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들은 히틀러가 광적인 정신병으로 유럽 전 지역을 정복하려 했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유태인들은 그 히틀러에게 불쌍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알고 있다.
자, 독일인들은 바보인가?
당시 유럽의 하층민들은 모두 유태인이라면 이를 갈았다.
그들을 착취하던 사회적 지위를 넘어, 국가를 뒤흔들 수 있는 재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은 그러한 유태인 근본 사회에 제동을 걸었고,
영국은 그러한 독일의 행위를 눈뜨고 볼 수 없다며 독일과 전쟁을 치루었다.
세계 2차대전은 유태인 근본사회에 저항했던 독일과 그것을 고수하려던 서방의 전쟁이었다.
유태인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그 두가지를 모두 차지하고, 엄청난 민족들을 학살해 왔다.
그 진실을 공개한다.
원문의 출처는 다음과 같으며, 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http://k.daum.net/qna/openknowledge/view.html?qid=3QzvB&l_cid=DDF003&l_st=0
내가 추린 글만을 보는 것보다는 원문 내용의 전체를 읽기 권한다.
(1편 - 왜 유럽인들은 유태인을 증오했는가?)

Pierre Proudhon (1809-1865)
"유태인은 본질적으로 反생산자이다. 그는 농부도 산업 노동자도 아니며 진정한 의미의 상인도 아니다. 그는 언제나 기만적이며 기생적인 중개인으로서 날조와 위조, 부당한 갈취로 먹고 산다. 가격의 변동과 수송에 따르는 위험, 농작물의 작황에 대한 근심, 공급과 수요의 맹점은 그와는 상관없는 일들이다. 그의 경제 정책이란 항상 마이너스적인 것, 전적으로 고리대금업적인 것들이다. 이 것은 바로 셈족 유태인을 통해 부활한 사탄 아리만의 원칙이다." - Cesarisme et christianisme

Jose Eca de Queiros (1845-1900)
“독일의 큰 은행이나 주요 언론은 거의 유태인이 소유하고 있다. 그러기에 유태인을 공격하기란 너무 힘든 일이다. 유태인은 사회인문계의 요직에서 진정한 독일인들을 몰아냈을 뿐만 아니라 그들 특유의 사치방탕과 돈으로 독일국민을 인질로 잡고 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큰 모욕은 유태인이 그들 소유의 언론을 통해 독일인들에게 무슨 일을 해야하며 어떤 생각을 어떻게 하고 어떻게 나라가 다스려질지를, 또는 누구와 전쟁을 벌여야 할 지를 감히 가르치려 든다는 점이다. 이 유태인 부자들의 오만과 겉치례는 조용하고 검소한 취향을 가진 독일인들의 입맛을 쓰게 한다. 그들은 언제나 큰 목소리로 떠드는데 흥에겨워 재잘거리는 유태인 만큼 견디기 힘든 것도 없다. 그들은 온갖 보석으로 몸을 치장하고 그들의 마차는 한결같이 금으로 장식이 되어있다... 독일인들과는 분리되어 존재하는 이 유태인 세계는 단단히 결속되어 있으며 외부인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키는대로 독일사회에 끼어들고 점령하여 광채를 내지만 그 어떤 독일인도 유태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사회 안에서만 혼인하고 자신들의 이익이 관련된 일에는 거액의 기부금을 희사하지만 배고픈 독일인들에게는 빵 한조각 던져주지 않는다. 이 유태인들이 더 큰 재산을 모으고 더욱 밝은 빛을 발하는 꼴을 선량한 독일인들은 차마 눈뜨고 지켜볼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이들은 짐을 꾸려 가족을 데리고 빵을 찾아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것이다.” - Cartas de Inglaterra

