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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는 우리 땅이 아닙니다.

김간중 |2009.05.05 22:33
조회 1,181 |추천 6

http://kin.naver.com/open100/db_detail.php?d1id=6&dir_id=614&eid=o/vrQQicPGSzdL5Ukdjy3RzcLOj3GptQ&qb=6rCE64+EIOyLpOuhnQ==&enc=utf8&pid=fls%2Bdsoi5UZsssC/A4Nsss--151447&sid=SgA@QBgAAEoAADA@nJo

 

 

간도와 관련한 지도를 보면 이 땅을 반드시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크기에서 지도마다 차이가 있지만 토문강에서 송화강 그리고 헤이룽강을 따라 경계가 그려진 지도를 보면 정말 입이 딱 벌이질 정도이다.

 

그런데 얼마전 한국일보 9/19일자에 있는 토문강의 진실이라는 기사를 보았을 때 받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백두산 정계비를 세울 때 당시 조선과 청의 관리는 토문강을 두만강의 한 지류로 봤거나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인식했고 또 두만강 하류까지 가서 최종적으로 확인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여지껏 알고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전부가 서위압록(西爲鴨錄) 동위토문(東爲土門) 라는 백두산 정계비 글귀를 수도 없이 봐 왔을 것이다. 우리가 간도는 우리땅이라고 하는 그 근거가 뒤집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에 조선과 청의 북쪽 경계를 정하는 부분에 대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자.

 

숙종 51권 38년 5월 23일

 

총관(摠管)이 백산(白山)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았더니, 압록강(鴨綠江)의 근원이 과연 산 허리의 남변(南邊)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미 경계(境界)로 삼았으며, 토문강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이것을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江)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 하고, 고개 위에 비(碑)를 세우고자 하며 말하기를, ‘경계를 정하고 비석을 세움이 황상(皇上)의 뜻이다. 도신(道臣)과 빈신(貧臣)도 또한 마땅히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겨야 한다.’고 하기에, 신 등은 이미 함께 가서 간심(看審)하지 못하고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김은 일이 성실(誠實)하지 못하다.’는 말로 대답하였습니다."

 

즉 청나라 관리는 토문강을 두만강의 근원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혹시 국역에 오류가 있나해서 원문도 빨간 부분만 살펴보겠다.

而土門江源, 則白山東邊最下處, 有一派東流。 摠管指此爲豆江之源曰

원문에는 두강(豆江)이라고 되어있다.

 

또 다른 부분을 보면서 두강이 어떤 강인지 알아보자.

숙종 51권 38년 6월 10일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이  4일에 치계(馳係)하기를,
 
“시위(侍衛)는 배를 타고 총관(摠管)은 육로(陸路)로 오늘 경원(慶源)에 도착했고, 내일 경흥(慶興)으로 떠나려 합니다. 총관이 백두산 지도 1본(本)을 내주었기 때문에 감봉(監封)하여 올려보내며, 총관이 또 이자(移咨)라 하며 1장의 문서를 보냈기 때문에 또한 올려보냅니다. 그 이른바 ‘압록강(鴨綠江)과 토문강(土們江) 두 강이 모두 백두산의 근저(根底)로부터 발원(發源)하여 강 남쪽의 조선(朝鮮)의 경계가 된지 역년(歷年)이 이미 오래 되었다.’라는 것은 피차의 경계를 논단(論斷)함이 지극히 명백하니, 뒷날의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박권이 함경 감사 이선부와 함께 또 봉계(封啓)하기를,
 
“이 달 1일에 총관이 20리 남짓되는 두리산(豆里山)으로 달려가 산마루에 올라 두만강의 바다로 들어가는 곳을 바라보고 그 일행 중의 화공(畫工)에게 형상을 그리게 한 뒤 즉시 길을 되돌려서 경원부(慶源府)로 돌아왔습니다...."

