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낭소리 (Old Partner, 2008)
감독 : 이충렬
시링힌다는 것, 함께 간다는 것에 대한 오래된 대답
이 영화를 본 게 연휴 전이니 꽤 시간이 흘렀지만 어깨부상을 핑계로 컴퓨터를 멀리한 채 명절연휴를 보내느라 리뷰를 쓰지 못했다. 아니다. 사실, 쓸 맘이 있었으면 아크로바틱한 포즈를 취하면서라도 자판을 두드렸을 테다. 이 영화에 대해 뭐라뭐라 떠들 말이 없었기 때문에 쓰지 않았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떠들 말이 없는 영화라... 내게 좋은 영화의 기준이 있다면 "그 만듦새가 어떻든 내용의 정치적 올바름이야 어떻든 간에 영화를 본 뒤 이래저래 할 말이 생기는 영화"라고 생각해 왔다. 그렇다면 는 내 기준에서 좋은 영화가 아니란 말인가? 아니다. 결코. 점점 러닝타임이 길어지고 있는 요즘 영화치고는 다소 짧지만 다큐멘터리영화치고는 꽤 긴,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웃다 울다를 거듭하며 완전 몰입했다.
소의 울음소리만큼이나 알아들을 수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경상도 사투리 대사를 자막으로 확인하며 키득거렸다. 소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애잔한 눈빛 뒤에 경쾌하게 따라붙는 할머니의 귀여운 투정에 박장대소했다. 윤기 없는 소의 볼기짝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쇠똥을 보며 나이듦의 쓸쓸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늙은 소의 느릿한 걸음걸음마다 곧 다가올 죽음이 느껴져 가슴이 쓰렸다. 늙은 티 팍팍 내며 지저분하게 눈꼽 낀 소의 눈망울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질 때 심장이 뚝 떨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현대사회에서 충분히 퇴출당하고도 남을 구닥다리 늙은이들(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식육용이 아닌 일소)과 삐까뻔적 편리해진 현대문명이 부딪힐 때마다, 문명의 발달이 인간에게 가져다준 행복이란 무엇일까, 인류의 진보가 과연 가치있는 것일까, 회의에 휩싸였다. 비틀거리는 늙은 소를 굳이 잡아끌어 비틀거리는 자신의 몸을 리어커에 태운 채 부득부득 일을 나가는 할아버지와 그런 할아버지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묵묵히 할아버지 하자는 대로 따르는 늙은 일소를 보며, 동물학대에 대해 소리 높여 비판하는 동물애호가들이 저들을 보면 뭐라고 할까 궁금했다. 40년의 소로서는 긴 생을 마감한 소와, 그 소의 죽음에 망연자실 넋을 놓은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가 죽으면 자기도 따라갈 거라는 할머니를 보며, 동물이든 사람이든,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생의 동반자로서 함께 걸어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사랑에 대해 혹은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해 이러저러한 이론과 평등따위의 가치를 들먹이며 따박따박 분석하고 해석했던 나의 안간힘이 늙은소와 할아버지, 그리고 할머니 앞에서 무력해짐을 느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난 후 바로 글을 쓸 수 없었다. 글로 써버리면 40년 소의 삶이, 그 소와 함께 절뚝이는 다리를 질질 끌고 평생 일만 해온 할아버지의 삶이, 그런 할아버지와 소를 원망하며 허리가 굽도록 일하며 살아온 할머니의 삶이, 너무나 단순하고 너무나 도식적인 나의 언어, 현대의 언어, 문명의 언어에 갇혀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도 그렇다.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그 상대가 동물이든 인간이든 누군가와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그러한 관계의 내용물인 사랑에 대해, 내가 가진 언어로는 어떠한 표현도 할 수 없다. 삶과 죽음, 관계에 대한 아주 오래된 질문에 아주 구닥다리에다 늙어빠진 대답을 품고 있는 이 영화에 대해 나는 할 말이 없다.
다만, 고맙다. 나의 오래된 기억을 들춰내 내가 덜 사회화되고 덜 문명화됐던 그때의 감정을 끄집어내준 이 영화가. 어떠한 가치판단이 아니라 본원적 욕망과 감정에 충실했던 어린 나를, 나이든 만큼 딱딱해지고 나이든 만큼 도식적이 되고 나이든 만큼 메말라버린 나이든 내 앞에 불러세워준 이 영화가.