Count Helmuth Graf von Moltke (1800-1891)
"유태인은 국가 안에 또 다른 국가를 이루며 자신들만의 율법은 엄수하면서도 그들을 받아준 나라의 법은 지키지 않는다. 또한 유태인은 기독교인과 한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여긴다.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시 유태인 밀정들은 양쪽에서 돈을 받았고 양쪽 다 배신했다."
독일인들은 유태인이 독일에서 나가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서방매체들은 도대체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이들은 그저 정신병적인 히틀러가 자신의 정권욕을 위해 반유태주의로 독일국민을 선동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당시 독일을 비롯한 서구의 지각있는 사람들은 소위 '소비에트 민주주의'라는 연막 뒤에서 유태인들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독일인들은 독일의 좌경 공산화를 획책하는 유태인들에게 그런 기회를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1차대전 말기, 정치, 경제, 언론에 포진하고 있었던 유태인들과 역시 이들이 주도했던 좌익의 책동(그 후로 '등뒤에서 비수꽃기'로 알려짐)으로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선포된 1918년부터 국가사회주의 노동당(NSDAP)이 집권했던 1933년까지 사실상 독일은 좌익과 우익의 내전 상태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요도시의 거리와 집회장에서는 좌익행동대와 국가사회당 돌격대 사이의 유혈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비록 1919년 1월 로자 룩셈부르크와 아이스너가 주동한 독일판 볼셰비키 혁명은 실패로 끝났지만 독일이 내부로부터 적화될 위험은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까지 계속 상존했다. 이에 더불어, 전체인구의 1퍼센트에도 못미쳤던 유태인은 1차대전 직후 독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이미 괄목할만 했던 전쟁 전의 상황을 더 한층 뛰어넘는 활약상을 보이며 사실상 독일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극했다. 유태인들은 이러한 위치를 이용해 독일인들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생활양식을 '수구'적인 것으로 배척하는 한편 좌파적인 세계관과 문화예술의 모더니즘을 확산시켰다.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유태인 맹독'으로 낙인찍었던 배금주의, 맑스주의, 맑스적 사민주의, 성해방주의, 동성애, 포르노그라피, 정신분석학, 프랑크푸르트 학파, 소비향락주의, 마약상용, 조직범죄, 현대미술, 현대음악, 재즈, 오컬트, 허무주의, 캬바레가 번성했던 바이마르 공화국은 오늘날 서구 유태인들이나 이들에 부화뇌동하는 좌파식자들에겐 '해방'과 '자유'를 상징하는 매우 '진보'적이고 아주 '쿨'한 시대였지만 당시의 보통 독일인들에겐 빈곤과 인간소외, 사회분열, 그리고 부패와 타락의 온상이었다.
(2편 - 유태인의 홀로코스트는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내가 알기로 이 세상에서 유대인만큼 그들이 겪었다는 수모와 고난과 순교에 대해 우는 소리를 하는 족속도 없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들이야말로 유럽의 정치와 경제, 주식시장, 그리고 국가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실질적 군주들이란 사실을 알 수 없을 정도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1919년에 유태인 희생자가 600만명?
1차대전 직후 미국과 유럽에서는 그 진위를 떠나 이 전쟁에 대한 유태인 국제은행가들의 배후 음모설이 무성했다. 서구의 유태계 언론은 이러한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런 맥락에서 1919년 미국의 유태계 유력지 American Hebrew 에 실렸던 한 기사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눈길을 끈다:
“유태인 남자와 여자 600만 명이 생필품의 부족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80만 명의 어린 아이들이 주린 배를 안고 울부짖고 있다. 이러한 비참한 운명은 이들이 신의 계명이나 인간의 법을 어겨서가 아니라 전쟁의 참상과 유태인의 피를 원하는 가혹한 인종차별주의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이와 같은 홀로코스트는...” (The Crucifixion of Jews Must Stop!, October 11, 1919)
유태인 희생자 600만 명이라는 수치는 2차대전과 관련하여 또 다시 등장하게 된다. 뉴욕의 유태교 랍비 이스라엘 골드슈타인은 1942년 12월13일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당시까지 독일 점령지의 유태인 600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했으며, 1943년 3월2일 뉴욕 메디슨 스퀘어가든에서 열린 유태인들의 독일규탄집회에 대한 1943년 3월 2일자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랍비 헤르츠(Rabbi Hertz)는 히틀러 정권에 희생된 유태인의 수가 600만 명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2세기 로마 치하의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났던 바코크바 항쟁에 관해 탈무드(Gittin. 57b-58a)는 로마군이 베타르에서 40억명의 유태인을 학살했으며 1천6백만 명의 유태인 어린이들을 두루마리에 감아 불태워 죽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 40억 명의 유태인은 고사하고 1천6백만 명의 유태인 유아들이 지구상에 존재했는지 의문이다.
1991년 10월 20일자 벨기에 일간지 Le Soir 에 따르면, “국제 아우슈비츠 보존위원회는 1990년 11월 400만 명의 희생자를 명시했던 아우슈비츠의 추모석판을 “150만 이상의 희생자”로 표기되어 있는 새 석판과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 1989년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역사가 예후다 바우어(Yehuda Bauer) 교수는 이제까지 아무 이의 없이 수용되어 왔던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희생자 400만 명設이 의도적인 허구임을 인정할 때가 왔다고 밝혔다. 1990년 7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기념관은 이스라엘의 야드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과 공동으로 유태인과 비유태인을 도합해 약 100만 명이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두 기관은 이들 가운데 몇 명이 의도적으로 처형되었으며, 몇 명이 다른 원인으로 사망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Y. Bauer, Fighting the Distortions, Jerusalem Post - Israel, September 22, 1989)
a. 사망원인
- 전후 연합군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강제수용소들의 운영과 관련된 수만 건의 독일 문서들을 획득했으나 이 가운데 독일 수뇌부가 독가스로 유태인을 대량학살하려 했음을 입증하는 문서는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유태계 역사가들은 독일이 연합군이 진주하기 전 관련문서들을 소각했거나, 혹은 독일이 모종의 암호 문서를 통해 대량학살을 조직했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연합군이 확보한 독일 문서들 가운데 유태인에 대한 인종말살 계획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문건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역사가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사실 유태인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압수된 독일 측 문서들은 독일과 폴란드에 설치되었던 강제수용소들이 사람을 죽이기 위한 시설이 아니라 유태인과 전쟁포로들을 동원한 강제노동시설이었음을 보여준다.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의 Arthur Butz 교수에 의하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는 다른 수용수로의 배치를 기다리는 수감자들을 수용했던 일종의 강제노동인력 집결지였다. 아우슈비츠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온 이유는 노역이 불가능한 노약자나 병자가 주로 이곳에 수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탈출시도를 비롯한 수용소규칙 위반자들에 대한 처형사례를 제외하고 사망자 대다수의 사망원인은 비위생적 환경으로 인한 전염병(특히 발진티푸스)의 창궐과 영양실조 및 기아였다. (Arthur Butz, The Hoax of the Twentieth Century, 1976)