 

接伴使朴權, 初四日馳啓曰: “侍衛乘船摠管由陸, 今日到慶源, 明將發向慶興。 摠管出給白山圖一本, 故監封上送, 而摠管又稱移咨, 出送一張書, 故亦爲上送。 其所謂鴨綠、土門兩江, 俱從白山根底發源, 江南爲朝鮮之境, 歷年已久云者, 論斷彼此境界, 極其明白, 可無後慮。” 至是, 權與監司李善溥, 又爲封啓曰:
 
本月初一日, 摠管馳往二十里許豆里山, 登山巓望見豆江入海處, 使其行中畫工圖形後, 卽爲復路, 還到慶源府。
 
 경원을 거쳐 경흥으로 갔고 거기서 산에 올라 바다로 흘러가는 강을 보았다.

그렇다면 豆江(두강)은 두만강 말고 다른 강을 뜻할 순 없는 일이다.

 

숙종 52권 38년 12월 7일에 있는 내용을 보면 토문강의 진실은 명확해진다.

 

이때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선부(李善溥)가 백두산(白頭山)에 푯말 세우는 역사(役事)를 거의 다 끝냈다는 뜻으로 계문(啓聞)하였다. 겸문학(兼文學) 홍치중(洪致中)이 일찍이 북평사(北評事)로서 푯말을 세우던 초기에 가서 살펴보고, 상소하여 그 곡절을 진달하기를,
 
“신(臣)이 북관(北關)에 있을 때 백두산의 푯말 세우는 곳을 살펴보았습니다. 대저 백두산의 동쪽 진장산(眞長山)안에서 나와 합쳐져 두만강(豆滿江)이 되는 물이 무릇 4갈래인데, 그 중에 가장 남쪽의 네번째 갈래는 곧 북병사(北兵使) 장한상(張漢相)이 가장 먼저 가서 살펴보려 하였다가 빙설(氷雪)에 막혀 전진(前進)하지 못한 곳입니다. 그 북쪽의 세번째 갈래는 곧 북우후(北虞候) 김사정(金嗣鼎) 등이 추후(追後)로 간심(看審)한 곳이고, 그 북쪽의 두번째 갈래는 곧 나난 만호(羅暖萬戶) 박도상(朴道常)이 청차(淸差)가 나왔을 때 도로(道路)에 관한 차원으로서 따라갔다가 찾아낸 것입니다. 그 가장 북쪽의 첫번째 갈래는 수원(水源)이 조금 짧고 두 번째 갈래와 거리가 가장 가깝기 때문에 하류(下流)에서 두번째 갈래로 흘러 들어 두만강의 최초의 원류(源流)가 된 것이고, 청차가 가리키며 ‘강의 원류가 땅속으로 들어가 속으로 흐르다가 도로 솟아나는 물이라.’고 한 것은 첫번째 갈래의 북쪽 10여 리 밖 사봉(沙峰)밑에 있는 것입니다. 당초 청차가 백두산에서 내려와 수원(水源)을 두루 찾을 때 이 지역에 당도하자 말을 멈추고 말하기를, ‘이것이 곧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이라.’고 하고, 다시 그 하류를 찾아보지 않고 육지(陸地)로 해서 길을 갔습니다. 두 번째 갈래에 당도하자, 첫번째 갈래가 흘러와 합쳐지는 것을 보고 ‘그 물이 과연 여기서 합쳐지니, 그것이 토문강의 근원임이 명백하고 확실하여 의심할 것이 없다. 이것으로 경계(境界)를 정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이 여러 수원의 갈래로 경계를 정하게 된 곡절의 대략입니다.
 
