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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창력 논란으로 본 우리나라 대중문화

안지훈 |2009.02.10 05:01
조회 133 |추천 0


 가창력 이란 대중 가수를 평가하는 절대적인 잣대이지만 동시에 매우 불안정하고 또한 말도 안 되는 잣대이다. 우리가 성악과 클래식과는 달리 가요계를 대중 문화라 부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음악의 좋고 나쁨, 즉 미(美)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의 선과 악의 불명확성 이다. 클래식 연주를 듣고 그 노래를 미학적인 관점에서 분해해 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허나 그러한 기준은 분명히 존재하며, 그러기에 클래식에 대한 수많은 엘리트 스쿨이 존재한다. 소수의 잘 훈련된 선수와 소수의 평가단을 갖춘 그 모습은 마치 올림픽의 한 종목과도 같다.

 

 인류가 계급 사회로 정착 된 이래로 대부분의 시간 동안, 문화의 주류는 특정 상위 계급만이 공유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진 미학이었다. 허나 역사적으로 매우 짧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보다 더욱 짧은) 기간 동안에 대중 문화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꽃을 피웠다. 그것이 얼마나 대중에서 유래했는지를 따지는 것은 복잡한 문제이겠다. 그러나 이제까지 없었던 혼돈과 불명확성의 문화, 즉 혐오와 열광이 공존하는, 대중들의 심리만큼이나 복잡한 문화가 탄생한 것만은 분명하다. 혼돈에 빠져 있는 이러한 대중들을 위해 친절한 비평가와 평론가들이 그럴 듯한 권위를 업고 우리를 혼돈 에서 구해 주려 노력 하지만, 이제는 누구도 그러한 말을 절대적으로 신봉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그랬다. 민주주의는 혼돈과 얼치기들을 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맞는 말이다. 그러한 민주주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대중 문화이다.

 

 우리나라 대중 문화,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가요계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문화계가 그렇듯 그것은 사실, 문화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한 것이다. 대중 문화가 탄생하게 된 계기 자체가 대중의 자본력에 있기 때문에 다만 우리는 우리 입맛에 맞는 음악을 원하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중문화가 탄생한 순간부터 우리들의 입맛을 고착화시키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왔다는 사실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습게도, 자본 주의시장의 아킬레스건 중 하나인 먹거리 문제는 우리나라 대중 문화와 공통점이 많다. 우리는 우리 자신 보다 우리 입맛을 잘 아는 누군가에 의해 음식을 제공 받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음식의 재료와 맛은 어디에서 유래했단 말인가. 심지어 그것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조차 자신이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대중들이 가수들의 가창력을 철저히 따지는 시점에서 우리나라 가요계가 이미 대중  문화로서의 건강성을 상실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대중문화는 과거에 특정 층에게 국한되었던 계급 문화와 양상은 전혀 다르지만, 대중 문화라는 타이틀을 붙이기 어렵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이다. 그것은 대중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제는 대중들이 본능적으로 음악을 시장과 연결시키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자판기에 진열되어있는 음료수를 뽑아 마시며 맛이 있다 없다 를 판단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신제품이 출시 되었을 때 재빠르게 맛이 좋다 나쁘다를 판단 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음료수가 문화가 아닌 기호식품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또한 우리가 그 기호식품에 잘 훈련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만약 한 번도 캔 음료수를 마셔 본적이 없는 사람이 다양한 종류의 탄산 음료수를 뽑아 마시게 된다면 아마 이런 말을 할 것이다. ‘모르겠어. 다 비슷비슷 한걸?’

 

 얼마 전에 'Ori' 라는 신인가수의 무대가 화제에 올랐다. 외모는 차치하고서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가수의 가창력을 질타하며, 준비 안 된 신인 또는 노래 못 부르는 가수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평가를 내리는 자체에 흡족해하는 것이 과연 대중문화의 힘일까. 안타깝게도 그 가수는 먹기에 너무나 거북한 음료수에 불과하다. 아마 그 어린 중학생 아이도 가수가 되려는 꿈은 키워왔지만 가수로서 무대에 설 때까지 자신이 무슨 재료로 만들어진 상품이었는지는 미처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시장에는 정말 맛있고 세련된 음료수가 많다. 그리고 누군가는 우리가 질릴 때쯤 다른 맛의 음료수를 출시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듯, 우리나라에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있지만 가수는 없다. 있다고 해도 극소수이다. 우리 나라 가요계를 90퍼센트 장악하고 있는 주체는 세 가지다. 노래를 만드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노래를 파는 사람. 그 세 가지가 삼위일체 되었을 때 훌륭하다고 평가 받으며 흔히 말하듯 시장에서 성공 한다. 가창력의 기준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자신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노래를 만드는 사람은 자신이 부를 노래를 만들지 않는다. 노래를 파는 사람은 자신이 팔고 싶은 노래를 팔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자본의 메커니즘 속에서 착실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 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지나치게 많은 노래를 만들며 지나치게 많은 노래를 부른다. 시장이 협소하고 한정되어 있기에 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더더욱 많은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다. 여기서 가수들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수많은 노래를 ‘잘’ 부를 필요성이 생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노력에 대한 보답을 바라기에 대중이란 존재는 너무나 불안정하다. 따라서 그들의 입장에서는 확실한 기준을 만들 필요가 있다. 또한 그러한 기준을 대중에게 공유시킬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일명 시장의 논리라 불리지만 실상은 너무나 얄팍하다. 

 

 외국 유명 가수들 중 상당수는 자신의 노래인데도 불구하고 가끔씩 민망할 정도로 노래를 못 부른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대중가요 에서 가창력이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자신이 직접 자신이 부를 노래를 만들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노래의 완성도를 떠나서, 또한 그 사람의 가창력을 떠나서, 자신이 만든 노래는 자신의 목소리에 어울린다. 그것은 노래를 만들면서 수없이 노래를 되뇌이기 때문이고, 그러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노래 안에 자신의 메시지가 담기게 때문이다. 이러한 노래가 대중들에게 널리 불리고 팔리는 것은 시장의 몫이다. 하지만 시장에 이미 시장을 위한 기준이 존재한다면, 아니 그러기도 전에 잘 훈련된 대중들이 직접 시장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내세우는 기준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대중 문화가 아닌 한낱 소비 문화이며,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자본의 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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