- 유태계인 프린스턴대의 Arno Mayer 교수는 1942년 ‘반제회의’에서 도출되었다는 소위 ‘최종해법(Final Solution)'에 대한 그의 저서에서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사망자들 가운데 수용소 당국에 의해 처형된 숫자보다 각종 질병이나 기아에 의한 사망자의 숫자가 훨씬 더 많다고 밝히고 있다. (Arno Mayer, Why Did the Heavens Not Darken?: The 'Final Solution' in History, 1989)
- 전쟁 중반기부터 많은 강제수용소들에서 창궐하기 시작한 발진티푸스를 억제하기 위해 독일 당국은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의도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독일이 유태인을 조직적으로 말살하려했다는 혐의에 반박하기 위해 피고측의 증거물로 제출된 문서들에서도 드러난다. 한 예로 1942년 12월 28일 친위대 산하의 수용소 관리행정국이 아우슈비츠를 포함한 각 수용시설들에 하달한 공문은, “Heinrich Himmler 친위대 총감의 지상명령”이라는 전제 하에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 숫자의 절대적 감소를 위해 수감자들의 건강 및 영양상태와 작업환경을 개선하는데 총력을 기울일 것”과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여 상부에 제출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Nuremberg doc-ument PS-2171, Annex 2. NC & A red series, Vol. 4, pp. 833-834)
b. 독가스 사용설(設)
- 아우슈비츠에서 유태인을 대량 살상하기 위한 독가스실이 가동되었다는 設은 독가스실이나 처형장면을 직접 목격한 적은 없다는 유태인 前수감자들의 증언에 의존한다. 이는 전쟁 중 독일이 탄환 절약을 위해 독가스로 유태인을 대량학살하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연합군은 선전활동의 일환으로 강제수용소들에서 - 딱히 유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 수감자들이 독가스로 집단 처형되고 있다는 요지의 폴란드어와 독일어로 작성된 전단을 자주 살포했다. 또한 같은 내용은 연합군이 운영하는 단파 라디오를 통해 주기적으로 전 유럽에 방송되었다.