신(臣)이 여러 차사원(差使員)들을 데리고 청차가 이른바 강의 수원이 도로 들어가는 곳이란 곳에 도착하자, 감역(監役)과 차원(差員) 모두가 하는 말이 ‘이 물이 비록 총관(摠管)이 정한 바 강의 수원이지만, 그때는 일이 급박하여 미처 그 하류(下流)를 두루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푯말을 세우게 되었으니 한 번 가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허(許)와 박(朴)【거산 찰방(居山察訪) 허양(許樑)과 나난 만호(羅暖萬戶) 박도상(朴道常)이다.】 두 차원을 시켜 함께 가서 살펴보게 했더니, 돌아와서 고하기를, ‘흐름을 따라 거의 30리를 가니 이 물의 하류는 또 북쪽에서 내려오는 딴 물과 합쳐 점점 동북(東北)을 향해 갔고, 두만강에는 속하지 않았습니다. 기필코 끝까지 찾아보려고 한다면 사세로 보아 장차 오랑캐들 지역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며, 만약 혹시라도 피인(彼人)들을 만난다면 일이 불편하게 되겠기에 앞질러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청차(淸差)는 단지 물이 나오는 곳 및 첫 번째 갈래와 두 번째 갈래가 합쳐져 흐르는 곳만 보았을 뿐이고, 일찍이 물을 따라 내려가 끝까지 흘러가는 곳을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본 물은 딴 곳을 향해 흘러가고 중간에 따로 이른바 첫 번째 갈래가 있어 두 번째 갈래로 흘러와 합해지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가 본 것이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인 줄 잘못 알았던 것이니, 이는 진실로 경솔한 소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미 강의 수원이 과연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청차가 정한 것임을 핑계로 이 물에다 막바로 푯말을 세운다면, 하류(下流)는 이미 저들의 땅으로 들어가 향해간 곳을 알지 못하는데다가 국경의 한계는 다시 의거할 데가 없을 것이니, 뒷날 난처한 염려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臣)이 여러 차원들과 함께 상의하기를, ‘이미 잘못 잡은 강의 수원을 비록 마음대로 우리가 변경할 수는 없지만, 하류가 어떠한지는 논할 것 없이 물의 흐름이 끊어진 곳 이상은 진실로 마땅히 푯말을 세우는 안이 되어야 하니, 먼저 비(碑)를 세운 곳에서부터 역사를 시작하여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되, 나무가 없고 돌만 있으면 돌로 쌓아 돈대를 만들고 나무만 있고 돌이 없으면 나무를 베어 목책(木柵)을 세우기로 한다. 오늘날 조정의 명령이 당초부터 한 차례 거행으로 역사를 마치려는 뜻이 아니었으니, 빨리 마치려고 하지 말고 오직 견고하게 하기를 힘쓰되 이른바 물이 나오는 곳에까지 이르지 아니하여 우선 역사를 정지하고 돌아간다. 강의 수원을 변통하는 것에 있어서는 서서히 조가(朝家)의 의논이 결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내년 역사를 계속할 때 진퇴(進退)하는 바탕으로 삼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더니, 차원들이 모두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뒤에 들으니, 허양(許樑) 등이 미봉(彌縫)하는 데만 급급하여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목책을 두 번째 갈래의 수원에다 대놓았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목책이 끝나는 곳은 바로 국경의 한계가 나누어지는 곳입니다. 두 나라의 경계를 정하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 한 두 차원의 뜻만으로 조정에서 알지도 못하는 물에다 강역(疆域)을 제멋대로 정했으니, 이는 마땅히 징치(懲治)하여 강토에 관한 일을 중히 여김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강의 수원에 관한 한 가지 일은 또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보다 좋은 대로 잘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이유(李濡)가 연석(筵席)에서 아뢰기를,
 
“목차(穆差)가 정한 수원(水源)은 이미 잘못된 것인데, 차원들이 감사(監司)에게 말하지도 않고 평사(評事)의 지휘도 듣지 아니한 채 멋대로 푯말을 세웠으니, 일이 지극히 놀랍습니다. 청컨대 잡아다 추문(推問)하고, 감사도 또한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형조 판서 박권(朴權)이 아뢰기를,
 
“홍치중의 상소에 보건대, 수원(水源) 중에 최초의 한 갈래는 곧 목차가 정한 것인데, 이번에 세우는 푯말은 안쪽으로 거의 20리 가량 옮겨 세웠다고 했습니다. 만일 뒷날 그들이 와서 보고 멋대로 옮긴 까닭을 묻는다면 무슨 말로 답하겠습니까. 목차가 정한 물이 비록 북쪽으로 뻗어나갔다 해도 진장산(眞長山) 밖을 굽어 돌아 흘러내려 가는 것인 듯하고, 그 사이의 연무(延袤)가 비록 넓다 하지만 이미 목차가 정한 것이니 이대로 한계를 작정해도 진실로 해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끝내 과연 북쪽으로 뻗어나가 두만강에 속하지 않는 것이라면 목차에게 말을 전하되, ‘당초에 정한 것은 잘못 안 것 같다.’고 한다면, 그들이 마땅히 답변하는 말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이유가 아뢰기를,
 
