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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손에 이끌려 - 1

이성은 |2009.04.27 22:33
조회 1,385 |추천 0

주의 손에 이끌려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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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2월 초.
어느 날 갑자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이 편지는 전남 무안군 사창면에서 목회하고 있는 친구 정종호 목사로부터 온 것이었다. 뜯어보니 그 내용은 짤막했다. 다섯 줄 정도나 될까? “요즘 어떻게 살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어떻게 살고 있었던가? 결핵 치료를 겨우 마무리하고 아버지께서 경영하시던 구멍가게를 이어 받았는데 내가 수 년 동안 병 치료하느라고 재물을 탕진하고 남은 것이 별로 없는 상태였다. 이것을 그럭저럭 꾸려 나갔는데 3년 후 다시 아버님 초상을 치르고 누님 초상을 치르고서 장사 밑천이 줄어든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장이 없어서 장사가 잘 되기로 소문났던 그곳에 5일장이 들어서면서 상권이 장으로 옮겨가고 나니 그야말로 썰렁해졌고 장사는 형편이 없었다. 그래도 자본이 넉넉한 사람들은 또다시 그쪽으로 발전을 시켰지만 나는 불난 집에 물까지 퍼부어진 것처럼 그만 그 자리에서 주저앉게 되고 만 것이다.


백방으로 생각해도 길이 없어서 궁리 끝에 고향(전남 보성)에 계신 형님(이복형제간)에게 찾아가서 돈을 좀 얻어 보기로 생각했다. 형님은 시골에서는 부농인 편이었다. 논이 50 두락(약 1만 평) 되고 물레방앗간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식량은 물레방앗간 수입으로도 충분했으니 50 두락의 논에서 나온 소출로 고스란히 매년 토지를 사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쯤 되면 부는 맨땅에서 흙 모으기보다 쉬운 것이다. 이런 형님에게 내가 찾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데는 일본에 살려고 가셨다가 해방이 되자 아들 사 형제와 딸 하나를 데리고 거의 맨손으로 고향에 돌아오셨는데 그때 우리 집에서 해마다 돈을 가져갔고 그 돈이 기금이 되어 오늘의 부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내가 지금 어렵게 된 이유가 되었기도 하니 나도 어려울 때 한번쯤은 도움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했고 어머니 역시 당연하게 생각하셨던 것이다.


희망을 가지고 3일을 걸려 형님 집에 도착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때 내 나이는 25세쯤 되었을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겪는 절망이었다.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도 이렇게 앞이 캄캄하지는 않았었다. 형님 집을 떠나 30리길을 걸어 나서는데 하늘이 노랗고 땅은 뒤우뚱거렸다. 어디로 돌아가나? 어머니와 세 조카들(누님이 남기고 가신 딸들)이 한 가닥 희망을 걸고 기다리고 있는데… …. 그뿐인가? 이웃 사람들까지 내가 무엇을 가지고 올 것인가를 궁금해 하고 있는데 나는 어떻게 그곳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죄를 지었다가 돌아오는 길이라면 차라리“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하고 무릎을 꿇면 되겠지만 돈을 얻으러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와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30리 멀던 주릿재(벌교에서 율어로 넘어가는 고개)가 왜 이리 빨리 넘어갈까? 기차는 왜 이리 빨리 달려가는가? 천천히 천천히 내가 손에 돈을 쥐고 갈 때까지 느리게 갈 수는 없을까? 벌교에서 기차를 타고 광주로, 광주에서 다시 목포로, 목포에서 다시 노화도로 가는 길이 가깝지 않은 길인데 아무리 머무적거리고 뒷걸음치는 마음을 가졌으나 어느새 노화도 항에 도착하고 말았고 그 땅에 발을 딛자 다시 겹쳐 밀려드는 부끄러움과 난감함. 부두에서 집까지는 겨우 100m 정도인데 이 길을 통과하는 시간이 어찌나 길던지!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지 않은가! 어머님이 빈손으로 들어오는 나를 보시고 아무 말씀 못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지금도 꿈을 꾸면 꼭 그 집을 찾아가는 꿈을 꾸기 일쑤인데 그때마다 그 난감함으로 어쩔 줄을 모르다가 꿈을 깨곤 한다.


이렇게 살고 있던 나에게“요즘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편지 한 통이 날아온 것이다.
그때“나는 별 볼일 없이 살고 있다. 왜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고 있다. 희망은 하나도 없다.”이런 짧은 편지를 써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며칠 후 또 한 통의 편지가 왔다. “하나님이 너를 죽을 자리에서 살려 주셨다. 그러니 이제 일어나 주님을 위해 살지 않겠느냐? 뜻이 있으면 속히 연락해라. 길을 주선해 보마.”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어머니와 조카들은 어쩌고 나더러 무엇을 어찌하란 말인가? 내 사정을 모르나? 그런데 하루가 지나니까 다음날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부담이 왔다. 그러나 대책이 없었다. 3일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불현듯 한 생각이 스쳤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름이 아닌가!