아우슈비츠의 한 작업실
- Marika Frank라는 한 유태인 여성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 수감되었을 때는 하루당 최소 2만5천명의 유태인들이 독가스로 처형-화장되고 있었다는 1944년 7월 이었다. 1945년 2월 소련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그곳에 수감되어 있었던 그녀는 아우슈비츠에 머무는 동안 가스실에 대해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으며 그곳에서 유태인들이 독가스로 살해되었다는 얘기는 전쟁이 끝난 뒤에 들었다고 술회했다. (Sylvia Rothschild, Voices from the Holocaust, 1981)

2000년, 유태계인 미국의 노먼 핑클슈타인(Norman G. Finkelstein)교수는 유태인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모든 논란을 이렇게 요약했다:
“히틀러의 유태인 대학살과 관련된 책들의 대부분은 사료(史料)로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실로 홀로코스트 연구는 뻔한 거짓말 아니면 넌센스로 채워져 있다... 홀로코스트 업계가 매일같이 만들어 내는 얘기들의 비상식적 본질을 감안할 때, 신기한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별 의심 없이 그런 얘기들을 믿는다는 사실이다.” (The Holocaust Industry, 2000)

Anne Frank
그녀가 쓴 일기로 인해 안네 프랑크는 아마도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유태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수 많은 다른 유태인 수감자들과 마찬가지로 안네와 그녀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도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1944년 9월, 15세의 나이로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에서 아우슈비츠에 끌려온 프랑크는 몇 주 뒤 Bergen-Belsen 수용소로 옮겨졌고 이 곳에서 1945년 3월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아우슈비츠에 남아 있던 중 발진티푸스에 감염된 오토 프랑크는 수용소 병원에 입원 중 병상에서 아우슈비츠에 진주한 소련군을 맞았다. 그는 1980년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아우슈비츠 병원

- 아우슈비츠 수용자인 유대인을 치료해주는 의사 -

아우슈비츠의 간호원들
만약 독일의 국가정책이 유태인 안네 프랑크와 그녀의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었다면 그들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안네 프랑크와 그녀의 가족사가 비극임은 분명하나 그들의 이야기는 독일이 의도적으로 유태인을 말살하려 했다는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다. 전쟁 전 유태인에 대한 독일정부의 주안정책은 국외이민이었고 전쟁발발 직후에는 게토에, 그리고 1943년 이후로는 강제수용소에 수용하는 것이었을 뿐 유태인의 인종적 말살을 노린 genocide가 아니었다.
유태인 공산주의자들의 만행
1918년부터 1953년까지 유태인이 장악한 소련은 3천만에서 5천만으로 추정되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발틱3국, 폴란드, 헝가리 국민들을 학살했다.
라트비아 1941년

(3편 - 왜 독일은 전쟁을 할 수 밖에 없었는가?)

