고 그녀의 어머니가 나라를 통치하게 된다.
마리 드 귀스는 메리를 자신의 모국 프랑스로 보내 교육받게 했고,
프랑스 황태자와 약혼한 메리는 미래의 프랑스 왕비이자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왕족으로 대접 받지 못하고 '사생아'라는 수근거림을 들으며 자라야 했던,
인내와 고생 끝에 겨우 여왕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엘리자베스의 입장에서 보면
나무랄 데 없는 왕족 혈통을 가졌으며,
태어나면서부터 정통 계승자로 인정받았던 메리는 '인생 참 쉽게 사는 얄미운 부류'였을 것이다.
게다가, 원칙적으로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 서열에서 메리가 엘리자베스보다 유리했다.
카톨릭의 기준으로, 헨리 8세와 앤 볼린의 결혼은 대죄인 중혼이었고,
중혼의 소산인 엘리자베스에게는 왕위 계승권이 없는 셈이었다.
헨리 8세 스스로 앤 볼린과의 결혼을 무효로 돌리겠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다.
때문에 프랑스와 스페인의 왕가는
스코틀랜드의 메리를 적법한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자로 보고 있었다.
영국 내 구교도들 역시
엘리자베스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메리를 여왕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혈통과 정통성' 논란은 오랫동안 엘리자베스 1세를 괴롭혔다.
당시, 왕위에 대한 국제적 승인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업친 데 덮친 격으로 메리의 남편인 프랑스 왕이 낙마 사고로 사망,
미망인이 된 메리는 스코틀랜드로 돌아오게 되는데,
교황청과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비호를 등에 업은 메리(그녀 자신도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가
공공연히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아마 엘리자베스의 마음 속에는 왕위를 지켜야 한다는 현실적인 고민과
'순수혈통'을 자랑하는 메리에 대한 콤플렉스가 함께 존재했을 것이다.
손을 뻗어 덤벼드는 메리 스튜어트(왼쪽)와
그런 그녀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엘리자베스 1세.
두 사람의 관계를 잘 묘사한 그림이지만, 실제로 둘이 대면한 적은 없다고 한다.
혈통과 함께 엘리자베스를 괴롭혔던 또 하나의 문제는 여성으로서의 '외모와 매력'이었다.
메리 스튜어트를 묘사한 당대의 글귀들과 사람들의 증언은
'깎아 놓은 조각상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는 것이다.
칼뱅주의 설교자였던 존 녹스(John Knox)는
메리가 "모든 남자들을 매혹시키는 독특한 매력"을 갖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풍성한 적갈색 머리칼에 180cm에 가까운 늘씬한 키, 굴곡 있는 몸매와 청순한 얼굴.
거기다 프랑스에서 익힌 세련된 매너, 무용과 자수에 능한 여성스러운 성격 등으로
메리는 유럽 왕실 최고의 인기 여성이었다.
첫 남편이었던 프랑수아 2세가 사망하자
전 유럽의 왕자와 귀족들이 앞다투어 그녀에게 청혼을 하고 나섰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메리는 단순히 예쁜 여자에 그치지 않고
남자를 빠져들게 만드는 기묘한 능력을 지녔던 듯하다.
그녀의 일생 동안, 폐위를 당하고 잉글랜드에서 감금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수많은 남성들이 메리를 돕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예가 줄줄이 이어진다.
10대 시절의 메리 스튜어트
20대의 메리 스튜어트
가장 대표적인 메리의 초상화
외모만으로 본다면,
메리가 '수퍼 모델'급인데 비해 엘리자베스는 '이지적인 사서 처녀' 수준에 불과했다.
엘리자베스 자신도 남동생 에드워드 왕자에게 쓴 편지에서
"나는 자랑스럽게 내밀 얼굴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정신만은 내놓기에 부끄럽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름다운 메리에 대한 엘리자베스의 질투는 여왕으로서의 체통마저 내팽개치게 했다.
스코틀랜드의 사신인 제임스 멜빌 경이 잉글랜드를 방문하였을 때
엘리자베스는 다른 외교 문제들을 제쳐두고 "나와 메리 중 누가 더 아름다운가?"라는 질문으로
멜빌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멜빌 경이 "엘리자베스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아름답고,
메리는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얼버무리려 하자,
엘리자베스는 몹시 화를 내며 한쪽을 선택하라고 윽박질렀다.
고민 끝에 멜빌 경이 "메리가 더 아름답다"고 진실을 말하자
엘리자베스는 시무룩해 하며 "그럼 둘 중 누가 더 키가 크냐?"고 물었다.