“그들이 이미 경계(境界)를 정하고 돌아간 뒤 이러한 잘못이 있음을 우리 쪽에서 발단(發端)하여 그들을 견책(譴責)받게 하는 것은 또한 불편한 데 관계됩니다. 우선 목차에게 연유를 묻고 답변을 얻어 본 다음에 요량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겠는데, 시급하게 다시 간심(看審)하지 않을 수 없으니, 도내(道內)의 수령(守令)들 중에서 일을 잘 아는 사람을 차원(差員)으로 택정(擇定)하여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본도(本道)로 하여금 다시 가서 자세히 살펴보고 계문(啓聞)하도록 하였다. 이유가 또 청하기를,
 
“접반사(接伴使) 또는 감사(監司)가 데리고 간 군관(軍官) 중에서 한 사람을 가리고, 선전관(宣傳官)과 무신(武臣) 중에서 또 한 사람을 가려 보내어 차원들과 함께 간심(看審)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중략)

 

경계를 정하면서 있었던 잘못에 대해 조선조정에서 논의하는 내용이다.  청의 관리가 정했다는 이유로 조선관리조차 제대로 확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문제에 대한 대응책을 의논하고 있다.

 

當初淸差, 自白山而下, 遍尋水源之際, 行到此地, 駐馬而言曰: “此卽土門之源也”, 不復窮其下流, 由陸而行。 及到第二派, 見第一派之來合曰: “其水果合於此, 其爲土門之源, 明的無疑。 以此定爲境界” 云。 此其衆水源派定界曲折之大略也。 臣率諸差使員, 到淸差所謂江源還入之處, 監役、差員, 皆以爲: “此水雖摠管所定江源, 而伊時事急, 不及遍尋其下流。 今當立標, 不可不一見” 云。 臣使許、朴【居山察訪許樑、羅暖萬戶朴道常。】兩差員, 同往審見, 還告曰: “順流而行, 幾至三十里, 此水下流, 又與北來他水合, 漸向東北而去, 不屬於豆滿江。 必欲窮尋, 則勢將深入胡地。 如或逢着彼人, 事涉不便, 未免徑還” 云。 蓋淸差只見水出處及第一派、二派合流處而已, 未嘗逐水而下, 窮探去處, 故不知渠所見之水, 則流向別處去, 中間別有所謂第一派, 來合於二派, 而誤認, 以渠所見者, 流入於豆江, 此固出於輕率之致。

 

“觀洪致中疏, 水源最初一派, 卽穆差所定, 而卽今立標, 則移設於內邊幾二十里許云。 他日彼若來見, 問以擅易之由, 則何辭以答乎? 穆差所定之水, 雖曰北走, 似自眞長山外迤回流下, 其間延袤雖廣, 旣是穆差所定, 則以此仍作界限, 固無所妨。 終果北走而不屬於豆江, 則送言穆差以爲: ‘當初所定, 似是錯認’, 則彼當有所答矣。”

 

위 원문을 통해 두강과 두만강은 동일한 것을 말하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토문강을 두만강을 뜻하거나 두만강의 지류로 인식하고 있었음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애초에 청의 관리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 두만강을 경계로 정하고 그 부분을 확인하러 왔다는 것을 명확히 해주는 부분이 있다.

 

숙종 51권 38년 5월 15일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선부(李善溥)가 13일에 치계(馳啓)하기를,
 
“총관(摠管)이 경유(經由)하는 산천(山川)의 지명(地名)과 도리(道理)를 하나하나 지적하며 자세히 물었으니 기록하는 일이 있는 듯하며, 일행 중에 또 화수(畫手) 가 있었으니 필시 도면(圖面)을 그릴 계획입니다. 그리고 문위사(問慰使)의 예단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고, 접반사와 도신이 뒤쳐질 수 없다는 뜻으로 재삼 굳게 청하였으나 끝내 기꺼이 허락하지 않았으며, 나무를 찍어 길을 열어 장차 검천(劒川)으로 향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날 또 치계(馳啓)하기를,
 