총선 승리로 집권에 성공한 히틀러는 서구 근대사에서 독점 자본주의와 맑스-레닌주의로 대변되는 유태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권력에 국가적 차원의 제동을 가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집권 초기부터 NSDAP 정부의 일관된 목표는 일련의 차별적인 법적장치들을 통해 독일사회에 대한 유태인의 영향력을 점진적으로 감소시키는 한편 독일 유태인 인구의 국외이민을 최대한 유도하는 것이었다.
유태인에 대한 일부 폭행사건들과 1938년 유태인 청년에 의한 파리주재 독일 외교관의 암살로 촉발된 ‘Kristallnacht' 사건을 제외하고 1933년부터 2차대전 발발전까지 독일정부의 유태인 정책은 별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국가사회당 집권 직후 개설된 집단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은 바이마르 시대에 급증했던 공산주의자와 변태성욕자, 음란물제작자, 그리고 예외적인 중범죄자들로 국한되어 있었고 단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수용소에 감금되는 일은 2차대전 발발 후인 1942년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1939년 9월 독일은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상실한 舊영토를 둘러싼 분쟁 끝에 폴란드를 침공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의 국경을 보호하고 나치독일로부터 유럽의 평화를 수호한다는 명분 하에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 동시에 동부로부터 폴란드를 침공한 소련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고, 1939년 11월 소련이 다시 핀란드를 침공했을 때에도 양국은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철회해달라는 히틀러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은 독일의 서부국경에 병력을 집결시켰고 1940년 봄 독일군이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통해 英-佛 연합군에 선제공격을 가하여 영국군의 덩케르크 탈출을 끝으로 두 주만에 프랑스를 함락시켰다.
히틀러의 제국의회 연설 (1939년 1월30일)
"유태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유럽의 평화는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계는 원만한 합의에 이를 도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선민이라면서 다른 민족들의 몸체에 기생하면서 그들의 생산적인 노동을 착취하는 행태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다른 민족들처럼 유태인도 정직하고 생산적인 노동으로 그들의 삶을 꾸려가는 방법을 터득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이상 그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 만약 유태 국제금융자본이 다시 한번 유럽의 국가들을 세계대전으로 내모든데 성공한다면 그 전쟁의 결과는 유대인의 승리가 아니라 유럽 유대인의 전멸이 될 것입니다!"

"유태인 상점에서 사지맙시다!"
DAILY EXPRESS 영국 일간지
"유대는 독일에 전쟁을 선포한다 - 전 세계의 유태인이 단결하다"
(4편 - 독일인에 대한 대학살은 왜 알려져 있지 않는가?)

CENTRAL BLAD VOOR ISRAELITEN 네덜란드 유대계 일간지
“물론 팔레스타인을 포함하여,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영국, 프랑스, 러시아, 북아프리카, 남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우리 유태인은 최후의 그날까지 對 독일 절멸 전쟁을 전개해나갈 것이다.” - September 13, 1939
Rabbi Felix Mendlesohn 유대교 지도자 (美)
“2차세계대전은 유대교의 근본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다.” - Chicago Sentinel, October 8, 1942