◆ 어린 시절
이 영화는 30년도 더 지난 유년의 기억과 만나게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보다 딱 10년 젊으신 나의 부모는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그렇게 평생 일만 하신 농사꾼이다. 그리고 영화 속 늙은소처럼 늙지야 않았지만 일소가 있었고, 투덜거리며 그 소가 먹을 꼴을 베러 가는 오빠의 자전거 뒷자리에 탔던 내가 있었고, 뒷동산에 소를 끌고 가 꼴을 뜯어먹으라 묶어놓고 그 옆에서 나무를 타고 놀던 오빠 언니와 내가 있었다. 볏짚과 꽁깍지를 작두로 썰어 끓이던 여물 냄새에 눈 비비고 일어나던 아침이 있었다. 엄마아빠가 소를 끌고 일을 나갈 때면 그저 구루마(소가 끄는 마차를 그렇게 불렀다.) 타는 게 좋아 뒤따라 나서던 내가 있었고 구르마 위에 누워 하늘을 보며 구름을 세던 내가 있었다. 송아지를 낳을 때면 늦은밤이든 꼭두새벽이든 온 식구가 맘을 졸이며 출산의 순간을 지키던 긴장이 있었고, 수컷이라 일찌감치 송아지를 팔라치면 아등바등 트럭에 오르지 않으려 용쓰는 송아지와 그런 새끼를 보며 구슬피 울던 어미소, 애끊는 이별장면에 울음을 터뜨리던 어린 내가 있었다.
물론, 나의 부모가 농사에서 낙농으로 주종목을 바꾸시면서 누런 일소는 얼룩배기 젖소들로, 롤러코스터보다 신났던 구르마는 경운기로, 영화 속 외양간과 꼭 닮았던 허름한 외양간은 착유기가 번듯이 자리한 축사로 바뀌었다. 그리고 일소의 몫이었던 써레질은 경운기의 몫이 되었고 모내기는 이앙기에게 벼베기는 윗집 아저씨의 트렉터에게 넘어갔다. 그렇게 우리집은 문명화(?)되었고, 더 어릴 적 누런 일소에 대한 기억은 거의 사라졌다.
10여년 전 영세낙농업이 쫄딱 망할 즈음 우리집은 낙농업을 접었다. 지금은 그저 두 양반 입에 풀칠하고 남은 곡식 자식들에게 조금씩 나눠줄 수 있는 만큼, 딱 그만큼만 농사를 지으신다. 사정이 이러하니, 내겐 젖소 키우던 시절에 대한 기억마저도 가물가물하다. 하물며 누런 일소에 대한 기억은 있었는지조차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런데 이 영화가 내 기억의 구석탱이에 쳐박혀 있던 그 기억을 끄집어내주었다. 맞어, 맞어. 내가 이 영화에 깊이 공감할 수 있고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기억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와 어울리지 않게도, 할아버지 할머니만큼이야 아니지만 평생 일소처럼 일만 하셨던 나의 부모가 문득 그리워진 것도 다 그 때문일 것이다.
◆ 빛과 소리
이 영화를 보며 놀란 것 중 하나는, 다큐멘터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산산히 깨뜨리는 아름다운 영상과 소리다. 보통 다큐, 하면 떠올리게 되는 우중충한 화면, 카메라의 떨림, 각종 잡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촬영자의 대사와 개입... 에는 이 모든 것이 없다. 장면 하나하나가 예술사진이다. 스틸컷만 모아놓아도 웬만한 사진전 뺨치는 전시회를 충분히 열 수 있을 정도다. 소리는 또 어떤가. 정신없는 우리가 지나칠 수 있는 모든 자연의 소리가 이 영화에서 생생히 살아난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 감탄이 절로 나왔다. 정말 오랜 시간을 들여 카메라와 등장인물(동물 포함)들이 촬영스텝과 자연이 하나로 뭉뚱그려지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화면이고 소리다.
화면과 소리만 두고도 이 영화를 만든 이들에게 머리숙여 감사드린다. 꾸벅.
사진전, 워낭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