메리가 더 크다고 답하자, 그녀는 "그럼 메리는 지나치게 큰 거군요!"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어느 외국 외교관이 엘리자베스가 듣는 앞에서 "메리는 정말 사랑스러운 여인"이라는 말을 했다가
"내가 그녀보다 낫다"는 여왕의 무뚝뚝한 지적을 듣기도 했다.
재미있게도, 이토록 메리의 외모에 집착을 보였던 엘리자베스는
단 한 번도 메리와 얼굴을 맞댄 적이 없다고 한다.
어쩌면 직접 만나지 못했기에 메리에 대한 '환상'을 가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 1세는
드레스와 가발, 장신구, 화장으로 외모를 가꾸는 데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과감한 디자인의 드레스로 신하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고,
숱이 적은 머리를 커버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가발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1세
역사적으로 보면, 두 사람은 라이벌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만큼 성공과 실패의 극단을 보여준다.
엘리자베스는 나라 안팎으로 승승장구를 거듭하며 군주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간 반면,
메리에게는 몰락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재혼한 단리(Darnley) 경과 사이가 나빠지자
(수려한 외모로 메리를 유혹한 단리는 그녀를 박대하고 다른 여자들을 가까이 했다)
메리는 자신을 지지하는 보스웰(Bothwell) 백작에게 의지하게 된다.
1567년 단리의 살인 시간에 보스웰이 주도적 역할을 했고, 여기에 메리도 개입됐다는 소문이 돈다.
메리가 보스웰에게 보냈다는, 남편의 살인을 암시하는 편지가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진짜 메리가 쓴 것은지는 결국 밝혀지지 않았다.
남편이 잔인하게 살해당하고 3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메리가 보스웰과 결혼을 감행하자
분노한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보스웰을 살인죄로 강제 송치해 버린다.
국민들에게 창녀, 살인마라는 비난을 들으며 신변의 위협을 느낀 메리는
아들 제임스 6세에게 양위하고 잉글랜드로 도망가 엘리자베스에게 보호를 요청한다.
엘리자베스는 메리를 스코틀랜드에 넘겨줄 경우 그녀가 즉각 사형에 처해질 것이고
여왕을 단두대에 보내는 사건이 전 유럽의 왕권을 뒤흔들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린다.
메리를 '손님'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엘리자베스는
입을 옷도 없이 탈출해온 메리에게 하녀들이 입을 법한 싸구려 옷들을 선물로 보냈다고 한다.
메리가 재기불능의 지경에 빠져 있어도 엘리자베스의 질투는 그칠 줄 몰랐던 것이다.
메리의 감시역을 맡은 귀족들이 번번이 그녀의 매력에 넘어가자
엘리자베스는 프랑스 대사에게 "스코틀랜드 여왕의 용모와 말솜씨에는 뭔가 신성한 것이 있나 보죠?
그녀의 적들이 하나같이 그녀에게 도움을 주는 걸 보면 말이에요"라고 쏘아붙였다고 한다.
사형선고를 받는 메리 스튜어트
어리석게도 메리는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처지인데도
엘리자베스를 몰아내고 자신이 잉글랜드의 여왕 자리에 앉으려는 음모를 꾸민다.
하지만 번번이 탄로가 나서 그녀를 처형하라는 여론만 더 높아지게 만들었다.
프랑스의 샤를 9세는 과거 형수였던 메리의 행적에 혀를 차며
"저 바보 같은 여자는 자기 머리가 떨어져 나갈 때까지 실수를 멈추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잉글랜드 내에서는 메리를 처형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됐다.
어쨌거나, 왕위를 빼앗으려 시도한 것은 반역죄에 해당되므로.
엘리자베스는 오래도록 미워하고 질시해 온 사촌 동생을 자신의 땅에서 죽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권위를 침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함께 메리에 대한 동정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1587년 2월 1일 엘리자베스는 상화원의 압력에 굴복해 메리의 사형명령서에 서명을 한다.
그리고 2월 8일 아침, 메리는 포더링게이의 그레이트 홀에서 참수된다.
그녀는 용감하게 죽음을 맞이했고,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이 마침내 막을 내리는 것에 만족하는 표정이었다고 한다.
영화 '골든 에이지(Elizabeth: The Golden Age, 2007)의 한 장면.
엘리자베스 1세로 분한 케이트 블란첵의 의상과 화장이 는에 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