“총관이 압록강(鴨綠江) 상류에 이르러 길이 험하여 갈 수가 없게 되자, 강을 건너 그들의 지경(地境)을 따라 갔으며 늘 천리경(千里鏡)1 을 가지고 산천을 보았습니다. 또 양천척(量天尺)이 있으니, 하나의 목판(木板)으로 길이는 1자 남짓, 넓이는 몇 치였습니다. 등에 상아(象牙)를 씌워 푼과 치를 새겼는데, 치가 12금이고 푼이 10금이며 위에 윤도(輪圖)를 설치하고 한가운데에 조그만 널을 세웠으니, 측량(測量)하는 기구(器具)인 듯하였습니다. 역관(譯官)이 백산(白山) 지도(地圖) 1건(件)을 얻기를 원하니, 총관이 말하기를 ‘대국(大國)의 산천은 그려 줄 수 없지만, 장백산은 곧 그대의 나라이니 어찌 그려 주기 어려우랴.’ 하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백두산 이남은 땅을 다툴 염려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선부가 또 치계하기를,
 
“다시 혜산 첨사(惠山僉使)로 하여금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을 자세히 살피게 하였더니, 강의 근원은 백두산 산마루 중간에서 시작되어 거의 8, 90리(里) 흐름이 끊어졌다가 감토봉(甘土峰) 및 1식(息)남짓 되는 곳에 이르러 비로소 땅 구멍 속에서 솟아나와 무릇 세 갈래로써 두만강이 된다고 합니다.”
 

즉 청의 관리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서로 경계를 명확히 하면서 곳곳을 세세히 살피러 왔던 것이다.

 

우리 사서에 남은 진실... 그래도 간도는 우리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영조, 정조, 순조때까지도 조선과 청은 두만강을 경계로 해서 여러 일을 겪게 되는데 그런 일을 통해서 서로 두만강을 경계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걸 또 다시 확인하게 된다.

 

영조 31권 8년 윤5월 2일 -  비변사에서 청인(淸人)이 두만강변에 초막을 짓고

오래 머무는 일로 아뢰다 

영조 74권 27년 8월 2일 -  명천·부령·온성에 들쥐가 두만강을 건너 넘어오다

 

정조 21권 10년 1월 22일 


부총관 유진항(柳鎭恒)이 북관의 방어에 관한 일을 말하였는데, 묘당에 하달하였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북병사가 행영(行營)으로 이주하는 일을 구례에 따라 변경하지 않은 것은 어찌 의의가 없겠습니까? 두만강이 얼어붙은 뒤에는 저쪽의 육지와 연결되므로 애당초 조그만 경계도 없습니다. 지금은 번호(藩胡)가 작란하는 우환은 없으나, 강변에 파수를 세워서 불의의 우환을 대비하는 것은 나아가면 나아갔지 물러나지 않는다는 병가(兵家)의 계략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의문이 든다. 조선말에 조선, 청간의 간도분쟁은 뭐지 하는거다. 그리고 일본과 청이 맺었던 간도협약은?

 

그 전에 조선말 조선과 청의 간도분쟁을 얘기해야겠다.

 

그전에는 전혀 문제없다가 왜 갑자기 간도분쟁이 생겼을까? 그것은 2가지 요인이 주요한데 첫째 19세기 들어서 조선은 오랜 세도정치로 정치가 실종되고 사회기강이 문란해졌으며

지배층의 착취가 극한에 치달아 갔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은 고향을 등지고 떠돌게 되었고 상당수의 사람들이 강을 넘어 청나라쪽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다 1860년경을 전후로 해서 민란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사회기초가 붕괴되고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일부가 지금의 간도라고 불리는 부분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는데 이때 또 하나의 요인이 생기는데 바로 청의 봉금정책 해제이다. 이 조치로 대대적 이민이 시작되고 이 지역에 대한 통제를 본격화하게 된다.

 

바로 이 시점에서 청은 당시 간도에 있던 조선인에게 지배권을  행사하려 하고 이 과정에서 생긴 마찰을 조선조정에서  알게 되면서 간도문제가 본격화 된 것이다.

 

그리고 일본과 청의 간도협약은 이런 분쟁을 바탕으로 일본은 청의 손을 들어주면서 청에게서 필요한 것을 얻는 것으로 청은 일본에게 일정한 이익을 챙겨주면서 그 동안 문제되었던 부분을 한번에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도 백두산 정계비 세울 때 전후의 정황 1885,1887년에 2차례 감계담판시  서위압록(西爲鴨錄) 동위토문(東爲土門) 이란 원칙을 확인하는 수준에서 토문이 어디냐는 논쟁이 있었다는 점 등을 보면 간도협약은 일본이 조선, 청의 갈등을 이용해서 자국의 이익을 챙긴 것에 다름 아닌 것이 될 뿐이다.