카임 바이츠만 초대 이스라엘 대통령
“우리는 이 전쟁이 우리의 전쟁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며 이 전쟁이 유대민족의 해방을 위해 치러지고 있는 것임을 고백함에 있어 아무런 두려움도 없다... 모든 나라를 합친 것 보다 더 강력한 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민족은 우리 유태인이다. 우리는 단지 이 전쟁에 우리의 경제력만을 지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뛰어난 프로파간다 능력으로 이 전쟁을 치르는데 필요한 도덕적인 명분을 제공하는데 그치는 것도 아니다. 승리의 관건은 우리가 얼마나 적을 그들의 내부로부터 무력화 시킬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예를 들면 레지스탕스 운동 등을 통해서 말이다. 이런 면에 있어 우리야말로 적군의 요새안에 들어가있는 트로이의 목마라고 할 수 있다. 유럽에 있는 수십만의 우리 유태인 동포들은 우리의 적을 멸하는데 있어 1차적인 몫을 담당할 요소이다. 우리의 전선은 바로 그곳에 있으며 그들의 활약은 최종적 승리에 대한 가장 값진 기여가 될 것이다.” (Speech on December 3, 1942, in New York City)
헨리 모겐소 2세 유태인 미국 재무장관
“30년전쟁이 끝난 뒤 그러했듯이 독일을 다시 한번 허허벌판 황무지로 만들어 버려야 한다.” (The Morgenthau Diary)
- 흔히 학살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유태인 영화들의 나치 학살?
미국의 인디언 대학살?
진시황의 학살?
과거 소련의 피의 독재자 스탈린?
(소련의 소비에트 당 간부들은 상당수가 유태인들이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등은 소련의 피해자였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영국과 미국의 독일인 대 학살을 아는가?
전혀 알 수가 없다.
왜?
서방은 그에 관해서는 철저히 침묵하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당연하다는 식으로 유태인 학살만을 강조한다.
서방의 독일인 당시 학살은, 일본에 떨어진 두 개의 원자폭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1942년, 해리스가 취임한 이후 영국의 폭격 양상은 급변했다.
그가 말하기를..
"적국의 민간인도 적은 적이다.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그런 적을 위해 눈물을 흘릴 필요는 없다."
그의 작전의 근본이란,
"최단시간내로 최대량의 폭격기를 동원해,
단시간만에 최대면적을 쥐새/끼하나 남기지말고 모조리 쓸어버린다.
그렇다. 그는 전쟁의 승리보다도 독일의 멸망을 원했고, 독일을 그 누구보다도 증오했고,
그런 독일의 아이와 민간인들을 모조리 멸하는게 그가 가장 희락을 느끼는 일이었다.
그는 독일 민간인들의 대학살을 보고받고도 미동하나 없었다는 냉혈안이라고 전해진다.
(폭탄비를 뿌리는 폭격기)
전쟁사의 '융단폭격'이라는 새로운 장을 열었고, 이 작전이 바로
'밀레니엄 작전'이라고도 불리운다. 이 작전의 목적은 사실 군수물자공장 지대 궤멸로
보이는듯 하지만, 전 도시를 폐허로 만들어 적의 사기를 꺾어버린다는 목적이었다.
그의 첫 공습은 1942년,5월 31일, '퀼른 대공습' 으로 시작되었다.
동원한 폭격기의 수는 1080대 !!
한마디로 하늘을 가리는 폭격기들이 먹구름같이
독일도시로 다가오는 모습이라고도 할수 있다.
그들이 뿌려대는 폭탄은 한마디로 '폭탄 비'로밖에 표현이 안된다.
그런 그들의 무시무시한 공습으로 한 도시가 20분만에 궤멸이 되었고,
민간인 사망은 6만에 달한다.
그에 비해 영국공군의 폭격기 격추 수는 40~60대를 밑돌았을정도로
한마디로 대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그 다음으론 '함부르크 대공습'이 개시되었다.
동원된 폭격기의 수는 1000대 가량.
삽시간만에 전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이때 함부르크를 알아볼수있는 건물 모두가 없어졌다고 전해지며,
5만에 달하는 민간인이 사망했다
고모라 작전으로 유명한 함부르크 폭격 물론 함부르크에 대한 폭격은 그 전후로 계속 됬다
가장 크게 터진 것은 바로 고모라 작전으로 명명되어 1943년 5월 27일, "폭격대 사령관 명령문 173번 "이 공포되면서 7월 24일부터 8월 3일까지 3천 여 기의 폭격기들이 9천 톤 가량의 폭탄과 소이탄 '쿠키'(거대한 시설물 파괴에 쓰이는 고폭탄) 등으로 인해 도시는 화염폭풍에 휩싸였다.
함부르크에 무시무시한 대기류가 몰아쳐 도시의 온도는 무려 섭씨 800도까지 올랐고, 최대 풍속 시속 240km 의 엄청난 태풍이 불어닥쳤다.
대재앙이 끝난 뒤, 시민 5만 여명이 사망했고, 25만 가구, 백만명 이상의 함부르크 시민들이 집을 잃었다.
1945년 2월 14일.
직전 나치 독일의 마지막 발악인 발지대전투에서 연합군이 승리하자, 더 이상 독일에게는 저항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이미 독일의 패배가 기정사실이 된 시점에서, 영국 공군 원수 해리스는 독일의 항복을 앞당기기 위해서 역사적인 대학살극을 지시한다.
이가 드레스텐 폭격이다.
214대의 제1진이 46만개의 폭탄을 드레스덴 상공에 흩날렸으며, 다음날 새벽 3시 제2진의 공습에서는
1진의 절반가량인 28만여개의 폭탄이 투하됐다.
그의 마지막 공습으로 꼽히는 '드레스덴 대공습' 은
한마디로 '지옥' 그 자체였다.
드레스덴은 사실 군수물자공장과도 관계가 없었고, 독일 민간인들 역시, 연합군이
드레스덴만은 폭격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엄청난 피난민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고,
해리스는 그런점을 노려 드레스덴를 끔찍한 지옥의 무대로 만들어버렸다.
1945년, 2월 14일,미국과 합동작전을 개시, 무려 3000대 에 육박하는
대규모 폭격기들을 동원하여, 1시간만에 전 도시를 초토화는 물론,
무려 4만에 달하는 사람들을 몰살시켰다. 하지만, 이 숫자는 확인된 시신의 수지만,
시신 자체가 '소각'되어 행방불명된 수만 따지면 10만명을 초월한다.
(드레스덴 폭격의 희생자)
당시 그때의 13세 소녀의 '지옥'의 증언에 따르자면..
--엄마는 나에게 젖은 담요를 덮어주고는 내게 키스를 하시고 "어서 달려라!" 라고 소리쳤다.
그 후 엄마를 보지는 못했고, 내가 밖을 나섰을땐 온 도시가 불바다였다.
내가 발을 디디는 순간, 나는 순간 발을 띠어야겠다고 느꼈다. 폭격은 도로 자체를 녹였다.
주변을 보니 녹은 도로에 다리가 붙어 떨어지지않는다며 아우성인 사람들이 천지였고,
몇몇 사람은 그 상태에서 불이 붙어 죽어갔다.--
녹아버린 시신)

