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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동,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 집

김동진 |2009.04.12 17:20
조회 225 |추천 0



어렸을때 부터 쭈~욱 지켜온 일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동지에 팥죽을 먹는 것' 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동지를 챙기지 않지만, 아이는 동지가 되면 어김없이 불교신자인 부모님을 따라 절에서 팥죽을 먹곤했다.


팥죽을 먹는다는 것은 한해의 액운을 물리치고 새해에는 모두 건강하고 탈이 없기를 바라는 의미지만, 팥을 싫어하는 아이에게 부모님께서는 "이거 안먹으면 귀신이 밤마다 쫒아온다" 며 으레 겁을 주셨다.


어릴 때에는 '오싹오싹 공포체험' 같은 귀신 책들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팥죽을 먹지 않으면 귀신에게 잡혀간다는 부모님의 말을 철썩같이 믿었다. 그래서 귀신에게서 벗어나겠다는 신념하나로 절에서 만든 음식 답게 단 맛하나 없이 끈적거리기만하던 새알을 하나하나 꼭꼭 씹어 먹었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자 그토록 싫어하던 팥과 팥죽이 하나의 이야기가 되고 추억이 되어 가장 좋아하는 음식중에 하나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팥죽이 나쁜 귀신들을 쫒아내 행운만 가져다 준다는 부모님의 말씀이 아이의 마음속에서 자라 커다란 믿음이 되었다. 

 

 

 

항상 챙겨먹던 팥죽을 2007년의 동짓날에는 일 때문에 바쁘다는 이유로 건너 뛰고 말았다. 부모님이 절에서 가져오신 떡 하나를 입안에 하나 던져 넣었을 뿐이다.


팥죽을 안 먹어서일까, 정초부터 나쁜일들만 일어났다.

늦은 야근 후 그냥 잠들기 아쉬워 전기장판을 깔고 무한도전 재방송을 보다가 잠들어 무식하게 손을 데이고 말았다. 게다가 새해 첫 출근날에는 꽉찬 1호선 직통열차에서 변태를 만나, '꺼져, 이 변태 새끼야-'  한마디를 외치지도 못하고 전철에서 도망치듯이 내렸다. 친구에게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설상가상으로 며칠전 고장나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핸드폰을 어루만지며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려댔다.


어떻게 이런일들이 한꺼번에 일어 날수 있는 것일까? 이유가 필요했다. 마음을 달래줄 구실...

종교가 있었다면 신에게 의지했겠지만 그 이유를 말해 줄 그 무엇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며칠간 벌어진 모든 나쁜 일들이 팥죽 탓이 되었다. 

팥죽을 먹지 않아서 이런일 들이 생긴거라고. 귀신이 나를 쫒아오고 있는 거니까 팥죽을 먹으면 모든게 제자리로 돌아올거라고 말이다.

 

 

기여코 한시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점심시간에 단팥죽을 먹으러 삼청동으로 나섰다. 며칠간 세상에 배신당한것 같았던 기분을 180도 돌려줄 맛있는 단팥죽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혈관속의 당도를 힘껏 끌어올려 신이 나 뛰어 다닐 수 있도록...



팥죽에는 달작지근한 단팥죽과 달지 않은 동지팥죽이 있다. 팥을 끓이면서 설탕을 넣어 만든 것은 단팥죽, 팥을 삶은 후 껍질을 걸러내고 쌀을 넣어 끓인 것은 동지팥죽이다.


 

삼청동에는 '우리는 첫째가 아니요, 두번째로 잘하는 집이요' 라고 이름으로 말하는 한방 찻집이 있다. 대표 메뉴는 쌍화차와 십전대보탕같은 민속음료이지만 이곳의 단팥죽은 어느새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퍼져 메인 메뉴보다 유명하다.


서로 자기가 제일이고, 원조라며 TV출연한 것을 떠들어대는 집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조용히 30년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서울에서 두번째로 잘하는 집' 은 가게 이름만 들어도 겸손한 할머니의 마음이 느껴진다.  


