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터플라이 (The Butterfly, Le Papillon, 2002)
감독 : 필립 뮬
예쁘구나, 착하구나, 아름답구나
보러 CGV인천 갔다가 무비꼴라쥬(CGV인천의 예술영화상영관)에서 워낭소리와 교차상영하는 의 포스터를 보았다. 온통 초록인 숲길을 걸어가는 파파할배와 꼬마여자아이. 다소 뻔할 거라 예상되는 포스터여서 썩 끌리지는 않았지만 달빛넝쿨의 추천도 있고 해서 한번 봐줄까 말까 살짝 갈등. 설 연휴에 킬링타임용으로 봐줄까 목록에만 올려두었다.
꼭 봐야지 결심했던 것은 아닌지라 외부와의 철저한 단절과 고립을 테마로 삼은 이번 연휴는 그냥 지나갔다. 연휴 사흘간 단절과 고립을 고수했더니 연휴 끝나고 만나야 할 사람이 많아서 바빠졌다. 이런...;;; 이럴 줄 알았으면 시간 탱탱 남아도는 연휴에 방콕 같은 거 하지 말걸... 흑... 때늦은 후회다. 그래도 오랜만에 혼자여서 좋았잖아. 그럼 됐지 뭐...
암튼 연말연시 국회에서 강제구금된 상태로 의도하지 않은(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농성을 하느라 얼굴도 못 보고 지나친 절친 영과 오랜만에 만났다. 나와 똑같은 재미주의자인데 팔자에도 없는 일벌레 보좌관으로 사느라 고생하고 있는 영을 위로하기 위해 이 영화를 선물했다. 영과 나는 여러 모로 취향이 비슷한 편인데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둘 다 흡족해했으니 그걸로 됐다. 뻔하디 뻔한 스토리면 어때? 재미있으면 그만이지. ㅋ;;;
고집불통 독거노인 쥴리앙(미셸 세로). 그는 나비수집가다. 어느날 그가 사는 아파트 윗층에 젊디젊은 처자(나드 디유)와 조카뻘밖에 안 돼 보이는 여자꼬맹이 엘자(클레어 부아닉)가 이사온다. 이모와 조카쯤 되어보이는 비주얼이나 알고보니 엄마와 딸. 청소년기 사고쳐서 낳은 딸임에 틀림없다. 영화 말미에 나온다. 그 처자(이름은 밝힐 수 없음. 다 이유가 있음. ^^)가 열여섯에 낳은 아이라고. 과속스캔들!!
암튼 노친네 쥴리앙과 엘자의 첫만남은 그리 해피하지 못했다. 농구를 좋아하는 엘자는 집에서도 농구공 드리블이 취미인데 쿵쿵 바닥을 때리는 소리는 쥴리앙의 단잠을 깨우는 불청객일 뿐이다. 엘자의 엄마는 싱글맘으로 자식 키우며 살아가느라 밤낮없이 일하느라 거기다 엄마라지만 겨우 스물다섯 젊디젊은 청춘이니 연애도 해야 하니 엘자 돌볼 시간이 없다.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이유로 엘자를 돌본다는 것은 고집불통 독거노인 쥴리앙에게는 정말이지 피하고 싶은 인연일 뿐이다.
그런 쥴리앙이 나비 이사벨을 잡기 위해 8일간의 여행을 떠난다. 헌데 겁없고 당돌한 꼬맹이가 쥴리앙의 차에 몰래 숨어 타서는 저도 같이 델꼬 가달란다. 심지어 엄마가 자기를 두고 가출했다고 거짓부렁까지 동원해 엘자에게는 절대 안 어울리는 청승가련 연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해서 이사벨을 찾기 위한 여행에 고집불통 독거노인 쥴리앙과 대책없고 버릇없고 무식한 꼬맹이 엘자가 파트너가 된다.
는 어떻게 해서든 엘자를 피하고픈 외곬 노친네 쥴리앙과 겁없고 아는 거 없고 버릇없는 3無 꼬맹이 엘자의 로드무비라고 정리할 수 있다. 로드무비답게 둘이서 나름 버라이어티한 여행을 하면서 유치찬란 찌그럭버그럭 티격태격 싸우며 70년 이상 됨직한 세대차이를 넘어서는 우정을 쌓아가는 전형적인 스토리.