그때 나는“하나님, 나를 왜 세상에 내 놓았습니까? 아무 쓸 데도 없고 살아갈 희망도 없지 않습니까? 우연히 잘못 태어난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거두소서.”이렇게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이 기도는 오랜

 믿음의 방황이 끝나고 그래도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나온 후에 나온 기도였음).
그렇다면 이 부름은 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아닌가! 이 부름에 어떤 이유로든 응답하지 않는다면 다시는“왜 이렇습니까?”라고 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 무조건 응답하자! 그래서 즉시“그래, 아무것도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믿어지니 네 뜻대로 하겠다.”고 편지를 썼고 그 편지는 마침 전도사님이 목포에 가신다고 부두에 나가 계셨기에 그에게 부탁해서 목포 우체국에 넣어 달라고 했다. 이상하게도 무엇이 급한 것같이 느껴졌는데 후에 그 전도사님도 그때 특별한 편지라는 예감이 들었다고 하셨다.
이래서 불과 20일 만에 아무 준비 없이 신학을 공부한다고 집을 떠나 친구 집을 거쳐 친구와 함께 서울로 올라갔던 것이다. 그때 내 나이 27세.
마치 독수리 날개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끄집어 내셨듯이 나를 그곳, 그 절망의 처소에서 업어내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친구를 이 거룩한 일에 사용하셨고 나는 평생 그를 잊을 수 없게 되었다.
내 힘으로는 어떤 방법으로도 그곳을 벗어날 수 없었기에 나는 단 한 번도 그리고 꿈에서라도 그 상황을 벗어나 보려고 한 일이 없었고 어떤 다른 대안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그때 나는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으나 확신이 없어서 수년을 방황하다가 이제 막 피조물인 나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였다).
더군다나 신학을 공부해서 목회자가 된다는 생각은 단 일 초라도 해 본 일이 없었던 나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는 왜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인가? 이것은 완전한 비밀 작전이었다. 그 누구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일이 적시에 신속하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나는 아무런 계획이 없던 터였고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단지“왜 나를 세상에 두십니까? 그런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라고 하소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나에게 하나님은“이리 오라. 내가 너를 쓰겠다.”하신 것이었다. 그분이 아니면 나를 사용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상황에서 오로지 단독으로 나를 부르신 것이다.


부르신 이도 오직 한 분이시고 그 부름을 받는 자도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이 일을 수행하도록 위임된 종도 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내가 알지 못한 곳에서 구원자를 예비해 놓고 때를 기다리셨던 것 같다. 이 친구 구원자는 나를 위해서 먼저 신학을 했고 목회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큰 교단 신학교나 좋은 대학도 골라서 갈 수 있는 친구였는데도 결사적으로 내가 입학할 수 있는 신학교에 갔던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죽마고우로서 그와 나의 집 사이는 불과 100m 정도밖에 안 되었다. 그러나 내가 일찍 학교를 갔기 때문에 아주 친하게 지냈던 것은 아니다(그가 신학교에 다닐 때는 친했음). 그리고 나는 우리 동네에 교회가 시작되던 날부터 유일하게 어린이 교인으로 참여했지만 이 친구는 그때는 완전히 외인이었다. 그런데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교회를 나갔는데 그 교회가 목포 측후동 교회였고 그 교회 목사님이셨던 김성실 목사님에게 감화를 받아 신학교를 가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어느 날 그에게서 편지 한 통이 왔는데 자기 증명판 사진을 붙인 편지였다. 내용인 즉 황당한 것이었다. 자기는 신학교를 가려는데 자기 아버지는 고려대학교를 가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제 자기는 살 필요가 없어서 자살을 하겠다는 통보식 편지였다.
그런데 사실은 그 신학교는 이제 설립하는 곳으로 자기가 들어가면 1회가 되는 것이었고 학벌 좋고 환경 좋은 사람이 선뜻 선택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해석이 되는 것이다. 이 친구가 이 신학교를 결사적으로 택했던 것은 오직 나를 그곳에 입학시키기 위해서였다고 말이다. 그 외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갈 곳 없는 나에게는 과분했지만 그에게는 아주 심하게 어리석은 선택이었기 때문이다(물론 김성실 목사님에게 크게 감동을 받았다는 이유는 배제할 수 없지만).


모세는 좋은 조건, 좋은 거처를 버리고 이스라엘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자진했다고 했다(히11:24-26). 그가 애굽에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은 지위에서 잘 살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가 필요했고 모세는 애굽에 살 수 없도록 함정에 빠졌기에 하나님은 그를 이끌어 사용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친구는 얼마든지 좋은 조건과 환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신의 길을 축소해서 나를 구원하기에만 적합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깊은 배려였다고 해석된다. 그가 만일 고려대학교에 갔었다면, 또는 큰 교단 신학교를 갔었다면 나와는 무관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고 지금쯤이면 완전히 아무 연관이 없는 타인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의 구원자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 쓰임 받았고 나의 영원한 친구가 되었다. 그는 나를 구해 내고 난 이후 평생 어려운 목회 길을 걸었고 지금은 그것마저 정년으로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나를 구원한 구원자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고난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가 밑뿌리가 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주님께 영화롭게 되면 그도 함께 영화롭게 될 것이고 내가 부끄럽게 된다면 그의 수고와 고난이 헛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와 함께 아버지 앞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


1964년 2월은 내 인생의 새로운 첫 달로서 유월절이 있는 성스러운 달이다. 나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로 공수 구원했음을 믿는다.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했고 홍해를 건너게 했으며 광야에서 40년을 양육했음을 믿는다. 나는 이 실재를 체험했다. 그들의 때의 그 하나님은 나의 때의 하나님 그분이시다. 애굽에 묶여있던 백성은 바로 나였으며 이스라엘을 끄집어 낸 구원자는 나를 절망의 곳에서 끄집어 낸 내 친구 정종호 목사다.


무엇이 다른가! 시대는 다르고 인물은 달라도 여호와 구원자는 언제나 그분이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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