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파트 광고는 정말 재밌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라는 광고에서 보이듯(달동네나 사글셋집, 쪽방에 사는 사람들은 이걸 들으며 뭐라 느낄까) 이 사회의 가장 천박한 의식수준을 아주 '우아하게' 표현해낸다.
그중 또 하나의 걸작은 바로 이것.
'유럽이 꿈꾸는 유럽을 만났습니다. 당신의 유럽 신도브래뉴'
정말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
언젠가 친구들과 이런 얘기를 한 적 있었는데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동남아가 꿈꾸는 동남아를 만났습니다. 당신의 동남아 신도브래뉴. 너 여기에 살고 싶겠냐?"
슬프게도 나와 다른 친구들은 이 말에 박장대소를 했다. 정말 빌어먹게도 친구의 이 말은 너무나 설득력 있었다. 공부를 한다, 오리엔탈리즘이 어쩌다 하는 누구라도 결국 그 자신 스스로부터 오리엔탈리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 그걸 너무나 뼈저리게 느꼈다.
우리에게 서양이란 그런 존재였다. 제국주의와 마주친 그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 오리엔탈리즘에서 단 한순간도 벗어나지 못했다. 무조건적인 추종에서부터 극단적인 배척에 이르기까지 헤게모니는 침투해들어왔으며 스스로가 그 헤게모니에 저항하겠다고 일어서는 순간까지도 결국은 그 헤게모니에 포획되어 있었다. 뛰어봤자 헤게몬 손바닥 안 이랄까.
제국주의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겠다는 일념하에 제국을 꿈꿨던 근대, 근대화라는 지상명제와 제국주의로부터의 근대화 압력이 만들어내는 모순에 절망한 친일파, 노동자의 해방과 인간다운 삶을 위한 맑시즘을 자주적 근대화(서구화)의 방편으로 삼은 공산주의자, 서구의 산업사회를 충실히 모방한 개발론자나 근대화론자들 뿐 아니라 미국을 극복하려는 반미주의자들까지도 서구, 미국, 근대에 대한 열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철저한 서구의 헤게모니. 이 헤게모니 속에서 서구에게 보여지기 위한 우리의 정체성이 '구성'되었고, 이는 일본의 중세 봉건제론, 한국의 내재적발전론에 대한 집착 등 스스로가 '얼마나 서구에 근접한가'를 보이려는 웃지 못할 희극을 연출해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에게 자리잡은 오리엔탈리즘은 또다시 새로운 서양과 오리엔트를 만들어냈다.
서양인 미국에게 개항당한 일본은 수십년 뒤 똑같은 방법으로 스스로 서양이 되어 조선을 개항시켰다.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그렇게 조선을 오리엔탈화 시켰고, 스스로 서양의 제국이 되어 동양의 조선을 식민지화했다. 일본에게 조선은 서양으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구성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일본에게 강점당한 조선은 서양, 제국주의의 악랄함에 치를 떨었지만 동시에 강력한 힘을 가진 서양, 제국주의, 일본을 갈망했다. 당시 근대와 서양을 열망하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일본은 서양 그 자체였다. 조선의 내셔널리즘은 이에 대한 저항의 형태로 나타났고 실제로 그것은 제국주의 파시즘을 극복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해방을 통해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자마자 저항적 민족주의의 근저에 존재하고 있던 근대화, 서구화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강력하게 발현되었고 동시에 (일본이 조선에게 그러했듯)우리보다 늦게 근대의 대열에 합류한 사회를 오리엔트로 삼아 서구가 되고자 하는 갈망을 충족시키려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성장과 민주주의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서양에 대한 컴플렉스는 여전했으며, 서구에 대한 열등감과 후후후발자본주의국가, 혹은 자본주의에 대열에 합류하지 않은 사회에 대한 우월감은 그 스스로 오리엔탈리즘을 재생산해내고 있다.
제국주의 일본의 오리엔트는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국가)이었고 해방 후 한국의 오리엔트는 위의 우스개에서 보이듯 동남아(를 비롯해 우리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수많은 사회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서구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내셔널리즘은 다시 스스로의 오리엔트에게 자신들이 당했던 것과 똑같은 폭력을 강요하고 있다. 여기서 저항적 민족주의와 침략적 민족주의는 차별성을 갖지 못한다. 단지 힘의 상대적 차이에 따라 폭력을 강요당하고 다시 폭력을 강요하는 헤게모니의 질서가 성립할 뿐이다.
그렇게 오리엔탈리즘과 서양의 헤게모니는 우리를 점령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그 헤게모니에게 포섭된 채 서로를 정당화하고 있으며 이러한 내셔널리즘의 공범관계는 헤게모니를 떠받치는 동시에 재생산해내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재생산되는 서구의 헤게모니는 그 모습을 바꾸어가며 우리의 일상 깊숙히 침투해왔다. 우리 사회 내부에서 서양과 비서양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앞서 예를 든 아파트 광고를 다시 보자면,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의 가치를 정해준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당신의 유럽 신도브래뉴' 등의 고급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서양이고 서민용 주택에 주거하는 이들은 비서양이다. 당신의 유럽 운운하는 아파트 광고와 당신의 동남아 운운하는 우스개는 우리를 지배하는 헤게모니, 열등감과 우월감의 오리엔탈리즘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사카이 ... 군사적인 딱딱한(hard) 헤게모니가 아니라 욕망체제를 만들어내는 헤게모니, 혹은 자본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헤게모니 쪽이 실은 지금 미국의 지배체제에서 오히려 강력한 지지기반을 형성하고 있는 게 아닌가 ... 소비재 상품 하나를 보더라도, 그 속에는 미국적 중산계급의 생활이라는 이미지가 투사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투사됨으로써 욕망은 거대한 규모로 계속해서 조직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미지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미국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든 유럽이든 세계 어디에도 분포하고 있습니다. ...
임지현 ... 미국이라는 이미지가 함축하는 헤게모니의 소유자는 미국의 몰락하는 중산층이나 위기에 빠진 미국 자본, 혹은 흑인 하층계급이기보다는 전지구화의 자본전략에 동참하는 일본과 한국의 이른바 '민족'자본, 공기업 민영화를 지지하는 영국의 노동당, 시장경제라는 '만병통치약'에 중독된 동유럽과 러시아의 신흥자본가와 구 노멘클라투라 등 그야말로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전지구적 주식회사의 주주들입니다.
- 임지현, 사카이 나오키,『오만과 편견』, 448~453쪽.
헤게모니는 이미 모든 곳에 침투해있다. 인용문에서 주로 말하는 경제적, 문화적 부분은 물론이고 우리의 의식구조 깊숙한 곳 까지. 반미의 구호를 외치는 이들의 의식에 조차 미국에 대한 동경은 뿌리를 박고 있다. 그들은 미국을 반대하는 것인가, 우리가 미국처럼 부강한 국민국가가 되는 것을 가로막는 미국을 반대하는 것인가. 이러한 반미주의는 오히려 우리의 의식구조 속에 깊숙히 뿌리내린 헤게모니의 포착을 방해하고 있다.
따라서 국민국가에 대한 비판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방조, 곧 미국 헤게모니에 대한 긍정이 된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오히려 오리엔탈리즘, 그 헤게모니와 함께 작용하는 내셔널리즘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우리를 지배하는 헤게모니의 실체를 드러나게 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전망을 제시해 줄 것이다. 헤게모니의 출발은 우리가 아니었을지 몰라도 지금의 우리 사회 역시 미국 헤게모니를 구성하는 일부라는 사실을 돌아봐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겐 고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