]

한아이와 그의 부모가 서로 껴안은채 죽어간 모습..



아더 T 해리스.. 그의 작전으로 죽은 독일 민간인의 수만
50만명에 이른다.
하지만 그는 1953년, 독일이 항복한 후, 연합군 군사재판에서 처벌을 받지않았다. 결국 전쟁은
-이긴 자가 정의다-
또한
-선으로 가장한 악의 농락이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사람을 죽이라고 이 자리에 얹혀졌다."
드레스덴 공습으로 인한 피해 규모 (역사학자들 마다 다름)
공습 직후 작성된 드레스덴 경찰국 보고서에 다르면 민간 거주 건물 12000개 파괴, 은행 24개, 보험사 건물 26개, 소매 및 유통 창고 31개, 일반 상점 6470개, 창고 640개, 상가 256개, 대형 호텔 31개, 여인숙 26개, 행정 및 기타 정부 관련 건물 63개, 극장 3개, 영화관 18개, 교회 11개, 예배당 60개, 문화유산 50개, 병원 19개, 학교 39개, 영사관 5개, 동물원 1개, 철도청 1개, 우체국 19개, 수도 공급처 1개, 전차역 4개, 선박 19개, 식품.의류공장 200개 등이 파괴, 사상자 60만명(반 이상이 사망)의 피해를 입었다. 그 당시 1945년 무렵, 드레스덴 폭격이 일어났을 당시 독일군들은 무방비에 속수무책이었다.전투기는 있어도 조종사가 부족했기 때문에 연합국의 폭격기를 막을 방법조차 없었다. 또한 미국과 영국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었고, 당연한 일이었다며 주장하였다.. 우린 미국의 진주만보다 알려지지 않은 이 폭격들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