 


1976년.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단팥죽을 쑤어온 옛날 모습을 그대로를 간직한 고즈넉한 멋이 살아있는 지붕 낮은 옛날 집.

다방에서나 보았을 법한 의자와 탁자, 신경쓰지 않은 듯 손으로 직접 쓴 한문이 있는 메뉴판. 앉을 의자가 필요해서 놓았고, 차를 올려놓을 탁자가 필요해 탁자를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소박하고 정겨운 그 곳은 과하지 않아 더 운치있다.




평일 낮이면 중절모를 쓰고 오는 노신사 할아버지들과 멋쟁이 할머니들을 볼 수 있는 그곳은 바쁜 일상에 떠밀려 살다가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아이에게는 마치 시간을 돌려 느리게 살던 예전으로 돌아가는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까지 느껴진다.

그곳에 앉아 천천히 생각하고 천천히 숨을 쉬면 나쁜 기억들도 서서히 누그러짐을 느낀다. 게다가낮은 지붕 아래 작고 불편한 다방의자에 앉아 좋아하는 사람과 얘기를 하고 있으면 어느새 오래된 영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마저 든다.



찬바람 쌩쌩부는 한겨울에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찰지고 달콤하고 부드러운 이곳의 단팥죽은 주문하면 1분도 채 안되어 나온다. 오목하고 작지만 뚜껑이 덮여있는 빠알간 단팥죽은 뚜껑안에 그것을 상상하게 해 마음을 더욱 설레이게 한다. 

 




뚜껑을 짜짠~ 열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데, 진한 팥의 색깔과 고명으로 얹어진 찐밤과 강낭콩, 은행 그리고 그위로 뿌려진 계피가루가 입안 가득 침을 고이게 만든다. 가만히 냄새를 맡고 있으면 단 내음이 나지 않지만 한 수저 푸욱 푸면 단 내음이 솔솔 올라온다.
  




수저 한가득 팥앙금과 고명을 먹으면 입으로 싸하게 퍼지는 단맛과 계피향은 수저를 단 한번도 탁자위에 내려 놓을 수 없게 만든다. 하얗게 서리 낀 창밖으로 보이는 좁은 길과 추위를 피해 빠르게 걷는 사람들. 겨울철의 별미인 단팥죽을 즐기는 이유가 아닐까한다.


자, 하이라이트! 오목한 그릇 아래쪽에 커다랗게 자리잡은 찹쌀옹심이. 수저로 잘라 먹기보다는 수저 위에 올려놓고 입으로 한입씩 베어먹자. 찹쌀의 특유의 부드럽고 쫄깃함으로 꽁꽁 얼었던 몸과 마음을 스르르 녹여준다. 절대 뜨겁지 않으니 안심하고 한입 크게 베어먹어도 좋을 것이다.




어린시절 팥에 대한 기억이 있는 어른은 붉은 그릇에 나온 붉은 단팥죽을 먹으며 올해의 모든 액운이 날아가기를 빌었다.

그곳의 편안한 분위기 때문일까, 달콤한 단팥죽 덕분일까, 아니면 팥죽이 귀신을 쫒아낸걸까?... 며칠간 일어났던 나쁜 일들을 팥죽 탓으로 돌렸던 어른은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고 좋은 일들이 일어날것만 같은 믿음이 생겼다. 

많은 사람들이 귀신을 믿지 않거나 팥의 주술적인 의미를 믿지 않겠지만 적어도 '서울에서 두번째로 잘하는 집' 의 단팥죽은 그곳을 찾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소박하지만 기분좋은 맛을 선물할 것이다. 
    

영업시간: 오전 10시 ~ 오후 11시

 

휴무:  명절에만 쉽니다.

 

메뉴: 단팥죽 5000원

         십전대보탕 5000원

         녹각대보탕 7000원

         생강대추차 4000원

         수정과 4000원

         식혜 4000원

 

찾아가는 방법: 삼청동사무소에서 위쪽으로 올라가서 용수산 건너편
                        에 위치

 

특이사항: 신용카드 사용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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