그러나 이 뻔한 스토리가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전형성을 뛰어넘는 스펙터클한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긴장감을 느끼게 할 만한 갈등이 있는 것도 아니다. 등장인물들은 죄다 착하거나 그냥 그렇다. 그런데 왜 지루하지 않은 거야? 이게 뭥미?
영화를 보면서 나와 영이 내내 했던 말이 있다. "캬~ 도대체 여기 어디야? 진짜 멋지다! 가고 싶다~!!"
쥴리앙과 엘자가 이사벨이라는 희귀종 나비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는 숲의 경치가 장난 아니게 멋있는 거지. 고흐의 그림에서 봤던 남프랑스의 풍경이랄까? 영화를 본 뒤 검색해 보니 정말 남프랑스란다. 초록의 풍경이 진짜 끝내준다. 그것만으로도 흡족하다.
거기다 극과 극의 파트너 쥴리앙과 엘자를 연기한 배우들이 정말이지 깜찍하다. 이 영화가 2002년 만들어졌다고 하고 쥴리앙을 연기한 미셸 세로는 2년 전 타계했다고 하니 참으로 연세 많으신 분인 건 알겠는데... 그래도 쥴리앙은 정말 귀엽다. (망자께는 죄송...;;;) 미셸 세로는 엘자에게 맨날 윽박지르는 것 같지만 결국은 엘자 뜻대로 다 하고 마는 맘 약한 노친네 쥴리앙 역을 멋지게 소화한다. 늙으면 어린애가 된다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란 걸 보여주듯 쥴리앙이 내뱉는 말과 행동은 노친네스럽지만 아이스럽기도 해서 엘자랑 눈높이가 딱 맞는다. 물론 희끗희끗한 머리가 그냥 생긴 게 아니란 것을 보여주듯 쥴리앙의 유치함에는 인생의 지혜도 듬뿍 담겨 있다. 이사벨을 잡기 위해 쳐 놓은 조명막에서 펼치는 쥴리앙의 그림자극은 인간과 신에 대한 유쾌한 잠언이다. 결국 엘자와 엄마가 서로를 마음으로 만나게 하는 매파역할까지 훌륭히 해내니 나이는 그냥 먹는 게 아닌 거지.
귀여운 노친네 쥴리앙의 파트너 엘자는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귀엽기로 작정하고 캐스팅한 것으로 보이는 엘자 역의 클레어 부아닉은 아역배우의 깜찍함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엘자라는 배역이 워낙 그렇다. 어린아이이긴 하나 워낙 돌봄 없이 자라다 보니 닳고 닳은 아이. 막말도 막하고 알 것 다 아는 아이. 그러나 정작 그 또래 아이들이 알 만한 상식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아이. 아는 것이 없으니 겁도 없고 버릇도 없다. 괜히 내가 3無 꼬맹이라고 부른 게 아니다. ㅋ;;
귀여운 노친네 쥴리앙과 3無 꼬맹이 엘자가 유치한 말싸움이나 하고 앉아 있는데 거기에 나름 삶의 지혜가 있다.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쥴리앙과 엘자가 부르는 노래가 흐른다. 엘자가 질문하면 쥴리앙이 대답하다가 간주 뒤에는 쥴리앙이 질문하면 엘자가 대답하는 가사의 노래다. 말도 안 되는 대답인데 고개가 끄덕여진다. 천사와 악마가 있는 건 인간이 호기심이 많기 때문이지. 그렇지... 하면서 말이다. 영화 내내 이 노래 가사처럼 말도 안 되는 쥴리앙과 엘자의 말싸움이 이어지는데 그게 참 좋다. 그래... 삶이란 그런 거지. 그런 깨달음같은 게 생긴다.
결국 쥴리앙은 목표한 대로 나비 이사벨을 찾았다. 쥴리앙이 왜 그렇게 이사벨을 찾으려 했는지는 영화를 보면 안다. 그리고 엘자 역시 이사벨을 찾았다. 이게 뭔 소린지도 영화를 보면 안다. ㅋ;;
뻔하디 뻔한 답을 찾기 위한 뻔하디 뻔한 로드무비 . 어쩌면... 그 뻔하디 뻔한 답이 인생인 거다. 삶이란 원래 뻔하디 뻔한 답을 찾기 위해 뻔하디 뻔한 길을 가는 뻔하디 뻔한 로드무비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