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사랑을 말하다[백한번째이야기]

박승혜 |2009.04.12 00:13
조회 311 |추천 1

 

 

남자의 방에 놀러온 친구는

책장에서 뭔가를 발견하곤 짐짓 놀란 얼굴로 그걸 집어 들며 말합니다.

 

- 오호, 니가 진정 이런 감성덩어리를 소장하고 있단 말이야?

야, 여기 외계인도 안나오고 헐벗은 여자들도 안 나오는데 웬일이야?

야, 근데 이 낙서는 뭐냐? 하여튼 초등학생도 아니고.

 

친구가 집어든 것은 일본영화 러브레터의 비디오 테이프.

하얀 눈붙을 배경으로 여주인공의 얼굴이 보이는데 어떻게 된건지

여배우의 얼굴에는 온통 낙서가 되있습니다.

애꾸눈에, 영구 앞니에, 도깨비 뿔에, 머리엔 땜빵까지.

 

친구의 말에 그 비디오를 받아든 남자는 얼굴에 미소가 차오릅니다.

 

- 너, 걔 기억나니? 나 1학년 때 사귀었던..

그래, 이거 그 친구가 준거야. 낙서도 자기가 한 거고.

 

그리곤 남자는 단숨에 기억 속으로 빠져듭니다.

왜 걔가 키는 작았어도 워낙 단단해서 잘 아프진 않았는데,

딱 한번 감기게 제대로 걸린 적이 있었다.

근데 죽어도 약을 안 먹겠다는거야. 너무 아프다면서도, 내가 속상해서 그랬지.

 

'먹어, 왜 약을 안 먹어? 먹어.' 근데도 안 먹겠대.

열 때문에 눈까지 빨개져 가지곤.

하여튼 그 꼴을 하고 끝까지 '안 먹어 안 먹어. 난 원래 약 안먹어.'

이게 처음엔 걱정도 돼서 그랬는데 나중엔 막 화가 나더라. 그래서 내가 그랬지.

 

'좋다. 그럼 거울을 봐라. 거울보고 니가 예쁘면 약 안 먹어도 된다.

왜? 그러다 쓰러지면 지나가던 사람이 업고라도 병원에 갈 테니까.

왜? 예쁘니까. 근데 넌 약 먹어야 된다. 왜냐? 못생겼으니까.'

 

그러면서 내가 이 배우 얘길 한거야.

너랑 나랑 어제 러브러터 봤지? 거기 나오는 여자배우.

그런 여자는 감기약 안 먹어도 된다.

내 딴엔 농담처럼 한 건데 그 말이 되게 서러웠나봐,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나 보고 막 집에나 가라고 그러더니

며칠 지나서는 갑자기 이걸 사가지고 왔더라.

길거리에 비디오 널어놓고 파는데 거기서 이거 찾았다면서,

니가 좋아하는 여자 실컷 보라면서.

 

진짜 유치하지? 낙서 좀 봐. 더 웃긴건 여기 봐라?

안에 보면 빨간색 사인펜으로 이 배우 이름도 막 적어놨다, 저주래. 얼마나 귀여웠던지.

 

숨 쉴틈없이 이어지던 남자의 말이 이쯤에서 뚝 끊어집니다.

그리곤 조금 전과는 다른 톤의 목소리가 되어 추억을 떠올립니다.

 

정말 유치하고 지독하고 귀여운 척은 있는대로 다 하고

질투는 정말 심하고 의심도 많고 고집은 더럽게 세고 그랬었는데..

그런 여자 때문에 나는 한때 참 행복했었다고,

나 때문에 그렇게나 질투를 하던 사람.

내 앞에선 그렇게나 유치해졌던 사람.

세련되지 않았고 때론 부담스러웠지만 그렇게나 솔직하게 좋아함을 표현하던 사람.

그땐 우리 둘 다 스무살.

 

그 때처럼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을 말하다

 

 

추천수1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