 

간도... 그것이 우리땅이란 근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사서에서 부정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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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뿐 아니라 실학자들의 책에도 토문강은 두만강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간도가 우리땅이란 논리는 일본 또는 중국이 한때 점령했던 우리땅 일부 또는 전부가 그들 땅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논립니다. 만일 거제도나 진도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가 그곳이 한적해지고, 그 사이에 태국인들이 그 땅에 대거 불법체류해 생활했다면 거기가 태국땅이 되어야 하나요?

 

청을 세운 여진족의 발흥지가 왜 우리 땅입니까? 고대부터 중세 이후까지 그곳은 여진족의 거점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하면 고구려나 발해 이야기하시는 분들 계시는데, 그 나라들이 단일민족 국가라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그 이전의 역사는 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처음부터 한반도와 만주에 거점을 잡고 살았다고 생각하세요? 막말로 우리 민족은 한반도에서 진화한 것입니까?

 

땅덩이가 크면 행복하실 거 같으신가요? 미국의 시민들이 핀란드나 네덜란드 시민들보다 행복하답니까? 아주 조그만 나라 룩셈부르크 사람들이 중국이나 러시아 사람들 보다 불행하다 봐야 합니까? 옛 역사를 꾸며서라도 행복하고 싶으신가요? 그건 우리 속에 잠재된 열등감의 표출에 불과하지는 않습니까? 각자 역사를 믿고 싶은대로 믿고 그들 편의에 따라 우기면 세상에 전쟁이 끊이지 않을겁니다. 결국 그런 상황에서 학문이라는 건 개에게나 줘야 되겠죠. '땅덩이 크기 = 위대한 역사'라는 이상한 논리, '위대한 역사 = 선민' 이라는 황당한 무의식.. 이런 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불과 200~300년 전 서구 역사를 보세요. 그들이 정말 강대했는지 그리고 문명적이었는지 말이죠.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살았다는 것 역시 비웃을 일도 아닙니다. 살다보면 이렇게 또 저렇게 살 수 있는 것이죠. 개인의 삶도 그렇지만 역사에도 필연 보다 우연과 환경의 요인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단일민족 신화에 너무 목 매지는 마세요. 민족이란 본래 필연적으로 변하고 뒤섞이는 것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할아버지의 할머니의 15대 조상이 일본인인지 말갈인인지 중국인인지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모든 고구려인들이 죄다 신라와 고려로 넘어왔다고 생각하십니까? 북한과 몇 백년이 분리되어도 여전히 같은 언어와 문화를 가진 하나의 민족이 된다 볼 수 있습니까?

 

간도가 우리땅이라는 거.. 이건 정말 시오니스트와 같은 논리입니다. 그 논리는 학적인 정당성도, 상식적 사고도, 더 나아가 양심도 없는 어거지 논리에 불과합니다. 문화 장사꾼들과 괴상한 애국심을 조장하려는 위정자들에게 낚이지 맙시다. 결코 실제적인 이득도 없으며 오히려 동아시아가 힘대결로 흐를 가능성만 커지고 그럼 이땅을 살아가는 우리들만 죽어납니다.

 

 

 

*그리고 극우파들의 논리로 선동질하며 장사 속 채우는, 그리고 진보인양 행세하는 여러 언론사들도 한심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추천수6
반대수1
베플마승모|2009.05.06 01:25
아예 처음부터 그 만주땅 간도는 청나라땅 이라고 전제를 깔아놓고 들어가시는군요. 허락을 받다니요? 그런식으로 따지면 일본이 독도를 우리보고 가지라고 공식적으로 언급해야 가지는 건가요? 그 땅에는 수많은 우리 조선족이 살고 있습니다. 그 땅은 비어있는 땅이었고 19c말에 그땅을 우리 선조들이 개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청도 1878년 조선은 1881년에 봉금정책을 해제하였구요. 청이 봉금정책을 해제하였다는게 그 증거가 아닐까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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